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결연한 표정으로 문을 닫고 나서자, 복도 가운데 서 있는 줄리엔과 헤르잔이 보였다. 두 사람은 혼자 방에서 나온 내가 의아한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 나디아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각하는요?”
애석하게도 지금은 헤르잔의 말에 답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가야 하거든.
나는 한달음에 두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의 어깨를 한쪽씩 잡았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통로나 숨을 만한 곳!”
“…네?”
“클로드 카르테인이 잘 모르는 곳 좀 말해줘, 빨리!”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이해한다.
줄리엔과 헤르잔의 관점에서 보면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분홍빛 기류였던 사람이 뛰쳐나온 거잖아. 그것도 상대방을 피하려는 듯한 말을 하면서. 다행스럽게도 헤르잔과 줄리엔은 숙련된 부하이자 유능한 보좌였다.
“서재 왼쪽 계단, 오른쪽 발코니 화분 아래로 가보십시오.”
상황을 몰라도 일단 답을 내어준 그는 조용히 기척을 죽이기까지 했다. 아, 이렇게 클로드가 알아챌 경우까지 생각해 주다니 정말 완벽하다.
“서재, 오른쪽 발코니, 화분. 알겠어. 고마워!”
“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헤르잔에게 대답하는 대신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를 내달렸다. 속으로는 잊지 않도록 그가 말해준 단어들을 곱씹기도 했다.
‘일단 욱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대책 없이 뛰쳐나오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좀 웃기지 않나?
뛰면서도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어쩌자고 갑자기 그런 내기를 걸었지? 보상은 또 왜 아마추어같이 그 모양이고?
‘지금 이렇게 뛰면서 긴장하는 것도 웃겨. 잡혀봤자 별것도 없는데!’
아니, 아니다. 나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정정했다. 60초 후에 알려준다고 하긴 했는데, 일단 기준이고 뭐고 정한 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래, 그냥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런 거야. 응.’
나는 애써 창피하기 그지없는 과거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솔직히 클로드가 이 같잖은 ‘나 잡아봐라’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클로드 카르테인은 전쟁 영웅이고 여긴 저 사람 집이잖아.’
분명 내 기척만 쫓아와도 잡을 수 있을 거다.
문제는 그가 찾으러 오지 않을 경우인데, 그것도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카르테인 공작이면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우스꽝스러운 말이나 제안을 해도 우선은 받아주고 볼 것 같다는 기묘한 신뢰.
‘애초에 구애 제안을 받아준 것부터가…….’
나는 입으로 마신 공기가 목 안을 차게 채우는 것을 느끼며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언니를 상대하기 위해 했던 훈련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숨이 차 죽을 지경은 아니었다.
‘서재 근처라고 했으니까 슬슬 이 근방에 있을 거야.’
나는 익숙한 공간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어, 저긴가?’
복도의 끝, 화려하게 장식된 서재의 왼쪽으로는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 있었다. 나는 혹시 모를 마음에 신발을 벗고 폴짝폴짝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분명 서재 계단을 내려가면 보이는 오른쪽 발코니, 그리고 화분이랬지? 나는 단번에 보이는 발코니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그러고는 괜스레 조급해지는 마음으로 슬쩍 위층을 바라보고는 손잡이를 돌렸다. 혹시 몰라서 아래쪽의 복도도 살펴보았다. 다행히 저 멀리 사용인 몇 명이 보일 뿐, 그 누구도 이곳에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달칵
열린 문 사이로 익숙한 북부의 바람 냄새가 훅 코끝을 스쳤다. 나는 문틈을 비집고 쏙 들어간 후 빛의 속도로 발코니의 문을 닫았다.
“후……. 일단 됐네.”
사람은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세게 뛰어서 혼났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좋아. 화분 아래에 숨을 곳이 있겠지? 잠깐 몸을 숨기고 생각 정리 좀 하자.”
대책도 좀 세우고. 아무리 카르테인 공작이 나선다고 해도 진짜 실전에서 하듯이 날 찾아낼 것 같지는 않으니까.
솔직히 처음에 떨어댄 입방정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느낌이 조금 들지만, 그런 건 생각하지 말자.
‘떠올리면 좀 슬퍼지니까.’
자, 그럼 이제 화분을 찾아야 하는데…….
“아, 여기 있네! 어? 뭐야, 숨을 곳이 아니라 통로야?”
나는 계단처럼 이용할 수 있도록 가득 쌓인 나무 상자를 보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슬쩍 고개를 넣어 살펴보니 창고인 듯했다.
