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자연스럽게 들리는 뒷말에 나는 양손으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거의 다 식은 홍차를 홀짝 들이켰다.
겉으로는 그저 티타임에 충실한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아니, 이렇게 다시 물어볼 줄은 몰랐단 말이야.’
생각보다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디서 봤다고 해야 하지? 그냥 닮은 동물이 생각났다고나 할걸. 쓸데없는 후회가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네, 딱 알맞게 우러났네요.”
“아, 괜찮으시다면 한 잔 더 드릴까요? 제 잔도 비어가던 터라…….”
나는 살짝 잔을 들어 올리며 곱게 눈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면 좋죠.”
안 좋아. 난 이거 마시고 잠시 자리를 뜨려고 했단 말이야. 나는 왜 또 분위기를 타가지고.
저 멀리 떠나간 기회를 안타까워하며 속으로 나를 탓할 때쯤, 내 위로 크게 음영이 졌다.
‘아니, 무슨 그늘이야.’
벌써 해가 그렇게 졌나 싶어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 위로 내려앉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군. 지금부터는 내가 그녀를 데리고 갈 생각이라서. 나디아, 차는 다음에 저와 함께 마시는 게 어떻습니까?”
“공작님?”
어, 진짜 클로드다. 나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그의 머리색이 평소보다 붉게 빛났다.
그 아래로 보이는 주황색 눈동자가 꼭 반질거리는 호박석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손이 먼저 나갔다.
“음?”
내가 손을 뻗자 습관처럼 상체를 낮춰준 클로드가 무슨 일 있냐는 듯 눈빛을 보냈다.
나는 너무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아니, 그냥 눈이 갑자기 보석처럼 빛나길래요. 순간적으로 손이 나갔네.”
“이런.”
평상시와 비슷하게 나간 말에 클로드가 슬쩍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제 눈을 드릴 수는 없으니, 말씀하신 보석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그거로 만족하셔야 할 텐데요.”
“죄송한데 그건 저도 장담하기가 어려워서……. 우선은 될 수 있는 만큼 보석을 많이 가지고 오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클로드는 뻔뻔한 내 대답을 들으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가 웃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 문득 잊고 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아니, 그런데 공작님. 공작님이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 계세요? 분명 저녁 식사 때쯤 오신다고…….”
“최대한 일찍 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평소보다 속도를 낸 덕을 보는군요.”
“아하, 그럼 헤르잔은 먼저 돌아간 건가요?”
“예. 미처 인사를 하고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그렇군. 정말 헤르잔답네.
나는 그가 말했을 법한 대사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잠시 클로드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은 사람인데, 평소보다 속도를 냈다고 하니 괜히 무리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된 탓이다.
내가 눈으로 얼굴의 이모저모를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클로드의 등장에 조용해진 사람들 사이에서 소피아 일라리아가 살포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두 분의 사이가 돈독해 보여 질투가 나네요. 괜찮으시다면 이제 저희의 인사도 같이 받아주시겠어요?”
“아, 미안하군. 일라리아 백작 부인, 그대도 잘 지냈나?”
“예, 그럼요. 저야 늘 무탈하지요.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각하. 그간 건강하셨나요?”
씁, 방금까지 소피아 일라리아한테 당한 게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녀가 클로드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서인가?
어쩐지 백작 부인이 클로드와 말을 하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회사 생활을 통해 겨우 얻어낸 포커페이스로 속마음을 가리고 유심히 일라리아 백작 부인을 살폈다.
“그랬지. 자주 아픈 체질도 아니고.”
“그렇지요. 각하께서는 타고난 기사 체질 아니십니까. 그래도 최근에 신의 분노와 관련해……. 아, 죄송합니다. 이제는 신의 축복이죠? 여하간 그런 문제가 크게 터져서 심정적으로 괴롭지 않으셨을까 걱정했답니다.”
아니, 그걸 왜 그쪽이 걱정하지? 왜? 나 참, 어이가 없네.
나는 흰 눈을 뜬 채 속으로 사사건건 소피아 일라리아의 말에 반박했다. 아무래도 이건 질투가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처음 봤을 때는 천상의 외모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이 이제는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왜 저렇게 깜박이면서 사람을 봐? 손은 또 왜 그렇게 겹쳐놓고? 말할 때마다 꼭, 어? 저렇게 입술을 내밀어야 해?’
시선도 나를 볼 때와는 영 딴판인 게 아주 별로다. 분명 나를 볼 때는 저렇게 안 반짝거렸단 말이야. 분홍색 눈이 클로드를 볼 땐 아주 초롱초롱하다고.
