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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81화 (81/155)

81화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는 꿀꺽 침을 삼켰다. 카르테인 공작에게서 뜻하지 않은 말을 들을 때처럼 뺨 위로 슬며시 홍조가 번져갔다.

분명히 말을 들었는데,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어, 지금.

“저를 반겨주신…….”

“뭐?”

“아뇨! 아닙니다.”

열심히 내저은 손이 어쩐지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았다. 나는 느릿하게 손을 쥐었다 펴며 조심스럽게 공작 부인의 표정을 살폈다.

마주하고 있는 그녀의 눈은 여전히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다행스럽게도 공작 부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은 그녀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문을 듣자마자 그이랑 열심히 달려온 보람이 있어. 저 목석같고 이상한 놈을 바꿀 사람이 있을지 늘 걱정이었거든. 그런데 그게 북부 사람도 아닌 골드게이트 가문의 차녀일 줄이야.”

“…….”

“게다가 늘 걱정이었던 클로드의 광증에 대한 문제도 깔끔하게 정리했다지?”

“어머니.”

흘깃 눈동자만 돌려 카르테인 공작을 본 공작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연애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클로드는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내 아들에게 생긴 문제도 문제지만, 그 문제가 끌고 올 미래의 문제들이 더 무서웠어.”

“문제라면…….”

“신의 분노와 엇비슷한 문제들 말이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카르테인은 숨지 않는다. 적 앞에서 카르테인의 약점은 약점이 아니고, 장애물은 넘으면 그만인 산에 불과해. 하지만 클로드가 가진 문제는 그것들과 궤를 달리하지 않았니. 그 문제가 얼마나 오래갈지도 알 수 없었고.”

“아.”

나는 공작 부인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악마의 소행, 신의 벌.

클로드가 가지고 있던 문제는 결코 싸울 수 없고 지워낼 수 없는 존재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나마 혼사라도 정해져 있었다면야 다른 방법이라도 모색했을 텐데, 그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지.

내가 낸 입소리를 들은 그녀가 살짝 턱을 까닥이면서 입을 열었다.

“나디아, 방금 반겨 주는 거냐고 물었니? 아니, 반겨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나와 이안에게 나디아, 그대의 등장은 기적과도 같았는걸.”

거기까지 말한 공작 부인이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러고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카르테인에 와 주어서 고맙다, 나디아. 도리어 마음이 조급해지는구나. 북부가 네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아, 그. 감사합니다. 그리고 북부도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네. 카르테인 공작님과도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머쓱하지만 진심을 담아 건넨 말에 공작 부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시 눈을 굴려 카르테인 공작 쪽을 바라본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짧게 입소리를 냈다. 나와 클로드가 서로 잡고 있던 손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신기한 기분이네…….”

“네에?”

“내가 귀족 영애에게서 클로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거든. 소문은 과장이 되었을 것 같은데,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클로드가 이렇게 바뀐 건지 상당히 궁금해.”

“으음.”

나는 쉽게 공작 부인의 말에 답하지 못한 채 말을 골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카르테인 공작이랑 나 사이의 일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굳이 말을 할 만한 내용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나와 카르테인 공작이 가까워진 이유라면 사실 그거밖에 없지 않나.’

그냥, 서로 보는 세상이 같아서.

사람은 비슷비슷한 부류끼리 모이는 법이고, 그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다가 마음을 주고받는 법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전대 공작 내외의 환대는 감사한 일이지만 내가 두 사람의 생각처럼 카르테인 공작을 구원한 건 아니라서…….

‘사실 나는 북부에 머물게 되었을 때 카르테인 공작이 내 유일한 구원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카르테인 공작은 지금도 내 목욕 사업과 뽀송뽀송한 인생 계획의 핵심적인 인물 아닌가.

아무래도 두 분이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건 겉으로 정리된 상황 때문인 것 같은데, 나와 카르테인 공작이 둘 다 목욕을 자주 즐긴다는 건 아시는 거겠…지?

‘음, 아니라면 큰일인데. 사실은 구원자가 아니라 카르테인 공작이랑 똑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생긴 거에 가까운데, 어쩌지.’

