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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69화 (69/155)

69화

우렁차기 짝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 당연한 말을 뭐 그렇게 비장하게 하고 있어.

“저, 정말이죠?”

“응? 응, 그럼! 빨리 나오면 나올수록 나야 좋지. 지금도 목이 빠질 정도로 기대하고 있는걸?”

“꺄악! 기대하고 계신대!”

타냐는 비명 같은 탄성을 지르더니 이윽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나 보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찌나 눈빛이 열렬했는지, 난 순간 타냐의 눈이 불타는 줄 알았다.

“그, 방법이 있기는 한데요.”

“방법이라면, 빨리 나오는 방법?”

“네. 근데 그게…….”

금방이라도 방법을 쏟아낼 듯하더니, 타냐는 어째서인지 말하기를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그녀와도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로 손톱을 깨무는 모습을 지켜보다 못해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왜? 빨리 나오기는 하는데 뭐, 위험한 거야?”

“아,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그, 음. 돈이, 조금 많이 든다고나 할까…….”

나는 타냐가 조심스럽게 내어놓은 대답에 잠시 두 눈을 깜박였다. 돈? 지금 돈이 많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기를 머뭇거린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돈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골드게이트 가문의 딸이자 카르테인 공작의 약혼자인 내 앞에서?’

나는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후, 아무래도 내가 타냐에게 얕보인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그만큼의 신뢰를 주지 못했든지.

나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짧고 강하게 대답했다.

“타냐, 나 돈 많아. 정말이야.”

“네? 아, 그. 영애님의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린 타냐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게 아니고, 이게 아무리 그래도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라서……. 평민도 있고 귀족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러다 보니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 생각보다 상당한 금액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그, 헤링본 자작님도 난색을 보이셨고…….”

아, 로드릭 헤링본은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만큼 작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얼마인데?”

잠시 머뭇거리던 타냐가 기어이 내게 금액을 내뱉었다. 나는 그제야 왜 타냐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는지 알았다.

확실히, 고급 인력을 쓰는 일이다 보니 금액이 상당하네. 평소의 나였어도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다 말았을 정도로 큰 액수였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고작 시간 조금 줄이자고 그 큰돈을 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평소의 나와 다르다.

“후후, 후후후!”

“…공녀님?”

나는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타냐를 향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하아. 내가 사업을 전 제국으로 확장하려고 우선 찾아가 두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이야.”

“예에?”

타냐의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주섬주섬 올렸다. 훤히 다리가 드러나자 타냐가 화들짝 놀라며 자기 눈을 가렸다.

“나, 나디아 님!”

꺅꺅거리는 타냐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나는 그간 허벅지에서 떼놓지 않았던, 아주 중요한 물건을 꺼냈다.

“짜잔!”

“어, 이게 무슨…….”

나는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물건을 휘리릭 돌린 채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폈다.

최대한 껄렁하게 타냐의 옆에 앉고 나니 어쩐지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었다 떼고 싶어졌다. 꼭 느끼하게 웃으면 이가 반짝하고 빛나는 사람처럼.

“타냐.”

“예, 예에?”

“어디, 언니와 함께 돈을 펑펑 쓰러 가 볼 테야?”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녀를 보며 나는 소리를 내 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줄리엔에게 부탁해 튀지 않는 옷을 달라고 했다. 신의 분노를 조사하러 갈 때 입었던 것과 비슷한 옷 말이다.

‘자고로 돈 쓰기는 화려하게, 하지만 은밀하게 해야 하는 법이지.’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우선 제대로 된 열쇠로 금고의 문을 열 필요도 있고.

“나디아 님, 갈아입으시는 건 좋지만…….”

“응, 그럼. 같이 가야지.”

줄리엔은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새로운 옷을 가져다주었다.

완전히 옷을 갈아입은 나는 타냐와 줄리엔,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호위 한 명을 데리고 카르테인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은행이었다. 가는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에 황금 열쇠 때문에 잠시 들렀었거든.

그때 뭐라고 했더라. 돈은 언제든 준비하고 있을 테니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에 오라고 했던가?

“다 왔다.”

대리석으로 멋들어지게 꾸민 은행의 정문에는 금으로 된 천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돈이 없다면 감히 발조차 들이기 어려운 분위기가 잔뜩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나는 당당하게 발을 움직여 은행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과 다른 복장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금세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심부름을 온 하녀들과 하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열쇠를 보여주었을 때 안내받았던 공간을 찾고 있는데, 직원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은행을 둘러보는 모습이 좀 수상해 보였나 보다.

나와 줄리엔, 그리고 타냐를 눈으로 훑어본 남자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손을 휘적거렸다.

