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쾅!
다급하게 문이 열리자 안에서 복작거리며 연구를 하던 사람들이 동시에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그중 몇 명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벌렁거리는 심장을 쥐기도 했다. 에이포드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손이 흔들린 탓에 탁자 위에는 검은 약물이 후드득 떨어져 있었다. 에이포드는 검게 물들어 지저분해진 자신의 옷을 확인하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콧김을 내뿜고 있는 타냐를 응시했다.
“하아……. 타냐, 뭔데. 이번에는 왜 그러는데.”
“선생님.”
비장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에이포드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말 안 해도 돼. 게일, 쟤 오늘 나디아 님 뵈러 다녀온다 그랬었지?”
“어, 예. 그랬죠.”
머쓱하게 대답하는 게일의 모습에 그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그래. 그럼 또 공녀님한테 감동받아서 저러는 거겠지. 공녀님이 또 놀라운 말을 했다느니, 뭐 그런 거.”
“짐머 선생님, 우리…….”
“우리는 무슨. 으, 이러다 문 다 부서지겠네. 타냐, 아무리 그래도 문은 좀 살살 여닫으라고 내가 몇 번 말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걸 보라고요!”
에이포드의 말을 자르고 버럭 언성을 높인 타냐가 방금까지 품에 안고 있던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고작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목록이었는데도, 귀한 물건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인상을 쓴 채 버럭 언성을 높이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이 은근슬쩍 종이를 힐끔거렸다. 에이포드는 안경을 고쳐 잡고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글씨를 읽었다.
“불 속성 마도구 목록……. 이게 뭐야? 마도구?”
“마도구요? 갑자기 웬 마도구?”
종이를 팔락이며 내용을 훑어보는 에이포드와 얼마 전 고용된 연구원들을 향해, 타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골라요.”
“뭐?”
“이 중에서 원하는 거 다 고르라고요. 나디아 님이 필요한 거 있으면 아무거나 사라고 하셨거든요. 아, 아니다. 이미 산같이 구매하셨으니 우선 도착하는 거 보고 고르든가.”
“…뭐라고?”
타냐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에이포드가 새끼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후볐다. 그런 에이포드의 옆으로 와 있던 게일 역시 고개를 기울이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타냐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연구원들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여기까지 뛰어오면서 생각한 것을 쭉쭉 내뱉었다. 1분 1초도 아까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 저 종이를 보는 게 먼저가 아니지. 빨리 짐 싸요.”
“짐?”
“나디아 님이 마법사들도 고용했다고 하셨거든요? 그럼 아무래도 이렇게 의사 선생님 연구실이나 거처에서는 개발하기 힘들 거 같아요. 공작저로 찾아가서 연구할 자리를 달라고 해야겠어요.”
“저기, 타냐.”
“음, 그래! 그렇지 않아도 여기는 향이 나는 재료들을 수납할 공간이 부족했는데, 이제 그건 해결되겠네. 숙식은……. 뭐, 그것도 일단 공작저에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말을 하면서도 가방에 병들을 챙기고 있는 타냐를 바라보며 게일이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이 모든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쉐리가 짧게 손뼉을 치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혼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우리 고용주님이 또 돈을 엄청나게 쓰셨다는 말이구나.”
고기도 먹어본 사람만 아는 법이다.
오랜 기간 타냐와 합을 맞췄던 동료이자 처음 나디아의 재력을 맛본 자로서 쉐리는 작금의 상황을 빠르게 눈치챘다.
“영애님이 마탑으로 가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거기서 마도구도 사들이고 마법사도 고용하고 그랬다는 거지?”
“뭐?!”
“응, 맞아.”
뒤늦게 놀라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타냐가 빠르게 긍정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여전히 분주하게 병들을 담고 있었다.
“그걸 얼마나 많은 사람이 봤어?”
“엄청 많이. 게다가 마법사가 저 목록을 나디아 님에게 드리면서 잘 부탁한다고까지 했어.”
“오…….”
쉐리는 타냐의 대답을 듣자마자 길게 입소리를 내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타냐가 그러듯 빠르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에 들고 왔던 큰 가방에 다시 자신의 물건을 넣으며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얼빠져 있을 시간에 빨리 짐 싸세요. 지금 안 움직이면 정신없이 몸만 내빼다가 중요한 거 다 놓칠 테니까.”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나한테도 좀 설명해 봐라.”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에이포드의 신경질에 쉐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세요? 그야 당연히 사람 때문이죠.”
쉐리는 아주 짧게 심호흡하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 곧 일어날 상황들을 공유했다.
