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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72화 (72/155)

72화

그렇게 말한 클로드가 빠르게 몸을 움직여 남자의 사정거리 안쪽을 파고들었다.

눈 한 번 깜박일 사이에 거리를 좁힌 그가 망설임 없이 차고 있던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차가운 금속이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내려앉았다.

상대의 검을 갈취한 카르테인 공작은 바로 몸을 틀어 부드럽게 상대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아주 아름다운 춤을 보는 듯한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히이익! 칼! 칼이야!”

“헤겔 님!”

남자가 지르는 비명에 잠시 주춤하던 그의 수하들이 다시금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물론 클로드에게서 헤겔 갈데온을 빼내지는 못했다. 미처 도달하기도 전 카르테인 공작이 간단한 동작과 말로 그들을 멈춘 탓이다.

“멈춰라. 더 다가오면 이대로 베어버릴 테니.”

“아악! 악!”

“헤겔 님? 괜찮으십니까! 헤겔 님!”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지르는 주인을 보고 그의 수하들이 이를 악물었다. 잔뜩 악이 서린 눈빛으로 클로드를 바라본 헤겔의 수하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무도한 짓을 하다니……! 이건 협박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헤겔 님이 다치시면 갈데온 후작가에서 조용히 있을 것 같습니까!”

권력은 스스로 내보일 때보다 다른 사람이 보여줄 때 더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라 했던가? 클로드가 그 말에 답을 하기도 전 먼저 나선 것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맞아, 나서서 뭘 어쩔 건데. 높으신 귀족이면 다인 줄 알아?”

“무슨…….”

해괴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당황한 헤겔의 수하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짧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서쪽의 국경이면 바다 아닌가? 군대를 끌고 와 봐야 우리랑 엇비슷한 놈들일 텐데, 물에서만 놀던 것들이 북부까지 와서 견딜 수나 있겠어?”

“잘못과 무례는 그쪽이 먼저 저질러 놓고, 왜 각하를 무도한 자로 몰고 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나라도 약혼자를 그런 식으로 건드리면 얼굴을 박살 내줄 거야.”

“맞아. 저분이 소문의 그분 맞으시지?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각하의 약혼자분. 신의 사랑을 받는 분께 더러운 말을 지껄이다니, 무섭지도 않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면 커질수록 수하들의 안색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을 듣다 보니,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은 것이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그들의 안색을 지켜보던 클로드가 살짝 입꼬리를 당긴 채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군.”

“하, 하지만 헤겔 님께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사실을 알았더라면 헤겔 님도……!”

“그게 더 용서가 안 되는데?”

아니, 저게 무슨 소리야. 나는 수하의 호소를 들으며 짙게 인상을 찌푸렸다.

궁극적으로는 클로드 카르테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가 사과했던 것처럼 나는 나 혼자서도 헤겔 갈데온을 처리할 수 있었다. 내밀 배경도, 여차하면 그를 한 대 먹일 능력도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러지 못할 확률이 더 높지 않나. 그것도 그가 처음 착각했듯이 누군가에게 고용된 하녀라면 더욱더.

‘아주 악질이야.’

나는 잠시 결투까지는 너무 과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지금도 봐라. 자기 입으로는 변명 한번, 잘못했다는 말 한번 안 하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창백하게 질린 헤겔 갈데온의 얼굴이 제법 기만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런 헤겔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두 사람의 곁으로 걸어갔다. 물론 이번에는 제대로 숨을 참는 걸 잊지 않았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니까.

“나디아, 검을 치워드릴까요?”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핏기 하나 없는 안색과 과한 호흡, 벌벌 떨리는 몸.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로는 헤겔 갈데온이 아무것도 못 할 거 같거든.

수하들의 어떤 말을 해도 꼼짝하지 않던 클로드가 내가 말을 꺼낸 즉시 헤겔의 목에서 검을 회수했다.

절벽의 끝에서 겨우 살아난 헤겔이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문지르며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게 사과를 하려고 꿇은 건 아니고, 그냥 긴장이 풀려서 그런 듯했다.

“허억… 헉! 가, 감사…….”

“감사는 무슨.”

나는 헉헉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의미 없는 감사를 하는 그의 앞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한 번 더 입으로 숨을 쉬고는 땅에 떨어진 클로드의 검을 주워 들었다.

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묵직했다. 나는 잘 관리된 것이 분명한 검을 옷자락으로 한 번 더 쓱쓱 닦고는 친절하게 남자에게 건넸다.

“이걸 왜 나에게…….”

왜긴, 네 잘못은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그러게, 누가 그런 식으로 나쁜 짓을 하고 다니래?