“여기는 댁 같은 사람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썩 돌아가쇼.”

와, 나 이런 거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단 말이지.

나는 클리셰 덩어리인 장면에 혼자 반색하며 남자 쪽으로 가까이 상체를 숙였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열쇠를 조용히 그에게 보여주며 샐쭉 눈웃음을 지었다.

시큰둥하게 시선을 내렸던 남자의 눈이 잔뜩 커지는 모습이 제법 흥미로웠다.

“어, 어어! 그, 어……!”

나는 말도 잇지 못한 채 나와 황금 열쇠를 번갈아 바라보는 직원에게 작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얘도 골드게이트 가문의 사람이 아니면 황금 열쇠를 쥘 수 없다는 것쯤은 알겠지.

“이렇게 일찍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아. 아, 네! 뭘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 그런데 왜 이런 복장을…….”

“골드게이트 가문의 영애가 열쇠를 사용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그대도 협조해 주지 않겠어?”

“아……!”

자신에게 맡겨만 달라는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직원이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러고는 고압적인 태도로 우리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문제는 제법 그럴듯한 표정 연기와 다르게 그의 말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는 거다.

“거, 도착하면, 뒷문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나! 정신들이 빠진, 그, 하녀로구먼! 따라와!”

아니, 이게 뭐람! 블록으로 만든 인형도 아니고!

나는 심각한 직원의 연기에 경악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니, 이렇게 뚝딱거리는데도 사람들이 신경을 안 쓰는 게 더 신기하다.

나와 비슷하게 놀란 두 사람과 함께 따라간 곳은 열쇠를 들고 찾아왔던 때 안내받았던 바로 그 방이었다. 화려하게 꾸며지다 못해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소파에 편하게 앉은 그 직후, 키가 커다란 남자 한 명이 빠르게 방문을 열고 다가왔다. 일전에 안면을 텄던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허어, 영애님! 잘 지내셨는지요! 아니, 오실 거라 언질이라도 주셨다면 미리 준비라도 했을 텐데요! 조용히 오시고자 한 뜻, 잘 알았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말만 해주시죠!”

“아, 돈을 좀 써야겠는데 여기가 바로 생각나서요. 일전에 들렀을 때 투자하겠다고 하신 그 사업과 관련된 건데…….”

짤막하게라도 설명을 할까 싶어 입을 열자, 지점장이 화들짝 놀라 손을 마구 내저었다. 사람 좋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영애님, 제게 친히 용도를 밝혀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렴, 최우선 순위이신 분인데요! 여기 있는 돈, 편하게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하.”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며 지점장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영애님이 이목을 끌지 않길 원하시는 것 같아 드리는 제안입니다만, 돈 대신 저희 쪽 아이를 붙여드리면 어떻습니까?”

“아이?”

“예. 돌아다니시면서 원하는 걸 고르기만 하시면 그 아이가 은행의 이름으로 알아서 구매할 겁니다.”

아, 그러니까 퍼스널 쇼퍼를 해주겠다는 뜻이네?

나쁠 게 전혀 없는 상황이기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점장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어렸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다 마련해 오겠습니다!”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나서는 모습이 흡족했다. 이게 다 골드게이트 가문의 명성 덕분이다. 이름답게 우리 가문이 나선 사업은 전부 대박이 터졌거든.

‘내가 봉이 김선달처럼 물을 팔겠다는 말을 해도, 악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목욕을 건드려도 환호하더라. 투자만 하게 해달라고 하면서.’

실제로 보니 더 무시무시한 황금 열쇠의 위력을 체감하고 있을 때쯤, 지점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한 명 서 있었다.

“영애님! 여기 이 토마스라는 친구가 오늘 하루 영애님을 도와드릴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의 있게 인사하는 토마스를 보며 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야말로. 지점장……. 음, 그러니까.”

“밀턴! 밀턴 자작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 네! 밀턴, 꼼꼼하게 준비해 주셔서 고마워요.”

“손수 챙길 수 있어 기쁠 따름이지요! 그럼 나가실 때는 어떻게… 이쪽으로 따로? 아니면…….”

“왔던 곳으로 그냥 다시 나갈까 봐요. 사람들 시선도 있고.”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지점장 옆으로, 방금 어설픈 연기와 함께 우리를 안내했던 직원이 섰다.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뜻이었다.

다소 어설프지만 들키지 않은 연기, 두둑해진 지갑, 그리고 돈을 쓸 사람과 장소.

아주 만족스럽게 돈을 쓰기 위해 발을 내디딘 그 순간!

“이봐, 거기 금발 머리 하녀! 아, 그래. 너!”

예상치도 못한 불청객이 내 앞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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