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인사는 다 한 것 같은데……. 그럼 저녁 식사 전까지 제가 공녀님을 독점해도 괜찮을까요?”
“저런, 이렇게 빨리요?”
일라리아 백작의 말에 소피아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공녀님이 조금 특별하신가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영애들도 기다리고 있고요.”
“오늘이 첫 만남인데도 잘 맞는 것 같아 신기하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영애, 저는 헤르잔과…….”
“잠시만.”
“음?”
내게 말을 걸던 일라리아 백작이 고개를 들어 헤르잔을 바라보았다. 헤르잔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안경을 고쳐 잡았다.
“티 파티가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었습니까?”
“음?”
헤르잔의 물음에 백작과 백작 부인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남녀 한 쌍이 같이 초대되는 자리에서는 작은 무도회처럼 티타임을 갖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었다.
클로드가 오기 전까지 헤르잔이 에스코트를 하겠다고 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티타임을 갖는 동안 곁이 비어있으면 내가 어색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아내가 티타임은 여성 모임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초대장에 일라리아 가문의 토벌대에 관해 의논드릴 사항도 함께 적지 않았나.”
“예?”
“아, 어머……!”
일라리아 백작은 처음 듣는다는 듯한 헤르잔의 표정이 더 당황스러운 듯했다. 혼란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작게 소리를 질렀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두어 번 눈을 깜박거렸다. 잠시 허공을 눈으로 헤아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아요.”
“부인?”
일라리아 백작의 물음에 백작 부인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가… 초대장을 두 번 나누어 썼거든요. 처음 쓴 초대장의 문장이 제 눈에 너무 부족해 보여서 다시 초대장을 썼는데……. 아무래도 전달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겨 이전의 초대장이 간 모양입니다. 그럼 두 분은 이런 걸 모르고 오셨던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달한 논의 사항도 도달하지 않았고?”
“당연합니다.”
“이런, 이래서야 제대로 회의가 진행되지도 않겠어.”
곤란하게 되었다는 백작의 탄식과 굳어버린 헤르잔의 목소리 탓일까? 백작 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손을 앞으로 모으고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경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어쩌지요? 저녁까지 계실 테니 다른 공무도 보지 못한 채 백작가에 매여 계셔야 할 텐데…….”
“아, 그건 아닙니다.”
“네?”
“저는 저녁 식사 자리에 동석하지 않을 거라서요.”
헤르잔의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이 재차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그가 한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그게 무슨……. 헤르잔 경이 오늘 공녀님을 에스코트하시는 것 아니셨나요?”
“아닙니다. 본래는 각하께서 쭉 에스코트하실 예정이었는데, 뺄 수 없는 공무가 있어서 말입니다. 각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제가 잠시 에스코트를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거기까지 설명을 마친 그가 나를 바라보며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재차 이 상황에 대해 사과했다.
“나디아 님, 난처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야 가볍게라도 일라리아 백작과 논의를 하고 공작저로 복귀하면 된다지만, 나디아 님은 갑작스럽게 이 상황을 맞닥뜨리신 것 아닙니까.”
헤르잔의 목소리와 표정, 모든 몸짓에서 진심으로 송구스러워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이런 일이 당연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가 내게 이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헤르잔에게 괜찮다는 의사를 표했다.
“헤르잔이, 아니 헤르잔 경이 사과할 필요는 없죠. 경도 몰랐던 일인데, 괜찮습니다.”
“불편하신 걸 괜스레 참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논의된 사항이 아니니 저와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셔도 상관없고요.”
뭐요? 지금 여기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데요?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 일라리아 백작과 백작 부인, 그리고 그 두 사람 뒤로 서 있는 식솔들을 가만히 눈으로 훑었다.
나는 헤르잔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입을 여는 걸 본 그가 내 쪽으로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내가 더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공작저로 돌아가도 된다고? 지금? 이 사람들은 어쩌고? 공작가의 대표 가신 가문이라면서.”
“예, 일라리아 백작가는 카르테인의 가신 가문이지요. 그러니 무엇이든 나디아 님이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이.”
“…….”
“그런 나디아 님의 의사를 최대한 보좌하기 위해 저와 줄리엔이 있는 겁니다.”
