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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82화 (82/155)

82화

“이게 세정제입니다. 그, 물과 함께 문질러 사용하면 해당 부위를 깨끗하게 해주는 건데, 정확한 답은 제가 아니라 짐머 선생님이 해주실 수 있을 거예요.”

“깨끗하게 씻는다고?”

타냐의 설명을 들은 전대 공작 내외의 표정이 다소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내 방의 욕조와 연결해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 결론이 나온 모양이다.

묘한 표정의 두 사람을 잠시 눈으로 살핀 타냐가 나를 바라보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바라셨던 걸 완벽히 충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저희가 만든 결과물이에요. 서둘러서 만드느라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빨리 보여드리고 싶어서…….”

뒷말을 흐린 타냐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풀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 사이에서 황토색의 고체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런히 놓인 덩어리의 위로는 말린 캐모마일 꽃잎들이 촘촘히 얹혀 있었다.

그게 어딘가 익숙한 기억 속의 물건을 떠올리게 해서 나는 한참이나 그 덩어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단 주신 자료처럼 잿물을 기본적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어, 콩도 갈아서 쓰면 효과가 있긴 했거든요? 재도 여러 가지 재료를 태워서 만들어 봤는데, 확실히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아, 아니지. 그, 이런 것까지 다 짚으면 말이 너무 길어질 거 같으니까 일단 제치고, 뭐부터 말해야 하나.”

횡설수설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에이포드가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원하셨던 걸 다시 꼽아보자면 일단 사람들이 쉽게 문지를 수 있게 고체 형태였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또 쓰기 좋게 자극도 덜해야 한다고 했고……. 어, 또 뭐였지? 아, 쓰고 나면 몸의 기름기나 때 같은 게 지워질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죠.”

“응, 그랬었지.”

“예에, 요건에 맞게 만들어 보려고 신경을 무진장 써서 어떻게 하긴 했습니다. 그 요건을 다 충족하면 치료할 때도 도움이 되겠더라고요. 뭐, 그걸 의사 놈들이 쓸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튼.”

에이포드는 냉소적인 어투로 말을 내뱉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목이 답답한지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어낸 그가 본격적으로 세정제를 만들기 위한 사투를 설명했다. 잿물은 어떻게 걸러서 가공했는지, 이걸 고체로 만들기 위해 어떤 재료들을 시도했는지 등등 무수한 시행착오가 그의 입에서 나열되었다.

‘흥미롭기는 한데…….’

솔직히 우선은 결과물부터 좀 보고 싶다. 손가락을 움찔거리고 입술을 달싹이기를 몇 번, 에이포드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리던 타냐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당연하게도 에이포드는 알아채지 못했다. 타냐는 설명에 완벽히 몰입한 의사 선생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내젓고는 근처에 놔뒀던 물병과 넓은 그릇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행동으로 그의 말을 끊을 생각인 듯했다.

쪼르륵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공간을 울렸다. 적어도 에이포드의 신경을 건들 정도로는 요란했다.

“몇십 분 정도 젓다 보면 기름이 굉장히 뻑뻑해지는데, 거기에 이제……. 타냐?”

한참 잿물을 섞은 기름을 융화하는 방법을 설명하던 그가 기어이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한 눈으로 타냐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르르 눈을 굴리며 에이포드가 보낸 경고의 시선을 피한 그녀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그, 짐머 선생님. 아니, 설명은 정말 너무 좋은데 오래 기다리셨잖아요. 당연히 체험을 먼저 해보고 싶지 않으시겠어요?”

“그건, 뭐……. 써보시죠.”

타냐의 말이 구구절절 옳아서인지 에이포드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어딘가 떨떠름하지만 수긍하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긍정한 그가 내 쪽으로 쓱, 세정제를 내밀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누른 채 고개를 돌려 카르테인 공작을 바라보았다. 따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카르테인 공작이 옅게 미소를 그린 채 내 어깨 위에 올린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꼭 기운을 나눠주려는 듯이.

‘후.’

별것도 아닌 일에 긴장이 되네.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조심스럽게 대야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촉촉하게 물이 묻은 손으로 옆에 놓여 있던 세정제를 집어 들었다.

캐모마일 꽃잎의 바스락거리는 촉감과 함께 곧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당장이라도 손에 문질러 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코에 작은 덩어리 하나를 가지고 가니 묘하게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났다.