나는 별것도 아닌 걸 걸고넘어지며 괜히 골을 부렸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른 채 클로드는 소피아와 편안하게 대화를 정리했다. 아, 하긴 그렇겠지. 저 사람은 소피아 일라리아가 자길 좋아한다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신의 축복에 대해서는 딱히 마음고생을 할 만한 건 없었다. 특히나 이번 사태가 터졌을 때부터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말이야.”
“아……‧. 그러셨죠.”
“그래.”
잠시 대화가 끊기며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소피아와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이는 클로드 사이에서 나는 꾹 입을 다문 채 옆에 있던 쿠키 하나를 톡 부쉈다.
나는 토독, 부순 쿠키 조각을 자연스럽게 클로드의 입에 넣어주며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 다른 영애들과는 아직 안면이 없으실 것 같은데, 가볍게 소개해 드릴까요?”
“나디아, 그대가요? 짧은 사이에 상당히 친해진 모양입니다.”
“그럼요. 저보다야 백작 부인과 영애들이 친절하게 대해 준 덕이죠. 보이시죠? 제가 앉은 자리?”
나는 일부러 클로드에게 자랑하듯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저만을 위한 자리였답니다. 디저트도, 부드러운 천들도, 화사한 꽃들도 저를 환영하는 의미로 맞추었다고 하더군요.”
“아, 그건… 네! 마, 맞아요! 공녀님을 좀 더 특별하게 맞이해 드리고 싶어서…….”
“귀한 것들로 꾸며보았어요. 다행히 공녀님께서 아주 만족스러워하셔서 즐거운 티 파티가 되었답니다.”
조금 전 일라리아 백작 부인을 위로해 줄 때처럼 말을 얹는 영애들의 모습에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는 나를 본 클로드가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당긴 채 말끝을 늘렸다.
“만족스러워하셨다고요.”
“예. 제가 그랬잖아요. 될 수 있는 만큼 보석을 많이 가지고 오셔야 할 것 같다고. 이 정도의 화려함은 맞춰 줘야 한다는 뜻이에요.”
“아, 그런 거였군요?”
“네, 그리고…….”
나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카르테인 공작에게 손짓했다. 살짝 상체를 들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밀애를 나누는 연인처럼 작게 속삭였다.
“이 자리에 앉으니까 냄새가 진짜 감쪽같이 가려지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 좀 감격했어요.”
“아, 그래서.”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클로드가 다시금 상체를 세웠다. 재미있는 것은 그 짧은 사이에 나를 둘러싼 주위의 풍경이 제법 바뀌었다는 점이다.
직전까지만 해도 발갛게 혈색이 돌던 영애들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뿐일까? 영애들은 입가에 띤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 뭐,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입은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경솔하게 행동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남아 있던 차로 잠시 목을 축인 뒤 소피아 일라리아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어린 영애들과 다르게 태연한 자세로 상황을 보던 그녀가 가볍게 눈을 깜박이며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내가 들고 있던 찻잔을 짧게 본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 재차 내게 물었다.
“으음, 차가 더 필요하실까요?”
클로드의 앞이라서일까? 백작 부인의 표정은 끝까지 상냥하고 또 사랑스러웠다. 나는 고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한 채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충분합니다. 게다가 공작님께서 차는 다음에 자기와 마셔달라 하셨잖아요.”
“…그러셨지요.”
“네. 다름이 아니라 부인께 양해를 좀 구해야 할 것 같아요.”
소피아 일라리아는 내게 되묻는 대신 아주 살짝 고개를 틀어 눈썹을 밀어 올렸다.
그러고는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 코를 찡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 제게 양해를 구하실 일이라면 하나겠네요. 먼저 티타임의 자리를 뜨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제 파트너가 무료해서 여기까지 저를 찾아온 것 같아서요.”
농담을 섞은 내 말에 짧게 소리 내 웃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허락해 드려야지요. 원하시는 곳에서 편하게 즐겨주세요. 쉴 방이 필요하시다면 그것도 언제든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해요.”
“공녀님을 뺏겨 아쉽지만, 우리에게는 저녁 식사가 또 있으니까요. 그럼 그때 뵐게요!”
“네, 그때 뵈어요!”
나와 일라리아 백작 부인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아무래도 내가 느낀 그게 단순한 추측이 아닌 것 같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 아무래도 요주의 인물로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북부의 사교계에 대해서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어. 사업과 더불어서 내 사람이 될 수 있는 이를 만들어야지.’
세상사 쉬운 거 하나 없다더니, 첫 초대부터 이렇게 힘들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티 파티 장소를 빠져나왔다. 이 이야기는 줄리엔과 무조건 상의해야겠다. 기왕이면 따뜻한 물에서 몸을 좀 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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