나는 다정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에 친절히 검을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봐요, 스위트 리틀 키티 씨.”

“무, 무슨…….”

“혹시나 운이 나빴다는 생각을 할까 봐서 하는 말인데, 그거 아닌 거 알죠? 행동은 우리 아기 고양이 씨가 했잖아. 주제넘게.”

그 ‘운이 나쁜 날’을 만들어 낸 건 헤겔 갈데온 그 자신이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이래도 난 괜찮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사람을 취하려는 행위는 인간으로서 주제넘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제가… 넘어?”

마냥 지질할 것만 같던 헤겔 갈데온은 의외로 자기애는 강한 놈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한 말을 되뇐 그가 클로드의 검을 쥐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독기가 서린 눈빛을 보니 내 말의 특정 부분이 그에게 자극을 준 듯했다.

“주제를 지켜라, 도리를 다해라. X발, 언제까지 나를…….”

“…….”

“나를 뭐로 보고!”

뭔가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나쁜 놈의 사연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시큰둥한 눈으로 클로드에게 덤벼드는 헤겔을 바라보았다.

A라는 인물이 누군가의 말에 자극을 받아 새롭게 각성하는 장면은 흔히 봐왔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는 로맨스 판타지 세계이지 판타지 세계가 아니니까.’

만약 여기서 헤겔이 갑자기 실력 발휘를 한다? 그럼 쟤는 빙의자거나 회귀자라는 소리였다. ‘망나니 셋째 아들이 힘을 숨김’이라든가, ‘정신 차리고 보니 망나니 엑스트라였습니다’ 뭐, 이런 제목의 어딘가겠지.

“흐아악!”

하지만 망상은 망상일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헤겔 갈데온은 나보다도 못한 자세로 클로드 카르테인에게 달려들었다. 머리 위로 치켜든 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틀어진 무게 중심 탓에 상체를 휘청이는 헤겔의 상태는 바람에 휘날리는 종이 인형보다도 못했다.

검에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비웃을 광경이었지만, 클로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헤겔의 공격을 직시했다.

가볍다 못해 비어 있는 것 같은 검으로 허공을 홱 내리그은 그가 그대로 땅 위를 미끄러지듯 밟았다. 부드럽게 내디딘 발은 곧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굳건하게 중심을 잡았다.

“이익!”

이를 악문 헤겔이 위로 든 팔을 내리그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손쉽게 1합을 받아낸 클로드는 그대로 상체에 힘을 주어 칼의 궤도를 바꿨다. 칼을 잡은 헤겔의 팔을 반대편으로 꺾어내려는 심산이었다.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데다 제대로 관리도 되지 않은 녹슨 검이 명검의 날을 버텨가며 바르르 떨었다.

―챙그랑!

결국, 그만한 압력을 버텨내지 못한 헤겔의 팔이 그대로 검을 놓쳤다. 소매 한번 스치지 못한 채 꺾인 그의 팔 위로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안타깝게도 헤겔 갈데온은 자기애와 고집만큼 오기가 있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팔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걸 본 그는 그대로 공포에 잠식되어 무너져 내렸다.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

“이 X발! 로드릭 놈! 그 새끼만 아니었다면 이딴 북부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 아니, 아냐!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운이 나빴다고 말 안 할게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렉! 나 죽어! 살려줘억!”

“헤겔 님!”

결투는 헤겔 갈데온의 비명과 아우성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이건 더 이상 명예로운 결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클로드는 이미 그런 헤겔을 경멸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잦은 마수의 공격과 자연의 무서움으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북부의 사람들에게는 이만한 불명예도 없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고요히 반쯤 바닥에 드러누워 ‘나 죽네’를 외치고 있는 헤겔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내뱉은 귀에 익은 이름 하나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로드릭? 성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로드릭이라는 저 이름 꼭 로드릭 헤링본 같지 않냐?’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북부에 오지도 않았을 거라는 말로 미루어 보면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여기서 로드릭 헤링본의 이름이 왜 나와? 그것도 헤겔처럼 질이 낮은 놈한테서?’

어디선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나는 눈썹을 밀어 올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헤겔에게 다가갔다.

“헤겔 님. 숨, 숨을 쉬십시오! 호흡하셔야 합니다!”

“헉, 흐억!”

“이봐요, 스위트 리틀 키티 씨.”

헤겔은 팔에 어마어마한 상처가 난 것처럼 싸매고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검을 쥐여줬을 때처럼 자리에 주저앉아 헤겔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물었다.

“우리 키티 씨가 말한 로드릭이 로드릭 헤링본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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