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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64화 (64/155)

64화

‘아…….’

카르테인 공작이 분명한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입의 안쪽 살을 살짝 물며 가늘게 눈을 뜨자, 창고의 문에 기대어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무심하게 팔짱을 낀 카르테인 공작은 누가 봐도 화보 같을 정도로 멋있었지만, 문제는 그의 눈이었다.

‘차갑다, 차가워.’

짙게 가라앉은 주황색 눈이 내 뒷머리를 감싼 아이작의 손을 지그시 바라봤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그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굴려 아이작 달튼을 바라보았다. 클로드 카르테인의 목울대가 작게 울렸다.

“설명이 듣고 싶은데?”

서늘하게 날아온 그의 말에 내 심장이 콩알만 하게 작아졌다. 나를 향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았다. 그래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서, 꾹 입을 다문 채 클로드와 아이작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데…….

‘왜 아이작 달튼은 혼자 이렇게 태평한 거야.’

저 정도의 경지는 되어야 클로드 카르테인의 질투심을 끌어낼 수 있는 건가? 나는 차가운 공작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그의 태연함에 혼자 혀를 내둘렀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 그가 희미하게 내게 웃음을 지어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고 평온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딱히 설명이라 할 게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그저 나디아 님의 머리에 먼지가 앉아서 털어드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발목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눈에 띄었거든요.”

“…발목?”

지금이다!

나는 내 몸 상태를 알아채고 그가 살짝 멈칫한 틈을 타 번쩍 손을 들었다.

뭔 짓을 해서라도 이 어색하고 괴상하며 불편한 분위기를 타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의 시선이 아이작 달튼에게서 내게로 옮겨 오자,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니, 그. 창고에 몰래 숨어들었는데 창가에서 의사 선생님이 저를 발견하고 말을 걸지 뭐예요? 공작님이 벌써 날 찾은 줄 알고 뒤로 홀라당 넘어졌거든요. 놀라서.”

“넘어졌다고?”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그의 눈이 일순 커졌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시거나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건…….”

“에이, 아닙니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엉덩방아 찧은 건데요, 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짱함을 강조했다. 아마 아픈 곳이 있었어도 없다고 했을 거다. 왜? 아이작 달튼과 더 붙어 있다가는 정말로 큰일을 치를 것 같아서.

나는 지뢰 같은 이 상황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여기에서 이런 분위기를 버텨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클로드 카르테인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걸 택하겠어.’

다시 말하자면, 소원권이 달린 내기고 뭐고 그냥 부끄러움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일단 클로드 카르테인은 날것 그대로인 내 모습을 봤고 그런데도 내게 끌린다고 한 사람이지 않나.

‘그래, 그냥 그게 더 속 편하겠어.’

게다가 클로드 카르테인이 내게 뭔가를 바라봤자, 뭐 얼마나 큰 걸 바라겠나. 이미 그는 가진 게 차고 넘치는 사람인데.

나는 폴짝 흙 포대에서 뛰어내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나디아?”

“…공녀님?”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에 두 남자가 다 반응했지만, 나는 우선 아무 일도 아닌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아직도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팔 위로 손을 턱 얹었다.

평소였다면 근육으로 탄탄한 그의 팔을 한껏 느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새가 없었다. 나는 빙긋 양쪽으로 입꼬리를 당기고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 아니, 못 찾을 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제가 졌네요. 괜히 달려왔잖아?”

“…잘 숨으셨습니다.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저도 따로 창고를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라.”

겸손은.

분명 클로드 카르테인은 나를 찾아내고 나서도 한동안 모른 척했을 거다. 내가 숨은 곳 근처에서 산책이라도 했겠지. 나는 혼자 산책하며 시간을 버는 공작의 모습을 상상하다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음, 우선은 방으로 돌아갈까요? 아픈 곳은 하나도 없는데 먼지 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아서 그건 좀 찝찝하거든요. 그……. 내기도 정산해야 할 거고요.”

괜스레 웅얼거리며 뒷말을 흐린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의사 선생님의 초록색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응시했다. 선명하고도 맑은 시선이었다.

“달튼 자작님, 오늘 감사했어요. 덕분에 그, 발목도 말짱하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넘어진 원인을 제공한 게 저인데 도움이 되었다니요. 다치지 않아 정말로 다행입니다.”

