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러나 무수히 말했지만, 늘 아니었으면 하는 그 하나는 현실이 된다고…….
미루고 미루던 내 추측이 기정사실로 떠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 님!”
“백작 부인, 이제야 오셨군요! 너무 늦어져서 걱정했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잠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영애들이 기다리고 있다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들이 보이는 표정과 말, 그리고 행동들이 누구를 향하는지가 너무 명확했거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노골적이잖아!’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상황에 나는 작게 입술을 벌린 채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보통 이런 건 좀 숨기면서 은근슬쩍 하지 않나?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정말로 맹목적이고 또 노골적인 애정 공세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동안 잊고 지내던 네펠리 영애가 떠오를 정도로.
제 곁에서 조잘거리는 영애들을 받아주던 소피아가 앗,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내 정신 좀 봐. 공녀님, 우선 자리에 앉으실까요? 그렇지 않아도 저 때문에 오래 서 계셔서 힘드실 텐데, 제 생각이 짧았네요. 이쪽입니다.”
아주 상냥하게, 손까지 잡은 채 그녀가 나를 에스코트한 곳은 굉장히 화려하게 장식된 상석이었다.
온갖 종류의 디저트와 귀한 것들로 둘러싸인 자리는 표면적으로는 상대를 높이는 듯했지만, 사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뭐, 통일성이라도 갖춰야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깔끔한 다기 세트로 정갈한 구성을 갖췄는데, 한 사람만 요란한 느낌이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어.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적절한 사교계식의 대처는 불쾌감을 표현하며 자리를 바꾸는 것이었다. 조금 더 강하게 나가면 자신을 이렇게 탐욕스럽게 봤냐고 돌려 타박하는 것까지 곁들일 수 있었다.
‘그게 맞는 대처이긴 한데…….’
나는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니, 처음에는 정석대로 하려고 했는데 막상 앉으니까 자리가 딱 나를 위한 맞춤형 자리라 어쩔 수가 없었다.
‘진짜 완벽하다.’
이 자리에서 안목 없는 사람으로 생각되면 좀 어때. 어차피 여기가 본 싸움도 아닌데. 그런 자존심 싸움보다는 지금 이 자리가 내게 주는 이점이 훨씬 컸다.
‘폭신한 의자, 출중한 간식, 그리고 완벽한 냄새 차단!’
나는 흡족하게 웃음을 지으며 내 주위를 둘러싼 다양한 냄새 차단제들을 훑어보았다.
고급스러운 천에 뿌려진 향수와 화사함을 더해주는 꽃 장식, 그리고 갓 구워 달콤한 냄새가 나는 디저트까지.
‘다 강한 향들이긴 한데, 이게 퀴퀴한 냄새보다는 훨씬 낫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모처럼 편안한 코의 상태에 감격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밀폐된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자리는 어떠신가요? 공녀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디저트들도 준비해 보았는데요.”
“음…….”
“저, 소피아 님. 소피아 님 때문이라니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
짧게 추임새를 넣은 백작 부인이 난처함이 담긴 눈웃음을 지으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러고는 내 옆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직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녀의 말들은 다소 극적이었다.
“제가 실수를 했지 뭐예요. 처음 뵙는 자리인데, 잘 보이고 싶어서 문장을 고르고 고르다 그만……. 이번 티타임이 여성 모임이라는 정보가 누락된 편지를 보내고 만 거예요.”
“아, 저런…….”
“그걸 공녀님을 맞이하면서 알게 되는 바람에, 에스코트를 해주신 헤르잔 경이 다소 난처한 상황에 부닥쳤었답니다. 다행히 공녀님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이렇게 함께할 수 있게 되었지만요.”
그렇게 말한 소피아 일라리아가 나를 돌아보며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에는 미안한 감정이 물씬 담겨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재차 죄송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공녀님. 제 부주의를 용서하세요.”
소피아 일라리아의 말에 여러 쌍의 눈동자가 단번에 나를 향했다. 이건 누가 봐도 다분히 의도적인 상황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림이 이상해져 버릴 테니까.
“에이, 소피아 님. 소피아 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도 아닌데 당연히 용서하셨겠지요.”
“그럴까요?”
“그럼요!”
이미 넘어가겠다는 답도 다 들은 마당에 그럴까요는 무슨. 꼭 정해진 대사와 스토리를 건네받은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잠시 이 틀을 깰까 말까 고민하다 우선은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로 했다.
“그럼요, 부인. 아까도 말했다시피, 더 좋은 것을 나누려다 생긴 착오 정도로 생각하겠습니다.”
“그거 보세요!”
