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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55화 (55/155)

55화

아이작의 조건을 클로드가 승낙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르웬 언니에게 북부에 있는 것을 허락받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식으로 약혼과 관련된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체류를 허락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허락하고 난 직후, 아르웬 언니와 루핀은 공작가를 떠났다.

내가 마음에 걸려 다급히 오기는 했지만, 일정이 빈 것은 아니었던 탓이다. 클로드는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면서 아르웬 언니와 루핀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골드게이트 가문에 카르테인이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골드게이트에서 보낸 항의서의 내용 또한 타당해. 아무리 나디아 영애의 의사가 있었다 해도, 가족의 안위가 걸린 만큼 우리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골드게이트를 기만하거나 무시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

‘골드게이트 공작과 공작 부인에게는 따로 또 사죄하도록 하지.’

이미 공작 위에 오른 북부의 주인이 이렇게 직접 고개를 숙이는 것은 정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국의 긴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그런 일.

당황하여 가만히 클로드의 말을 듣던 언니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클로드와 마주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이 사과는 공작가의 대리인이 아닌, 그저 아르웬 골드게이트로서 받겠습니다. 저희가 없는 동안 부디 제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극적으로 화해를 한 두 사람은 그대로 자리를 떴다. 물론, 아르웬 언니는 자리를 뜨기 전 내게 많은 말들을 남기고 갔지만.

‘나디아, 카르테인 공작가와 골드게이트 공작가의 결합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거야. 힘의 균형을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황궁이나 신전에서 말을 얹을 수도 있어. 일이 아주 더디게 흐를 수도, 또 네 생각이나 계획처럼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지.’

‘응,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러니 늘 조심해, 나디아. 가문에서 이야기가 정리되어 수도에 이 일이 알려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정말 심할 때는 목숨의 위협까지 받을지도 모른다며, 언니는 내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진짜 걱정이 되기는 하는지, 언니는 자신과 결투하면서 배웠던 것들을 유지해도 좋을 것 같다며 내게 검을 권하기까지 했다.

‘뭐, 이렇게 말만 하고 간 건 아니지만.’

나는 언니가 돌려받기를 거부한 황금 열쇠와 루핀이 목에 채워준 목걸이를 떠올리며 가만히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분명 뭐라고 말을 해줬던 것 같은데…….”

“뭘요? 루핀 님이 주셨다던 그 목걸이 말씀인가요?”

“응.”

근데 루핀이 알려준 사용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아직도 이게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할까, 꼭 새로운 제품을 사면 딸려 오는 사용 설명서 같았다.

‘그런데 이제 그림 설명 같은 건 없는.’

마정석으로 만들었으니 마법 효과가 있는 목걸이인 건 확실한데, 잘 모르겠네. 가만히 목걸이를 노려보며 만지작거리고 있자, 옆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줄리엔이 나를 불렀다.

“나디아 님, 일라리아 백작가에 초청받은 게 오늘 오후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응? 아아, 맞아! 오늘 오후!”

“그럼… 이제 일어나셔야 할 거 같은데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랍니다.”

아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는 빠르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대의 앞에 앉았다. 화장대에는 상당한 양의 보석과 장식, 그리고 화장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줄리엔의 간결한 박수와 함께 하녀들이 옷들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붉은 계열부터 파란색, 그리고 눈처럼 하얀 드레스까지.

단순한 티타임이 아니라 무도회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 나는 아연히 눈을 깜박였다. 내가 혼자 당황하는 사이, 줄리엔은 익숙한 걸음으로 드레스를 둘러보고는 몇 가지 후보를 추려냈다.

“어느 색을 기본색으로 잡으면 좋으려나……. 남색은 너무 무난하고, 분홍색은 너무 클래식한데.”

계절감을 고려한 밤색? 태양을 닮은 노랑?

추려낸 후보들 가운데 한참을 고민하던 줄리엔은 심사숙고 끝에 두 개의 드레스를 골라 내게 보여주었다.

“나디아 님은 어느 드레스가 좋으신가요?”

그녀가 고른 드레스는 양쪽 다 별다른 장식이 없이 실크로 만들어진 우아한 드레스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어깨가 드러나는 긴팔의 하늘색 드레스였고, 다른 하나는 어깨를 감싸며 아래로 떨어지는 랩 형태의 금색 드레스였다.

드레스를 세세하게 설명해 주던 줄리엔이 나를 바로 마주한 채 웃었다.

“단순한 티타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직접 가신과 만나는 첫 자리이지 않습니까. 친근함보다는 위엄 있고 우아한 느낌을 드러내고 싶어요. 게다가 나디아 님은 공작가에 머물고 계시잖아요.”