“이제 곧 사람들이 돈을 싸매고 달려들 거예요. 돈은 돈을 불러오거든요. 게다가 마법사가 반기기까지 했다? 그럼 말 다 한 거죠.”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
“어떻게 알긴요. 제가 상인 출신인데요. 만약 제가 아직도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면, 저도 돈 싸 들고 쫓아왔을걸요? 어떻게든 이 사업에 발가락 끝이라도 담그고 싶어서.”
“이 사업이 뭔지 아는 게 하나도 없고 썩 매력적이지 않아도?”
“네. 그래도.”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에이포드가 알 수 없다는 듯이 안경을 추켜세우며 고개를 내저었다.
쉐리의 말이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라는 게 밝혀진 건, 그로부터 하루 이틀 정도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 * *
“죄송하지만, 카르테인 공작가는 지금 사람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아주 잠시만! 정말 잠깐이면 된다니까? 그냥 말 한 번만 나누고 약속만 잡아주면 되네! 정말이야!”
“이쪽은 말 한 번도 필요 없어! 그냥 그, 이 봉투랑 편지만 전달해 주게! 이것도 전달하지 못하면 난 정말 주인님께 고개를 들 수 없을 걸세.”
“뭐? 전달? 그럼 내 걸 먼저 전해야지! 내가 먼저 와 있었는데!”
왁자지껄한 바깥 상황이 궁금해 살짝 테라스 너머로 고개를 내민 나는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한 사람들의 머리통을 보고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직접 찾아온 사람부터 아랫사람을 보낸 다른 지역의 귀족까지. 마탑에 방문한 그 사건 이후, 카르테인 공작가는 유례없이 몰려든 인파로 때아닌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렇게 되는 모습을 그리고 시작한 일이긴 한데.’
이건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반응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에 이렇게까지 불이 붙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닌 마탑주의 행동 탓이 컸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가 직접 여기저기 입을 열고 다니기 시작했거든. 근래 아주 흥미로운 사업이 있어서 마탑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이할 거라고 했던가?’
그 비슷한 무언가이기는 했다.
문제는 마탑주가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된 대신관님이 묘하게 경쟁심을 불태우셨다는 거다.
발견도 자신이 처음 하고 진행도 자신이 먼저 했는데 마탑주가 관심을 더 받는 게 영 못마땅하셨던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신전도 큰 관심을 보인다고 말씀하실 줄은 몰랐지. 그것도 충성 서약 때 직접 참석할 거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이러다가 갑자기 마탑주도 오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재차 고개를 내저으며 테라스의 문을 닫았다. 혹시 모르지 않나. 계속 구경하다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될지.
‘그래도 타냐와 에이포드가 빨리 움직여 줘서 다행이야.’
만약 두 사람과 새로 뽑은 연구원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공작저에 들어왔다면, 아마 계획에 꽤 차질이 생겼을 거다.
헤르잔에게 들은 바로는 사람들이 두 사람이 있던 곳까지 찾아갔다고 했거든. 아무래도 내가 타냐에게 목록을 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걸 여러 사람이 봐서 그런 모양이었다.
‘만약 저 사람들에게 에이포드와 타냐가 붙들렸다면…….’
으, 생각하기도 싫었다.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나는 테라스에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렇게 몸을 돌린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병 하나였다.
날개 모양의 금장식이 뚜껑으로 얹어진, 섬세하게 세공된 작은 병.
누가 보아도 성스러운 생김새의 병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사로잡을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뿐일까?
‘분명 미세하게 각도를 다르게 해서 물이 들어가면 빛에 따라 반짝거리게 했다고 했지.’
그럼 신의 축복이 더 피부에 와닿을 거라고도 했고.
나는 잠시 내게 그 말을 해준 청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타냐의 추천으로 다시 봤을 때는 몰랐었다. 더벅머리에 큰 체격을 가진, 다소 울긋불긋한 피부의 남자가 누구인지.
‘사실 근래까지도 잘 기억을 못 했지.’
내가 고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하게 된 건 공작저에 도착한 이후, 그가 내게 병을 건네며 나눴던 대화 때문이었다.
‘이렇게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 물론 이게 제일 자신 있는 작업은 아닙니다만.’
‘도움?’
‘아, 그. 저 게일입니다. 일전에 레티시아에서 타냐와…….’
‘아!’
짧은 내 탄성에 씩 웃는 게일의 얼굴은 제법 건강해 보였었다. 피부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상태였고.
아무래도 같이 일하면서 에이포드가 여러모로 치료를 도와준 모양이었다.
‘사람 일이 이렇게 연결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괜히 마음이 찡해져서 손안에 쏙 들어오는 병을 만지작거리며 코를 훌쩍이던 때였다.
테라스 바깥쪽,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공작가의 현관에서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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