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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67화 (67/155)

67화

로드릭 헤링본은 근래 기분이 무척이나 나빴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업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매출에 타격을 입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아주 작은 이음새부터 조금씩 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실질적으로 체감하게 한 것은 타냐의 탈주였다.

사실 ‘탈주’라는 표현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로드릭 또한 알고 있었다. 타냐는 정당하게 납품 계약의 종료를 알리고 관계를 정리한 거니까.

하지만 그녀를 싼값에 부리는 하인처럼 부려먹던 그에게 이건 주인의 허락 없이 도망간 탈주였고, 배신이었다.

“감히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단 말이지. 지금까지 얼마나 잘해 줬는지도 잊고?”

로드릭이 이를 악물며 집무실의 탁자를 쾅 내리쳤다.

‘향수를 만들 때 써야 하니 비싼 재료를 달라고 했을 때도 별말 없이 원하는 재료들을 구해다 줬어.’

물론, 비싸다고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면서 향수도 겨우 만들 만큼 적은 양을 던져줬다는 건 그에게는 없는 기억이었다.

‘아프다고 하도 엄살을 부리길래 시그니처 향수 하나만 낼 수 있게 배려도 해줬지!’

타냐는 그 무리한 일정을 맞추다 건강이 나빠졌다.

‘그뿐이야? 신의 영역에서 기도하면서 일을 그만둔다길래 그러지 말고 쉬는 거로 하라고까지 했는데……!’

그것이 결국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신의 영역에서 기도? 그것부터가 거짓말이었던 거지. 새로운 연줄을 찾아 돌아다녔을 거다.

“이래서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는 호의를 베풀면 안 돼!”

가진 거라고는 알량한 잔기술밖에 없는 주제에 자신이 대단한 뭐라도 된 줄 알고 기어오른다. 로드릭은 애써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괜찮다. 세상에 향수를 만들 줄 아는 이가 타냐 그 여자밖에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씨근덕대면서 보좌관이 새롭게 인선한 목록을 훑던 로드릭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게 다야?”

“…예.”

“제국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찾아온 게 겨우 이거야! 게다가 여기 있는 사람 중 몇 명은 타냐가 쉴 때 일을 맡겼다가 자른 애들이잖아! 귀부인들 반응이 안 좋아서!”

“하지만 자작님, 지금껏 타냐에게 지급했던 가격으로는 도무지 괜찮은…….”

헤링본 자작의 보좌관은 미처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말을 끝맺기도 전, 그의 얼굴 옆으로 잉크 통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진 잉크 통에서 검은색 액체가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눈을 질끈 감은 그의 귓가로 익숙한 호통이 들렸다.

“닥쳐! 뭐가 어쩌고 어째? 지금 내가 제대로 된 돈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그게 아니고…….”

“보좌관 노릇 하기 아주 쉽군! 자신의 무능력을 전부 돈의 문제로 바꿔버리면 되니까!”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로드릭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제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수준 이하의 사람밖에 구할 수 없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구했다가 향수의 질이 떨어져 평판이라도 낮아지면 어쩌려고!

‘그렇지 않아도 타냐가 쉬는 동안 향수가 예전 같지 않다면서 평이 안 좋아지고 있는데…….’

집무실 책상에 팔을 얹은 채 이마를 누르던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보좌관에게 물었다.

“지시했던 타냐의 감시와 뒷조사는 마쳤나?”

“예. 우려하셨던 사업 기밀의 반출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계약을 맺은 이는 아무래도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 같습니다.”

“누구?”

“카르테인 공작의 약혼자이자 골드게이트 가문의 차녀인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 말입니다.”

“지금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

로드릭은 보좌관에게 짜증을 부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골드게이트라면 이번에 은행에 사업 자금을 받으러 갔다가 거절당하며 들은 이름이었다.

무슨 열쇠 때문에 우선순위가 달라졌다고 했던가? 그래서 지금 당장은 그의 몫을 내어주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때는 그냥 공작 위가 깡패라면서 현실이 거지 같다고 넘겼는데…….’

이제는 그 이름이 입 안에 돋은 혓바늘처럼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타냐를 데리고 간 주범이란 말이지?

아무래도 수상하다. 분명 어디에서 정보를 듣고 헤링본 자작가를 견제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디아 골드게이트, 대체 뭘 했지? 매수라도 한 거야? 그랬다면 대체 뭣 때문에?’

도무지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존재가 그의 기분을 더 나쁘게 한 것은 맞았다.

‘이러다 레티시아를 이용하려는 새 사업도 훔쳐 가는 거 아니야?’

로드릭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상황이 이렇게 꼬인 것은 전부 나디아 골드게이트 때문이라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그녀에게 돌렸다.

“지금 거기서 뭣 하고 서 있나! 응? 멀뚱멀뚱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다야!”

