소설리스트

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86화 (86/155)

86화

클로드의 냉소 섞인 말을 들은 아이작이 살짝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 지금 어지럼증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조금 상황이 그렇지 않나? 줄리엔에게도 약 때문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말이 다르면…….’

게다가 클로드의 말마따나 일전에는 발목이고 이번에는 어지럼증이면 그건 그것대로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며 입 안을 깨물던 찰나, 아이작의 입가에 다소 곤란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주한 내 눈이 잔뜩 흔들리고 있어서 대략적인 고민을 알아챈 듯했다.

다시 클로드를 마주 바라본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일전 공녀님이 약이 너무 쓰다며 찾아오신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 문제를 좀 해결하면 좋을 듯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아, 약.”

느릿하게 약이라는 단어를 읊조린 그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소파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내가 자작의 행동을 탓하면 되나? 그렇게 가까이에서 집적거리는 자세로 ‘약’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부적절하지 않나 싶은데.”

살얼음이 내려앉은 듯한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아이작을 향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미칠 듯이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씩 진정되었다는 점이다. 어지럼증 때문에 흔들리던 시야도 돌아왔고.

상태가 조금 안정되고 나니 주위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가 저렇게 날 선 의문을 가질 만해.’

자세부터 그렇지. 나는 뭔가를 거절하듯 손바닥을 내보인 채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고, 아이작은 소파를 짚고 내 쪽으로 상체를 들이밀고 있지 않나.

나는 짧게 숨을 고르고 클로드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말을 맞춰 상황을 정리하는 게 최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달튼 자작님의 행동이 쓴 약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건 사실이에요.”

짧게 꺼낸 말에 아이작에게 붙어있던 클로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주황색 눈이 습관처럼 나를 구석구석 살피는 게 보였다.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음, 바꾸기로 마음먹은 대상이 약이 아니라 저라서 그래요. 강한 권유와 설득을 통해 안 된다는 말을 돌려서 했다고 할까요. 지금 이 자세는…….”

나는 말을 잇는 대신 테이블에 놓인 빈 약병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작게 웅얼거렸다.

“선생님에게 설득되어 약을 먹어서 생긴 일이거든요. 제가 목 뒤로 약을 다 삼켰는지 확인까지 하지 뭔가요. 진짜 사람인가 싶었어요.”

“그럼 나디아 그대는…….”

“솔직히 화가 치밀어 오르잖아요. 끔찍한 맛 때문에 몸서리치고 있는데 확인까지 한다니까.”

내 말이 그럴듯했던 건지, 아니면 안색이 썩 좋지 않은 내 상태 때문인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있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괴로워진 건 나였다.

‘아, 어쩌냐. 어쩌지.’

이럴 거면 그냥 말을 번복하고 사실을 털어놓는 편이 낫지 않을까? 다시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내가 입술을 달싹이던 때였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시선을 들며 툭, 그 말을 내뱉었다.

“재밌군.”

“아…….”

저 말이 이다지도 오싹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주황색 눈동자에 짙게 일렁이는 감정들과 희미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내 심장을 사정없이 쥐어짰다.

나는 그제야 재밌다는 말이 왜 위압적인 단어로 자주 쓰이는지 이해했다. 나한테 한 것도 아니고 혼잣말이 저 정도면…….

‘아냐. 일단 진정해.’

모든 걸 번복하고 사실을 말하려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진짜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일단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태연해지려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긴장감에 손끝이 차가워진 것 빼고는 몸 상태도 괜찮았다.

“민망하지만, 우스꽝스럽긴 하죠. 이 나이에 약 먹는 걸 확인까지 받다니.”

“…….”

애써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기며 말해도 카르테인 공작은 어떠한 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작게 침음을 삼킨 채 아이작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렇게 셋이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우선은 이쪽부터 정리하는 게 낫겠다.’

나는 목에 힘을 풀고 그에게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다소 피로가 섞인 목소리가 입 사이로 새어 나왔다.

“달튼 자작님.”

