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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54화 (54/155)

54화

다행스러운 건, 아이작이 말했던 것처럼 검사가 정말 빨리 끝났다는 점이다.

가장 처음 공작저에서 목욕했을 때 받았던 ASMR 검사처럼 괴상한 검사도 몇 개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것들이었다.

검사를 진행하며 종이에 마구 무언가를 적던 아이작이 고개를 들었다. 여러 쌍의 시선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공녀님은 지금 건강하십니다.”

“…하아, 그런가.”

“예. 특별히 걱정되는 부분도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 잦았던 두통도 지금은 호소하시지 않는 듯하고, 또 헛구역질이나 구토로 상했던 식도도 회복되었습니다.”

아이작이 세부적으로 전달하는 몸의 상태를 들으며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하지. 두통이 잦았던 이유는 산소가 너무 부족해서였고, 헛구역질이나 구토는 냄새를 못 참아서 한 거니까. 누차 말하지만 내 병약함의 70%는 다 이 로맨스 판타지의 위생 탓이다.

‘역시, 우리 달튼 자작님. 직업 정신이 투철하셔서 있는 그대로 말해주시네.’

혹시 안 좋게 말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속으로 아이작 달튼에게 사과하며 안도하고 있을 때였다.

아르웬 언니와 루핀에게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던 그가 고개를 돌린 채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레티시아나 근처 온천을 자주 찾으셔서 사실 걱정이 많았는데……. 제 걱정이 부질없을 만큼 활기차신걸요? 일전에 제게 했던 말이 진심이셨나 봅니다.”

내가 했던 말?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지?

“일전에 했던 말이라면…….”

“앞으로는 자주 뵐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이요. 그 말을 듣고 제가 기쁘면서도 슬픈 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음, 어딘가 낯익은 말인데. 잠시 눈을 깜박이던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 아아! 이거 그때잖아, 아기 고양이 사건 때.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음, 앞으로는 이렇게 자주 뵐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요. 제가 언제까지 달튼 자작님을 곁에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아이작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맞아. 제가 그런 말을 했었죠. 더는 안 아프겠다고.”

“설마… 잊고 계셨던 건가요? 저는 그 말을 지키시려고 절 멀리하시는 건가 했는데, 그냥 저를 보기 싫으셨던 거군요…….”

“네? 아,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그, 의도적인 건 아니었어요.”

나는 단박에 처연한 표정을 짓는 아이작을 보고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내가 그쪽을 좀 멀리했던 건 사실인데 그건 댁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고.

당신이 내 뽀송뽀송한 목욕 라이프의 첫 번째 장애물이라서였지! 나 은발에 녹안 엄청 좋아해!

“자작님, 저 진짜로 그런 의미가 아니고……!”

“아하하! 농담이에요. 그, 이렇게 놀라실 줄은 몰랐는데.”

죄책감이 들어 다급하게 외치자,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아이작이 잘게 웃으며 살짝 몸을 틀었다. 책상에 널린 기구들을 다시 가방 속에 넣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정리하는 아이작에게서 시선을 뗀 채 조심스럽게 아르웬 언니를 살폈다. 언니는 내 건강 상태를 듣고는 다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영혼도 점차 안정되고, 건강도 나쁘지 않다라…….”

언니의 중얼거림에 의료 도구들을 가방에 정리하던 아이작이 잠시 손을 멈췄다.

“영혼이라니요?”

영혼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작의 질문을 들은 아르웬 언니가 가볍게 자신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지압하며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간 우리 가족이 나디아의 건강에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 중의 하나지. 나디아가 정신을 차린 이후로 영혼이 다소 불안정했거든. 루핀의 말에 의하면 육체와의 연결이 약하다고 했던가?”

“아…….”

“그런데 그대가 오기 전에 확인해 보니 이제는 영혼이 제법 안정된 모양이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깜박인 아이작이 잠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눈동자에서 언니가 말한 ‘영혼’을 찾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깊게 내 눈을 들여다보던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생각에 잠겨있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릴 때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뭔가를 생각하는 걸 보면.’

역시 의사라서 영혼이라는 말이 다소 허황되게 들리나? 하긴,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신기한 생물을 보듯 나와 눈을 마주쳤던 그를 떠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싸던 것도 멈춘 채 무언가에 골몰하던 그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르웬 님, 그… 의견 말입니다만.”