이를 악문 로드릭이 재차 소리를 지르려던 때였다. 집무실의 문 쪽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링본 자작 가문의 첫째이자, 일라리아 백작가의 여주인인 소피아 일라리아였다.

“그럼 안 되지, 로드릭. 집무실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다니. 사람들이 헤링본 자작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누나? 누나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안녕, 로드릭. 논의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는데 제법 화가 많이 나 보이는구나.”

고상한 표정과 도도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에 들어온 그녀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슬쩍 눈을 굴려 보좌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차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단번에 그녀의 의중을 알아챈 보좌관이 그 틈을 타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소피아가 샐쭉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보좌관을 바꿀 생각이라면 조금 더 써먹다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 테니까.”

“그놈이 무능력해서 화가 난 건 맞지만, 됐어. 귀찮게 언제 또 사람을 구하고 앉았어?”

소피아 일라리아와 꼭 닮은 로드릭의 분홍색 눈에 짜증이 한가득 담겼다 사라졌다. 개인용 의자에서 일어나 소피아 앞에 털썩 앉은 그가 양팔을 소파 위로 걸친 채 머리를 뒤로 젖혔다.

갑갑하다는 듯이 넥타이를 반쯤 풀어 헤친 것은 덤이었다.

“로드릭.”

“아, 됐어. 내 태도를 지적하려는 말이라면 안 들을 거야, 누나. 그런 쓸데없는 말을 듣기엔 오늘 내 기분이 별로야. 용건이 뭐야?”

건방진 로드릭의 말에 잠시 입을 꾹 닫은 소피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서 하란 듯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어.”

“부탁?”

“나디아 골드게이트에 대한 반대 여론을 좀 만들어 줬으면 해. 지금 말고, 나중에. 충성 서약을 할 때.”

“…나디아 골드게이트? 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듣는 건지, 원.”

소피아가 꺼낸 말에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한 그가 눈을 번득였다. 조금 더 말해보라는 듯이 턱을 까닥이기까지 했다.

동생의 흥미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소피아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야.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북부의 안주인이 되는 걸 반대하는 목소리를 만들어. 이유는 뭐라도 좋아. 병약한 그녀의 특징을 꼽아도 좋고, 뭐 품위를 들어도 좋고. 아무튼, 일라리아 백작이 먼저 나설 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야.”

“번거로운 것만 넘기긴. 그래서 누나 말처럼 해서 얻는 게 뭔데? 어차피 각하께서 마음먹은 이상 충성 서약은 그냥 절차에 불과해. 누나도 알지?”

“알지. 아주 잘.”

동생의 말에 대답한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듯 허공을 가만히 훑었다. 소피아의 입매가 작게 비틀렸다.

“그냥, 충성 서약을 받는 날에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서 그래. 결과가 어떻든 최대한 엉망진창이었으면 해서. 나는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싫거든.”

“싫다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소피아 일라리아의 말을 따라 한 그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 빈정거렸다.

“얼마 전 티 파티에서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거 때문인가? 아무리 누리던 걸 뺏기는 게 분해도 그렇지.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굴었어, 누나.”

“…입 다물어. 그건 다 이유……. 됐다,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봐야 뭐 하니.”

로드릭이 킬킬거리는 소리를 듣고만 있던 소피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작게 탄성을 지르고는 제 동생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들었니?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모양이야. 그것도 대신관의 손을 잡고 레티시아에서.”

“뭐라고?!”

“아, 모르고 있었어? 무슨 물병 사업을 한다던데?”

“그 여자가 진짜!”

역시 반응이 빠르네.

짙게 가라앉은 분홍색 눈이 잔뜩 흥분해 바르르 떠는 제 동생을 고요히 관찰했다. 소피아는 로드릭 헤링본을 잘 알았다.

응당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빼앗기는 걸 로드릭 헤링본은 가장 싫어했다. 그리고 이럴 때의 그는…….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잘 알겠어.”

“…….”

“누나가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할게. 반대 여론인지 뭔지 하는 그거, 내가 하겠다고.”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경향이 있었다. 멍청하게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낸 소피아 일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분에 못 이겨 씩씩대던 로드릭이 소피아를 휙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 그 여자 병약하다고 했던가?”

“그녀의 몸이 약하다는 사실은 꽤 유명하지.”

“그래? 그럼 어디 그 약하다는 몸을 좀 들쑤셔 봐야겠네. 그래야 일이 재밌어지지. 안 그래?”

번들거리는 동생의 눈을 본 소피아가 달콤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네. 선물이라도 보내 보는 게 어때?”

순진한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좋아할 법한 그런 선물 말이야.

* * *

“나디아 님.”

“응?”

“헤링본 자작가에서 선물이 왔는데요. 근래 영애들에게 인기였던 초콜릿인 것 같습니다.”

뭐? 헤링본 자작가? 소피아 일라리아의 동생이 자작이라던 거기?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빠르게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응, 버려.”

그런 건 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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