“예, 제가 자리를 피해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약에 관한 건……. 일단, 제가 물러나는 거로 할게요.”

“그건 기쁜 말이군요.”

살짝 눈매를 휘어 웃음을 지은 그가 몸을 돌려 카르테인 공작을 바라봤다.

“그럼 각하, 저는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사소한 진료로 나디아 님과 옥신각신하는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터라, 아마 공녀님도 비슷하셨을 겁니다.”

카르테인 공작의 얼굴이 조금 더 굳어졌다. 의도한 건지 아닌 건지, 조심스럽게 덧붙인 아이작의 말이 그를 자극한 것 같았다. 갈데온 영식을 대할 때와 엇비슷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그가 입을 열었다.

“자작의 의견은 딱히 묻지 않았다만.”

“…알겠습니다. 그럼.”

차분히 고개를 숙인 아이작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트레이에 약병을 담아 갈 시간은 따로 없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까지, 카르테인 공작이 집요하게 아이작의 행동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무거운 적막이 깔렸다. 나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카르테인 공작을 불렀다.

“음, 공작님.”

“너무…….”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는데, 말이 겹쳤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공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주한 주황색 눈동자가 사뭇 낯설었다.

짙게 가라앉은 동공 사이로 드물게, 무겁고 끈적거리는 감정이 비쳤다. 무언가를 누르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잠시 말을 고른 그가 느릿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아이작 달튼을 가까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개인적으로는 달튼 자작을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우고 싶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달가워하지 않으실 듯하여.”

“고용한 사람이 딸 옆에 없다면 아무래도…….”

“아니, 골드게이트 공작가와 무관하게 그대가 말입니다.”

흔치 않게 내 말을 자른 그가 눈동자만 굴려 잠시 문 쪽을 주시했다. 이미 떠나간 아이작의 흔적마저도 불쾌하다는 듯 단번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나디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아이작 달튼은 그대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그대는 헷갈리는 면이 있다고 했지만, 제게는 이보다 더 명백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긁히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를 믿지 못한다거나 추잡스러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저는 다만…….”

“미안해요!”

나는 그가 말을 다 잇기도 전 그에게 사과를 먼저 건넸다. 본의 아니게 그의 말을 끊게 되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야 했다.

클로드의 눈이 미세하게 커진 것이 보였다. 그 행동이 말하는 바가 너무 또렷해서, 나는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재차 그에게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괜히 이런 일로 힘든 말 꺼내게 해서.”

인정한다. 아무리 정당한 만남이라 한들, 그에게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을 거라는 걸.

‘나였어도 소피아 일라리아랑 둘이 있는 걸 여러 번 보면 짜증 났을 거야.’

클로드는 이 비슷한 상황을 벌써 두 번째 목격하고 있었다. 두 번 모두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래서 더 미안함이 생겼다.

탓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얼마나 사람의 속을 쓰리게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냥 클로드에게 어지럼증에 관해 말하고 같이 달튼 자작을 보러 갔어야 했나.’

뒤늦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는 치마를 꼭 그러쥐었다.

“나디아.”

“그냥,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번잡스러운데 별거 아닌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달튼 자작을 바로 만나러 간 것도 그냥 익숙하게 나온 행동이었거든요.”

나는 그가 입을 떼기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알아요, 내가 좀 무신경했어요. 어쨌든 공작님과 저는 서로가 주의했으면 하는 사람에 대해 이미 말을 한 상황이었잖아요.”

“…….”

“미안해요.”

연달아 사과를 건네자 클로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들어 좁혀져 있던 미간을 문지른 그가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대를 몰아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짧게 입술을 깨문 그가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척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잠시 주저하다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감쌌다.

그의 주황색 눈이 평소의 온도를 조금씩 되찾아 갔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클로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미안합니다. 어찌 되었든 달튼 자작은 그대와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일 텐데, 이렇게 내 감정을 이유로 입에 사과를 담게 해서.”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그가 사과했다. 복잡한 기분이 엿보이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되도록 달튼 자작과 만날 일을 만들지 말자.’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