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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84화 (84/155)

84화

“들어와…….”

아, 손 하나 까딱하기 싫다. 약 같은 건 싹 무시한 채 소파와 한 몸이 되고 싶은데 불가능하겠지. 소파에 묻고 있던 얼굴을 돌리자 문고리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기억 속의 맛 때문에 몸서리가 쳐졌지만,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줄리엔, 오늘 약이랑 사탕은 뭐야? 아, 아니다. 초콜릿이라고 했던가?”

기지개를 켜며 별 의미 없이 문 쪽을 바라본 나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에 약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 줄리엔이 아닌 아이작이었던 탓이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어……?”

우리 집 의사 선생님 아니야?

나는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의 등장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런 깜짝 만남은 얼마 전 숨바꼭질을 할 때와 비슷하잖아?

‘아니, 달튼 자작은 왜 매번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나는 느낌인 거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봐서일까? 방문을 닫고 걸어온 의사 선생이 다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때 그렇게 보낸 게 마음이 쓰여서 말입니다.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외부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아, 그래서……. 약을 보니 줄리엔에게 다녀오신 것 같은데.”

별일이네. 줄리엔이 내게 미리 언질을 안 줄 리가 없는데.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챈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따로 시간을 잡을까 해서 시녀장님에게 찾아갔는데, 시녀장님은 지난번의 만남이 진료가 아니라 쓴 약 때문이라고 알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그 일로 온 것처럼 둘러대다 약을 받았습니다만, 다른 분에게 따로 원인을 말하지 않으신 건가요?”

“아.”

나는 작게 입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그냥 단순한 두통인데 괜히 말했다가는 다들 걱정할 거 같아서요. 그래서 먼저 물으러 간 거죠.”

클로드나 줄리엔도 그렇지만, 지금 공작가에는 타냐도 있고 전대 공작 내외도 있지 않나.

분명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냐며 난리가 났을걸? 며칠간 알아낸 공작 내외의 성정과 행보를 떠올리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충성 서약이 이제 정말 코앞인데, 그러다가 말이라도 잘못 퍼져나가 봐.’

일순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피아와 로드릭의 먹잇감이 되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다.

“그렇군요.”

대략적인 상황이 그려지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작이 일순 몸을 움찔거렸다.

무언가 떠오른 듯이 눈을 크게 뜬 그가 작게 입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려던 찰나, 아이작이 먼저 눈웃음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닙니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쓸데없이 로맨스 판타지 버프를 받은 아이작 달튼의 눈동자가 녹음처럼 아름답게 일렁였다.

속삭임 속에 뒤섞인 감정이 영 간지러워서 나는 조금 떨떠름하게 답을 내놓았다.

“음, 네. 그랬군요…….”

어쩌다 진료 기록 비밀 유지라는 사무적인 관계가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달콤한 말이 되었지?

‘게다가 저 눈빛, 저거 멜로 눈빛 아니냐?’

아, 아무리 그런 눈으로 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아직 입 밖으로 표출한 게 없어서 무시하는 쪽으로 대처하고 있긴 하는데, 난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사람 아닌가.

‘좋아하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건 당연하다지만.’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쯤, 나지막하게 웃은 아이작이 약을 건넸다. 멜로 눈과는 별개로 해야 할 건 해야 한다는 듯한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그럼 약을 먹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까요? 여기 있습니다.”

“…지금 먹어야 해요? 이야기 다 끝나고 먹으면…….”

“안 됩니다.”

씁, 안 통하네.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사약을 받는 사람처럼 그가 주는 약을 받아들였다. 양이 늘어난 물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으, 으으.”

“잠시만요.”

아이작은 내가 그 끔찍한 노란색 약을 다 넘기는 걸 본 후에야 내게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와. 저게, 저게 사람이냐. 나는 옆에서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안쓰러워하는 듯한 그의 눈마저 기만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별무리꽃이 꽤 쓰기는 하죠.”

“꽤? 지금 ‘꽤’라고 하셨어요? 그, 아니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이 약 언제까지 먹어야 해요?”

“한동안은요? 어지럼증이 있다고까지 하셔서…….”

내 손에서 약병을 가져간 아이작이 테이블에 병을 놓으며 말끝을 흐렸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내가 어지럽다고 해서 더 먹여야겠다는 거야?

보통은 이러면 약이 몸에 안 받아서 그런 거라 다르게 제조한다든지, 섭취를 멈추고 상황을 지켜본다든지 그러지 않나?

“매년 문제없이 먹었던 약이니만큼, 외부적 요인이 더 신경 쓰여서요.”

“아…….”

그렇지. 그렇겠구나. 몇 년째 별다른 문제 없이 먹던 약이니까 바꿀 이유도, 섭취를 멈출 이유도 없겠지. 진짜 긍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건 어쩔 수 없군.