“에이, 이 정도야. 그래도 바로 확인해 주셨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나디아 님. 말이 나온 김에 잠시만 제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이작 달튼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소 편안하게 이완됐던 클로드의 팔뚝이 다시금 딱딱해졌다. 나는 도로 팽팽해진 창고 안 분위기를 느끼며 조금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게도 웃고 있는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엉엉 울고 있었다.

‘아니, 우리 좋았잖아. 의사 선생…….’

잘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대체 왜 여기서 갑자기 또 시간을 내어달라는 거야.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싶은 기분을 꾹 누른 채,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을 돌려 말하기 스킬을 사용했다.

“달튼 자작님에게는 언제든 내어드릴 수 있죠. 근데 오늘 말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날짜를 잡아서…….”

“아,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언제든 불러주신다면 그런 만남도 즐겁겠지만요.”

으잉? 아,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무슨 시간을 내달라는 거야?’

내 눈에 궁금증이 서린 것을 본 아이작이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차분히 걸음을 옮겨 나와 클로드 쪽으로 다가온 그가 자신의 품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아이작은 노란 액체가 담긴 병을 내 손에 쥐여준 채 짧게 입을 달싹였다.

“이것 때문에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겁니다.”

“아……. 이건 뭔가요?”

“약입니다. 정확하게는 보충제나 영양제에 가깝겠네요.”

차분히 약을 설명한 아이작이 마저 말을 이었다. 이 약을 갑자기 건넨 이유에 관해서였다.

“슬슬 겨울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공녀님은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크게 앓고는 하셨는데, 북부는 수도보다 더 기온이 낮고 건조하다 보니 걱정됩니다.”

“아, 그래서 준비했다는 듯이 품에서 약을…….”

“맞습니다. 언제든 마주치면 드리려고 가지고 다녔거든요. 꼭 챙겨서 드세요. 세 번으로 나눠서 따뜻한 물과 섞어 드시면 됩니다.”

세 번 나눠서 따뜻한 물과 함께.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속으로 그가 한 말을 되뇌는데, 아이작이 생각났다는 듯이 약속을 잡았다.

“하루에 한 번 정도 드시면 되니까 약이 떨어질 때쯤 다시 만들어서 찾아뵙겠습니다.”

“으음… 삼 일 후에 오겠다는 거죠? 고마워요, 달튼 자작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내저은 그가 잔잔하게 웃었다.

“뭘요, 공녀님을 위하는 건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다음에 또 뵈어요!”

짧은 묵례와 함께 아이작이 나를 배웅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함께 거세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로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심지어는 대충 잡고 이끄는 거로 부족해서 반쯤 팔짱을 끼다시피 그에게 달라붙기까지 했다. 다행스럽게도 공작은 군말 없이 내가 가자는 대로 나를 따라와 줬다. 어지간히도 창고에서 아이작 달튼을 보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창고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어느샌가 우리 주위로 꽃이 보일 때쯤이었다.

“공작님.”

“예, 나디아.”

“공작님이 이겼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약간의 허무함을 담아 클로드에게 내가 졌음을 시인했다. 하기야, 허망한 기분도 당연한가?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거든.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생각하시는 것과 다를 거라고.”

“…아니, 그런데 뭔가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는 하단 말이에요. 정말 날 좋아하는 건지 조금 헷갈린다고 할까…….”

조금 전에 느꼈던 걸 고스란히 늘어놓고 있자, 클로드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진짠데!’

괜스레 억울해져서 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에게 툭 원하는 것을 물어봤다.

“아, 그래서 소원이 뭔데요.”

“분명 ‘아무거나’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네, 그렇기는 한데요. 죽은 사람을 되살려 달라는 거나, 시간을 과거로 돌려달라는 거, 그리고 소원을 늘려달라는 소원은 안 됩니다.”

나는 장난기가 담긴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는 그의 옆에서 담담하게 불가 항목을 줄줄 내뱉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요술 램프의 요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재밌는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소리 내어 나지막하게 웃던 클로드가 나를 마주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소원은…….”

“나디아 님!”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했다. 공원의 저 멀리에서 줄리엔이 나를 크게 부르며 뛰어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지.

우리가 있는 쪽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가 작게 숨을 몰아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화사하게 웃음을 지으며 내가 그동안 손꼽아 기다려 왔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왔습니다!”

“응? 뭐가?”

“나디아 님이 기다리셨던 타냐와 에이포드 말입니다. 언제든 도착하면 바로 말해달라고 하셨던 것 같아서, 두 분이 함께 계신 걸 알면서도 잠시 실례했습니다! 어떻게, 응접실로 지금 가시겠어요?”

어, 당연하지!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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