내가 향을 맡는 걸 본 타냐가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앗, 지금 잡으신 세정제에는 꿀이랑 캐모마일 잎을 사용했어요. 꽃잎은 위에만 장식으로 올린 게 아니라, 안에도 갈아 넣어서 향을 좀 잡아두려고 했습니다. 제일 강하게 향을 내는 건 역시 압축한 오일 형태인데, 섞여도 문제없는 건가 고민이 되어서요.”

“…아, 그렇구나.”

세정제를 체험하는 동안 타냐가 향을 입힌 방법을 길게 설명해 주었지만, 아쉽게도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손에 쥐고 있는 물건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탓이다.

나는 반박자 늦게 타냐의 말에 답하며 느릿하게 갈색의 덩어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기억만큼 거품이 잘 나는 것도 아니고 부드러움도 덜했지만, 그래도 느낌이 왔다.

“……세상에, 진짜 비누네.”

“네?”

“아, 아냐. 그냥 이 세정제, 비누라고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 것 같아서.”

“비누, 비누……. 어감이 좋네요!”

나는 비누라는 이름을 곱씹으며 미소 짓는 타냐를 뒤로한 채 다시 물끄러미 비누를 응시했다.

내가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던 그 물건이 정말로 눈앞에 딱 놓여 있었다.

‘그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의 수준으로.’

신의 영역에서 온천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르게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물건이 지금 내 손에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주위에 사람들이 가득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저 물속에서 미끈거리는 비누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 나디아 님?”

“…아, 어?”

“무슨 문제라도…….”

더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던 타냐가 결국 내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며 빠르게 고개를 내젓고는 손에 묻어있던 잔여물들을 물로 씻어냈다.

타냐가 건네준 수건으로 물기를 없애자 손등이 비누로 씻기 전보다 훨씬 뽀득거리는 게 느껴졌다.

“음, 그래서 어떠신가요?”

“응? 좋아.”

“정말로요?”

“응, 정말로.”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 되어도 합격점이다. 나는 정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르테인 공작 쪽으로 물과 세정제를 밀어주었다.

공작님도 해 보라는 내 작은 배려였다. 다만, 내가 나눈 배려와는 상관없이 클로드는 새로 만든 비누로 손을 씻어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전대 공작 내외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짧고도 위엄 있는 말로 주도권을 쥔 전대 공작이 주황색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설명을 마저 해달라는 듯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비누의 등장에 잠시 빼놓았던 정신을 다시 붙잡고는 천천히 전대 공작 내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선, 소문과 사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크게 다르지 않다?”

“네. 카르테인 공작님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이 사그라든 것도, 저와 공작님이 엮이게 된 계기가 목욕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다만, 두 분이 생각하시는 것과 다른 점은 신의 축복 사건이 단순히 공작님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공작 부인의 아름다운 은회색 눈동자가 잠시 가늘어졌다.

“지금 내게 그 모든 게 신의 안배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두 사람의 만남이나 이런 게 전부 신의 뜻이었다, 이런?”

“음, 그렇다기보다는 온천수가 정말로 건강에 도움을 주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일단 저와 여기 있는 몇 사람들에게는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 뒤로는 목욕을 피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정제 역시 그 연장선상의 일이고요.”

나는 감정을 읽기 힘든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체 같은 문제로 몇 번이나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건지, 원.’

아니, 아니다. 결국 이 모든 건 우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생긴 일이지 않나. 마음을 고쳐먹은 내가 두 사람에게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어머니, 그건 일종의 확신이었습니다. 내게 생긴 일이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

확신. 확신이라…….

나는 클로드가 꺼낸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좋은 걸 왜 입 아프게 설명하고 있어야 하지? 직접 몸으로 보여주면 될걸. 어차피 체험해 보면 다들 빠져들 텐데.’

게다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갓 나온 비누까지 있지 않나. 넓은 그릇과 따뜻한 온천수,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비누.

탁자 위에 놓인 세 가지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저절로 당겨졌다.

그래. 괜히 비누를 파는 매장에서 매장 앞 큰 대야에 물을 받고 서비스로 손을 씻겨주는 게 아니지. 시험해 볼 수 있도록 자리를 괜히 마련해 주는 게 아니야.

“타냐, 가서 헤르잔에게 온도 조절 마도구를 사용해 여전히 따뜻한 온천수 좀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해 줘.”

“따뜻한 온천수요?”

“응.”

타냐는 토 하나 달지 않고는 빠르게 연구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팔을 걷어붙였더니 카르테인 공작가 사람들의 시선이 단박에 내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시선이 오히려 반가웠다. 나는 나를 향한 세 쌍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에스텔 님, 제게 손을 한번 맡겨 주시겠어요? 제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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