“상냥도 하시지……. 아차, 그러고 보니 소개도 아직이었네요. 아휴, 처음 뵙는 자리에서 잘 보이고 싶은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횡설수설하게 되는지.”
잠시 머쓱하게 웃음을 터트린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양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영애들에게 내 소개를 했다.
“다들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여기는 오늘의 주인공이신 나디아 골드게이트 공작 영애이십니다. 수도에서 북부로 오신 지는 얼마 안 되셨다고 들었어요.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나 다른 영애들이 돕겠습니다.”
“백작 부인의 말이 맞습니다. 언제든 말해주세요. 아무래도 수도와 북부는 다른 점이 많잖아요? 아, 저는 레이나 바톤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틴 리베라예요.”
자기소개로 시작한 공식적인 티타임은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주도하에 아주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정확하게는 나를 빼고.
‘그러니까 이게 그거구나. 그, 로맨스 판타지식 사교계 기 싸움!’
수도에서도 겪어보지 않은 일을 북부에서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노골적이기 짝이 없는 상황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왜지? 너무 짜인 판이라 그런가?
‘도리어 신선한 느낌이기도 하고……? 그, <당신도 로맨스 판타지 여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체험 같달까…….’
아쉽게도 무도회가 아니라 부채 떨구기 장면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겪게 된다면 그 장면이 제일 보고 싶었는데.
‘아니면 상대 얼굴에 장갑을 던지는 장면이나.’
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눈앞의 촌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과 그 추종자들은 이제 은근슬쩍 내 에스코트 상대에 관해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요, 소피아 님. 조금 전에 헤르잔 경을 난처하게 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예, 그렇지 않아도 공사다망하신 분께 죄송할 따름이지요.”
“어머! 그럼 오늘 공녀님을 에스코트하신 게 공작님이 아니라 헤르잔 경이라는 말씀인가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닙니다. 공작님께서 처리하셔야 하는 일이 있어, 티타임은 참가를 못 하실 것 같다고 하셔서요. 저녁 식사 때는 오실 겁니다.”
“아하…….”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답을 내어주고는 다시금 옆에 있는 디저트를 가져와 한 입 베어 물었다. 태연하기 짝이 없는 내 행동 탓일까?
금세 이 주제에 김이 식은 영애들은 북부의 사람들만이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의 상황을 좀 분석해 볼까?’
제일 궁금한 것은 당연하게도 소피아 일라리아의 동기였다. 이 기 싸움의 주동자가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라는 건, 그녀가 은근슬쩍 나를 비꼬는 말을 던질 때부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도대체 왜 그녀가 그러느냐는 건데…….
‘북부 사교계에서의 권력을 내려놓기 싫어서?’
제법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게 답이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는 영원히 소피아 일라리아의 자리일 수 없을 테니까.
‘전대 공작 부인이 돌아올 수도 있고, 변경에 있는 유력한 가문들이 나단으로 올라올 수도 있지. 클로드도 결혼 상대를 찾을 거고.’
그녀로서는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이 자리를 고집하며 이렇게 척을 지는 것보다, 미래의 중심이 될 사람과 돈독히 연을 맺어 입지를 다지는 편이 더 현명했다.
특히나, 그녀는 기혼자가 아닌가. 그것도 카르테인 공작가를 지지하는 가신 가문의 사람.
‘단순히 생각해도 소피아 일라리아로서는 클로드의 약혼자인 나랑 친해지는 게 훨씬 이득인데?’
일라리아 백작가에서 티타임과 관련된 초청장을 다시 보냈을 때, 나와 클로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래서였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내게 호의적인 방식으로 귄위를 이양하려는 줄 알았기 때문에.
‘아, 모르겠네.’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 놓친 조각이 있나 싶어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건드리고 있을 때였다. 생각하느라 잠시 여기저기를 배회하던 시선에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분홍색 눈이 딱 걸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까르르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일순 걱정이 서린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신지요……?”
“네?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다행입니다. 아무런 말도 없으시기에 혹시나 상태가 안 좋으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요.”
왜 혼자 대화에 못 끼고 있냐는 말을 돌려서 전한 그녀가 어색한 분위기에 못 이기는 척 입을 다물었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은 결 좋은 은발을 귀 뒤로 살짝 꽂은 채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나를 응시했다. 분홍빛의 눈동자에 아주 잠시 낯선, 그러나 동시에 낯익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까지 고민하던 질문의 답과 닿아있는 듯한 감정에 내 눈이 동그래진 순간, 그녀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면 혹시, 저희와의 대화가 무료하신지요?”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공간이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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