“으응, 그런데?”

“공작가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를 받았다는 느낌을 주면, 사람이 섣불리 대하지 못하고 어려워한답니다. 골드게이트 공작가로 부족하다는 뜻이 절대 아니고, 아무래도 가신들에게는 카르테인 공작가가 더 크게 다가올 거라는 뜻이에요.”

나는 줄리엔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괜히 멀리 있는 임금보다 가까운 사또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지.

“금색 드레스로 하자. 하늘색보다는 금색이 더 부요의 시기에 맞을 것 같아.”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줄리엔은 내가 고른 드레스를 입히고 화장을 하며 나를 철저하게 꾸몄다. 신의 축복 때 보여줬던 손놀림은 새 발의 피라는 듯이 줄리엔의 손이 허공을 날았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그 손놀림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우와…….”

“제가 해드렸지만, 뿌듯하군요.”

다정하게 웃은 줄리엔이 시간을 보고는 빠르게 나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마차가 있는 곳에서 나를 맞이한 사람은 헤르잔이었다. 그것도 오늘따라 더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헤르잔.

“나디아 님.”

“헤르잔?”

“이미 들으셨겠지만, 각하께서 오늘 티타임에는 참석을 하지 못하셔서요. 각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에스코트는 제가 맡아드리겠습니다.”

“아, 정말? 헤르잔은 일이 상당히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는 이것도 오늘 계획된 제 공무 중 하나입니다.”

헤르잔의 말을 들으며 나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이것 역시도 클로드의 배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헤르잔은 누가 뭐라고 해도 카르테인 공작의 최측근이자 오른팔이니까.

자신을 대신해 보낼 이로 헤르잔을 골랐다는 건, 줄리엔이 오늘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리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군요. 이렇게 저와 티 타임에 함께해 주시다니 저야 영광이죠, 헤르잔 경.”

“따로 저를 높여주실 필요까지야……. 우선 마차에 오르실까요?”

나는 줄리엔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헤르잔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헤르잔의 말에 의하면 공작저에서 일라리아 백작가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나단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면 나오는 작은 산, 일라리아 백작가는 그 산의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다른 영지에서 나단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바로 앞에 일라리아 백작가가 있습니다. 가문의 상징은 부엉이. 현명함으로 카르테인에 접근하는 자들을 가리겠다는 뜻이지요.”

“그렇구나. 그럼 카르테인 공작가의 상징은 뭐야?”

“흑표범입니다.”

아, 역시. 전통적인 게 가장 멋진 법이지. 나는 카르테인 가문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골드게이트 가문의 상징은 까마귀다.

헤르잔과 이런저런 이야기, 특히 온천 관련 사업과 연구에 관한 논의를 나누다 보니 금세 백작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공작가만큼은 당연히 아니지만, 상당히 유서 깊어 보이는 저택을 보며 나는 작게 감탄했다. 헤르잔의 손을 잡고 내려온 곳에는 일라리아 백작과 백작 부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 학자의 느낌을 풍기는, 젊고 혈기 왕성해 보이는 백작이 먼저 나서 내게 다가왔다.

“오셨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영애. 아, 그리고 헤르잔 그대가 에스코트로 왔군.”

“예, 잘 부탁드립니다.”

짧게 묵례를 하는 헤르잔의 곁에서 나 역시 일라리아 백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부디 단켈이라 편히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쪽은…….

“소피아. 소피아 일라리아입니다, 공녀님. 일정의 변경으로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

남편의 곁에서 한 발자국 더 나온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속으로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 클로드는 대체?’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면서 무난했던 거 같다는 평을 내릴 수 있지?

폭신폭신해 보이는 긴 은발에 분홍색 눈동자, 매력적인 눈물점. 소피아 일라리아는 청초한 매력의 끝을 달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가 북부 사교계의 중심인 이유를 깔끔하게 이해했다.

‘아, 이런 외모면 북부 제패할 만하지. 왜 어린 영애들이 동경하는지 잘 알겠네, 음음.’

반쯤 우스갯소리긴 했지만, 소피아 일라리아의 외모에 대한 칭찬은 진심이었다.

미안함이 가득 담긴 분홍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아주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미소가 입에 걸렸거든.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더 많은 분을 만나 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었는걸요.”

“아, 공녀님께서는 정말 상냥하시네요! 다행이에요.”

안심했다는 듯이 활짝 미소를 지은 소피아가 고개를 돌려 일라리아 백작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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