나는 헤르잔의 대답을 들은 뒤 살짝 시선을 돌려 일라리아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백작 부인은 사람들 몰래 아랫입술을 깨문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이 그녀에게 있어서이기도 했고, 자칫하면 이 태도가 공작가에 대한 기만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였다.
‘솔직히 큰일 맞지. 이 자리가 유서 깊은 관례 중의 하나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친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도 몇 번이고 확인하는 판에, 공적인 첫 초청을 이렇게 경솔히 대하다니 말이야. 회사였다면 경위서를 써야 했을 거다.
어째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다시 한번 백작 부인을 확인하고는 그냥 이번 일을 넘기기로 했다.
“괜찮아요. 물론 준비가 제대로 된 상태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어떻게 완벽하기만 하겠어요.”
“나디아 님.”
“이번 일은 넘어가는 거로 할까요? 더 좋은 것을 나누려다 생긴 착오 정도로 생각하겠습니다.”
내가 내린 결론에 일라리아 백작과 백작 부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깊게 안도한 백작 부인이 사슴 같은 눈을 빛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아내의 말이 맞습니다. 아내의 실수를 눈감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오늘은 저희 백작가의 마음을 듬뿍 담아,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물론이에요. 이 모든 게 공녀님의 상냥하신 마음 덕분입니다.”
나는 과하게 나를 띄워주는 말을 들으며 속으로 멋쩍게 웃었다. 아니, 사실 계산을 안 한 건 아닌데…….
어쨌거나 일라리아 백작 부인은 사교계의 중심이 아닌가. 처음부터 이런 거로 빚을 지워둬서 나쁠 건 없지. 게다가 여기서 이대로 돌아가면 줄리엔의 노고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아, 물론 내 시간과 노력도.’
제일 힘을 많이 쏟은 건 당연히 줄리엔이겠지만, 나도 오늘은 꽤 애를 먹었다. 첫 만남이라는 명목 탓에 힘을 줄 대로 줬거든.
어찌 되었거나 이렇게 칭찬을 받는 건 내가 부끄러울 뿐,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나 북부에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고.
“뭘요. 여기에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다소 웃긴 것 같은데, 슬슬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 네! 그럼 저와 함께 티 파티가 마련된 장소로 가실까요?”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말을 들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헤르잔을 돌아보았다.
“알겠어요. 헤르잔, 헤르잔은 어떻게 할 거야? 공작저로 돌아가? 아니면…….”
“제가 공작저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나디아 님을 혼자 백작가에 둘 수는 없지요. 각하께서 오시기 전까지니 그리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요. 여기에 같이 머물겠습니다.”
헤르잔은 내게 일라리아 백작과 집무실에 있겠다며 말을 덧붙였다. 언제든 필요하다면 불러 달라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금 소피아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도 그만 갈까요? 영애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맞습니다. 아마 지금쯤 왜 저희가 오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거예요. 이쪽입니다, 나디아 님.”
소피아의 안내를 따라 백작가의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여기저기 꾸며진 멋진 장식들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런 내 반응을 보며 장식에 대해 이모저모 말해주던 그녀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감사해요. 나디아 님.”
“네? 아아…….”
“따뜻한 바람 덕에 수도의 영애들은 대체로 부드럽고 다정하다더니, 공녀님도 그 기운을 가득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아요.”
으응?
“왜 공녀님이 우리와 다른, 특별한 분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알겠더라고요.”
“…….”
나는 잠시 그녀가 던진 말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게 진실인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써야 했다.
‘잠시만, 정말로?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방금까지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는데? 아니, 백작 부인이 도대체 왜요.
무수히 많은 생각이 떠오르던 찰나,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상냥한 목소리로 내 의문에 못을 박았다.
“영애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해 주면 다들 저처럼 감탄할 거예요.”
…이게 진짜라고?
나는 일하기 시작한 직감을 잠시 저 뒤로 미뤄두고는 일라리아 백작 부인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약 내가 생각한 게 맞는다면 방금의 미소도 상당히 우습게 느껴졌을 테지만, 나는 일단 이 모든 판단을 보류했다.
‘아. 나는 내 인생 장르가 치유, 일상, 잔잔물에 영지물 한 스푼인 게 좋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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