절로 괴로워지는 상황에 한 손으로 목을 문지를 즈음, 아이작이 내 쪽으로 몸을 당겨 앉으며 수첩을 꺼냈다.

“이제 좀 괜찮아지신 것 같은데 문진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괜찮아요.”

문진을 수락하자, 아이작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좀 더 세세하게 몸의 상태를 물어보려고 합니다. 경과도 좀 확인하고요. 어지럼증은 계속 있으신 겁니까?”

“네.”

“심장은요? 가만히 있는데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든지, 가슴이 아프고 조여온다든지.”

저게 그거 아니냐. 그, 부정맥?

나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심장 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리 집중해서 들어도 그저 내 손을 타고 심장이 뛰는 게 전해질 뿐, 크게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어지럼증 말고는 딱히 없는 것 같다.

“음, 아니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좋습니다. 그럼 좀 더 내려가 보죠.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지는 않나요? 위가 쓰리다거나.”

“그 약 때문에 지금 속이 안 좋은 건…….”

“그건 착각입니다.”

아이작치고는 드물게 말을 자른 그가 새로운 질문을 다시 내밀었다.

“흠, 아니면 정신적인 흐름은 어때요? 기분이 오락가락한다든가 때때로 초조하지는 않나요? 악몽이나 불면은요.”

질문은 지난번 진료 때보다도 더 세세했다. 나는 진지하게 내 몸을 뜯어보며 성실하게 그의 물음에 답했다.

“속이 울렁거리기는 하지만 약을 먹어서 그런 거고 기분이 오락가락하지도 않고, 음. 초조한 것도 그다지……. 정말 다 괜찮고 가끔 머리만 어지러운 거 같아요.”

“가끔이라. 빈도수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냥 잊을 만할 때면? 하루에 한 번일 때도 있고, 며칠에 한 번일 때도 있어서 정확한 주기는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아이작의 펜이 수려하게 수첩에 글자를 채워나갔다. 차분하게 내 상태를 적고 살피는 모습이 안정적이었다. 녹색의 눈이 수첩 위를 가만히 훑다가 다시 내게 향했다.

“다행히 별무리꽃의 부작용이 생긴 건 아닌 것 같네요.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꿀이나 와인, 그리고 사과는 조심해 주세요.”

“네? 아, 혹시 별무리꽃과 안 맞나요?”

“예. 어지러워하니 더욱이요. 미리 언급하지 않은 건 세 가지 전부 공녀님께서 선호하지 않고 꺼리던 음식이라서인데.”

잠시 말을 멈춘 그가 펜대로 수첩을 두어 번 톡톡 건드리고는 입을 열었다.

“북부에 오면서 공녀님의 기호가 여러모로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내 눈을 마주 보며 말하는 의사 선생의 모습에 순간 심장이 조여왔다. 주치의니까 먹는 음식을 체크할 수 있긴 하다만.

“어……. 그, 제 기호가 바뀐 것도 아셨군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다정한 미소를 그리며 내 말에 긍정했다.

“그럼요.”

부드럽게 휘어있는 눈매가 어쩐지 그리운 것을 보듯이 작게 반짝거렸다.

“알고 지낸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제가 공녀님께 소원권을 받을 정도로는요.”

“그거야 그렇지만, 입맛까지 알고 있긴 쉽지 않은데.”

“제가 관심이 많아서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그와의 거리가 일순 미묘하게 느껴졌다. 물리적인 거리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은근히 나에 대한 자신의 적극성을 표현하면서도 절대로 선은 넘지 않는 화법 때문에 더더욱. 상대가 직접 표현하지 않으니 대놓고 밀어내기도 그렇잖아.

‘그리고 진득한 미소를 보면 계속 헷갈린단 말이지.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

뭘까.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한 상황 속에서 나는 엉덩이를 살짝 뒤쪽으로 뺐다. 그와 거리를 조금 벌리는 편이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은근슬쩍 거리를 벌리고 있을 때쯤 그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내게 닿았다.

“게다가 저와 공녀님은 그 시기를 함께 의지하며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서로가 힘들 때 모습을 드러낼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디아 님은 아니셨습니까?”

“아니, 그건. 저는…….”

모호하게 흐린 뒷말 탓일까? 그의 녹색 눈에 조심스러움, 서운함, 실망감, 아쉬움 같은 감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아이작의 표정에는 성애적인 감정을 떠나 인간으로서 마음이 덜컥 내려앉을 만한 그런 처연함이 있었다. 나는 클로드가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이런 표정에 약한 사람이었고.

“죄송합니다. 제가 곤란한 걸…….”

고개를 살짝 돌리는 아이작의 입가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아니, 곤란하거나 부정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 아니에요.”

나는 우선 말을 내뱉고는 짧게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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