아, 아니구나. 그냥 아르웬 언니가 부탁한 의견을 정리하느라 고민했던…….

‘뭐? 아르웬 언니가 부탁한 의견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튀어나온 사안에 나는 전기를 맞은 사람처럼 몸을 곧추세웠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다가 이렇게 훅 들어오는 게 어디 있어요!

말을 할 거면 곧 말을 할 거라고 예고를 주든가 그래야지!

“제 생각에는…….”

아이작은 생각이 아직 덜 정리되었는지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 상황에 제법 심장이 조여와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클로드의 손을 잡았다.

무의식이 이곳에서 지금 내게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존재를 알아서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마주 잡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아이작의 얼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나디아, 분명 괜찮을 겁니다. 건강에 대한 것도 있는 그대로 잘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러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닌가. ‘영혼’이라는 변수에 갑자기 흥미를 보이기도 했고. 나는 그래도 클로드의 속삭임대로 마음을 진정하려 노력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깊게 심호흡을 하던 그 순간, 아이작이 마음을 먹은 사람처럼 또렷하게 아르웬 언니를 바라보았다.

늘 웃는 상이었던 평상시와 달리 아르웬 언니를 마주한 아이작의 표정은 제법 단호했다.

“나디아 님의 주치의로서, 저는 공녀님이 북부에 머무시는 것에 긍정적이라고 의견을 드리고 싶습니다.”

…뭐? 긍정, 긍정적이라고?

오늘만 벌써 세 번이나 이래서 좀 민망하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클로드의 얼굴을 확인했다.

클로드는 아직 기다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아이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첨예함까지 엿보이는 그의 주황색 눈동자를 확인하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나디아의 체류에 긍정적이다?”

“예. 나디아 님의 건강은 북부에 온 이후로 점점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분명 한 번 쓰러지시기야 했지만, 사실 그 직전에 아르웬 님과의 결투가 있지 않았습니까.”

“…….”

“해본 적 없는 경험에 집중하시다가 무리하신 것이지, 북부 자체가 맞지 않아서 아프셨던 것은 아닙니다.”

조목조목 자기 생각에 대한 근거를 풀어낸 아이작이 습관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제게는 수도보다 이곳에 계시는 나디아 님이 조금 더 행복해 보이셔서요.”

“아…….”

나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서브 남주의 매력을 폭발시키는 아이작을 가만히 응시했다. 와, 진짜 감동적이다. 괜히 여자 주인공들이 잠시 서브 남주에게로 노선을 트는 게 아니구나.

‘북부 대공님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온화함을 온몸 가득 둘둘 두른 채 이렇게 다가오면 누구든 넘어가지.’

만약 내가 아이작에게 목욕을 금지당한 환자가 아니었다거나, 클로드 카르테인이라는 유일한 구원자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쯤 그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을 거다.

아니, 은발에 녹안, 그것도 상냥한 계열의 남자라니까?

‘그런 사람은 국보로 지정해서 온 국가를 이롭게 해야만 한다.’

북부에 있어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한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늘어놓을 때였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저도 나디아 님을 따라 여기에 더 머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이작 그대도 남겠다고?”

“예. 지금까지는 걱정을 하는 게 우스울 만큼 건강하시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니까요. 한동안은 주치의로서 계속 공녀님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선량한 아이작의 표정을 보고 살짝 입을 벌린 언니가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

“정말, 그래도 그대는 괜찮겠는가? 지금도 본래 그대의 예정보다 일정이 늘어난 거로 알고 있다만…….”

“아, 저는 괜찮습니다. 물론, 이 체류도 다 카르테인 공작님께서 허락을 해주셔야 가능한 일이지만요.”

아이작의 마지막 말을 들은 모두의 시선이 단숨에 클로드에게 쏠렸다.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던 그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으응?’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던 그 찰나, 클로드의 입에서 아주 작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역시, 이렇게 나오겠다……?”

지척에 앉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속삭임에 나는 그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아니, 그러니까 뭘 이렇게 나온 건데?

나를 붙들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준 그가 천천히 상체를 뒤로 젖혀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분히 의도적인 듯한 자세로 그가 시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내 약혼자의 귀한 주치의인데 그렇게 해야지. 안 그런가?”

“그렇게 제 능력을 높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각하.”

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며 꾹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건 알겠는데,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둘이 서로 라이벌 의식이라도 있나?’

진짜 알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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