곤란한 생각이 마구 샘솟아 대체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거기까지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보다 먼저 공작 부인의 말을 가로막은 카르테인 공작이 그대로 나와 공작 부인 사이를 파고들었다. 익숙한 손길로 부드럽게 공작 부인의 손을 떨군 그가 내 손을 잡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골드게이트 영애가 당황하지 않습니까. 첫 만남에 이 정도 하셨으면 됐습니다.”

“그건… 그렇구나.”

카르테인 공작의 말을 들은 공작 부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내 자유분방한 몰골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준비할 겨를도 없이 우리가 들이닥쳤겠군. 클로드의 말마따나 영애가 많이 당황할 만해. 미안하구나. 나도 이안도 너무 흥분한 모양이야.”

“괜찮습니다. 음, 놀란 건 사실이지만 많이 궁금하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조심스럽게 말하자 공작 부인이 조금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먼저 생각까지 해주다니, 우리 보석은 마음씨도 따뜻하지. 우선은 클로드의 말처럼 나가 보마. 우리 역시도 집에 있기에 마땅한 옷차림새는 아니라서.”

나는 먼지 냄새가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으로 달려온 탓에 두 사람은 여전히 외출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북부의 바람을 버틸 수 있을 만큼 두툼한 외투조차 벗지 못한 상태라는 뜻이었다.

“클로드, 우리 방은 그대로니?”

“예, 오신다는 전언을 듣고 줄리엔이 잘 마련해 두었습니다.”

“좋아. 이안, 가볼까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공작 부인이 부드럽게 전대 공작에게 팔짱을 꼈다. 전대 공작은 다정하게 아내의 손등을 감싸면서도 뭔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이안?”

“아아, 생각하지 않았던 걸 봐서 말이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공작 부인의 되물음에 공작이 가볍게 턱짓을 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은 욕실이 마련된 작은 방 쪽이었다. 클로드와 꼭 닮은 주황색 눈이 그를 고스란히 담은 채 입을 열었다.

“이 집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것 같지는 않군그래.”

“아버지.”

“소문으로 들은 것과 사실이 어느 정도로 다른 거지?”

아, 역시. 뭔가 곤란할 것 같더라니.

나는 굳어진 전대 공작의 표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짧게 탄식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가볍게 의문은 풀어야 할 것 같아 운을 떼려던 때였다.

“어? 문이 열려있네. 실례하겠습니다. 그, 영애님! 아무래도 영애님이 생각하셨던 그 세정제를 만든 것 같아서 확인차, 어…….”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 나는 하필 지금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에이포드를 보고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맞닥뜨려 뻣뻣하게 굳은 그가 느릿느릿 눈을 굴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주 어색한 목소리로 다시금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세정제……. 다 만든 것 같다고…….”

“세정제?”

또다시 의문 섞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같이 보고 같이 체험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황을 정리하는 게 낫겠다.

나는 빠르게 마음을 먹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네, 따로 연구하던 게 있어서. 음, 괜찮으시면 같이 보러 가실래요?”

* * *

“여긴…….”

“네, 연구실이에요.”

나는 담담하게 공작의 말에 대답하며 에이포드를 따라 방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구실은 이제 마법사들과 연구원들로 제법 북적이고 있었다.

“이것보다 좀 더 굳혀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상태로도 효과가 없지는 않을걸?”

이것저것 속삭이며 논의하던 이들이 잠시 말을 멈추고 우리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인사를 받아주며 에이포드를 따라간 나는 곧 탁자 위의 물건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있는 타냐를 볼 수 있었다.

“타냐.”

“아, 나디아 님! 공작님! 어서 오세요! 그리고, 음…….”

“전대 공작님과 공작 부인이셔.”

“아!”

타냐는 연구실에 박혀 세정제에만 몰두한 건지, 전대 공작 내외의 등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소개에 화들짝 놀라 몸을 숙인 그녀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그, 제가 여기에서 거의 살다시피 해서……. 앗, 그러고 보니 인사가 먼저… 저, 저는 타냐라고 합니다!”

“사과는 됐다. 그래서 세정제라니?”

“어, 네!”

아주 잠시 에이포드와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은 타냐가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보여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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