우선 신발을 신고 조심스럽게 발을 뻗어 나무 상자를 밟았다. 쌓인 상자는 삐걱거리긴 했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팔을 뻗어 발코니의 화분으로 구멍을 다시 막았다. 그러고는 벽을 짚은 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오…….”
작은 창고는 정원을 가꾸는 데 필요한 꽃의 씨앗이나 흙, 도구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나 해서 조심스럽게 창고의 문을 열어보니 틈 사이로 작은 정원이 일부 보였다.
아무래도 공작가 뒤편에 있는 정원 같았다. 작은 오솔길을 지나면 훈련장으로 통하는 그 정원.
―탁
다시금 문을 닫은 나는 주위를 한 번 더 살펴보고는 근처 흙 포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하아…….”
이제 좀 숨이 트인다. 머리도 좀 개운해지는 것 같고.
나는 진정이 된 지금도 살짝 뻐근한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고 나니, 밀어두고 있던 상념이 슬금슬금 몰려왔다.
‘그러니까 아이작 달튼이 나를 좋아하는데 티를 안 내는 거라고? 카르테인 공작은 그런 아이작을 신경 쓰고 있고?’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아이작 달튼이 소피아 일라리아처럼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던 탓이다.
‘그럼… 언니가 아이작 어쩌고 하던 것도 그 비슷한 맥락이었나?’
나는 또 성실한 게 딱 언니 취향인 줄 알았지. 언니는 의사 선생님의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를 보며 흡족하게 여겼으니까. 꾹 깨문 아랫입술이 살짝 얼얼했다.
‘이런 걸 생각하면 내기를 건 게 나쁘기만 한 판단은 아닌데.’
일단 어떤 방법으로든 의사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좀 크기는 해도.
나는 애써 클로드가 무를 수 없다던 ‘아무거나’라는 조건을 잊으며 내기의 기준을 떠올렸다.
정말 아이작 달튼이 나를 좋아하는지 판단할 선을 세워야 하는데…….
‘아니, 그게 가능하냐고.’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잴 수가 있겠나. 그렇다고 내가 가서 직접 아이작 달튼에게 물을 수도 없지 않나. 날 좋아하냐고.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언제든 클로드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지는 것을 느끼며 머리카락을 꾹 쥐었다.
“너, 나 좋아하니?!”
“네?”
“으악!”
갑갑한 마음에 말을 던졌는데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의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던 탓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물건들이 쿠당탕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도무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누, 누, 누구!’
겨우 진정했던 심장이 다시금 쿵쿵 소리를 내며 가쁘게 뛰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들었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카르테인 공작의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창고에 달린 작은 창문 밖에 한 쌍의 눈이 보였다.
‘초, 초록색?’
나는 침을 꼴깍 삼킨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절로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설마 벌써 걸렸나 싶어 바닥까지 떨어졌던 심장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아, 아……. 다행이다. 카르테인 공작의 눈은 주황색이지. 초록색이 아니라. 초록색은 우리 집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뭐라고? 우리 집 의사 선생?
나는 감았던 눈을 빠르게 뜨고는 창문을 뚫어질 만큼 강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덩달아 새어 나왔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정말 놀랐거든.
“다, 달튼 자작님……?”
“저런, 공녀님. 괜찮으세요?”
나는 작은 창 너머로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그의 눈을 보며 꾹 입을 다물었다. 아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이작 달튼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우연에 답하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비비고 있을 때였다. 그가 작은 창문으로 손가락을 하나 보이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가의 정원을 거닐다 보니, 약초로 쓰기 좋은 찔레투구꽃이 피어있어서요. 조금 수확이라도 할까 싶어 창고를 찾았는데 안쪽에서 소리가 들리지 뭔가요.”
“아……. 그랬구나.”
“이곳은 들짐승도 많이 오는 곳이라 대충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문 사이로 공녀님이 보였어요.”
아, 그랬구나. 나는 두 번째 같은 대답을 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나, 이런 곳까지 숨어들었으면 숨이라도 죽이고 있어야지 왜 그렇게 태평하게 있었던 걸까.
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자신을 자책하거나 말거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던 의사 선생이 상냥하게 내게 허락을 구했다.
“공녀님, 괜찮으시면 제가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조금 전에 넘어지시면서 발목을 살짝 접질리신 것 같은데 신경이 쓰여서요.”
“아, 으음. 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망했다.
나는 습관처럼 허락의 말을 내뱉고는 다시금 꾹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이상한 꼴로 마주쳤으니 어떻게 변명이라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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