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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52화 (52/155)

52화

혹시나 해서 꺼낸 물음이었는데, 카르테인 공작이 입을 다물고 미간을 좁히는 게 영 수상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내가 재차 그에게 물었다.

“생각하고 계시는 게 뭔데요?”

그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르테인 아닌가. 지는 싸움은 해본 적이 없다는 카르테인 공작!

끝까지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작 달튼 자작을 내세우면 어떨까 합니다.”

“의사 선생님을요?”

“네. 나디아 그대의 생각과 별개로 ‘안심’할 수 있는 요소를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온천에 가기 전에도 카르테인 공작은 아이작을 입에 담았지. 그리고 언니는 그 말에 생각 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골드게이트 공작가에서 쌓아온 신뢰와 여기에서도 내 곁에 붙어 있던 주치의라는 명함.

머리를 크게 굴리지 않아도 아이작 달튼을 써먹자는 클로드의 말이 괜찮은 전략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정말 괜찮은 생각인데요?”

“…….”

“근데 표정이 영 안 좋네요.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부분이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정말요?”

내 물음에 클로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뭔지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굳이 더 묻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생각했다.

정말 내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면 카르테인 공작은 분명 말을 했을 테니까.

“문제는 아이작 선생님을 어떻게 끌어들이냐는 건데…….”

순수하게 부탁을 할까? 아니, 그런데 들어줄지 들어주지 않을지 어떻게 알아. 애초에 아이작 선생은 내가 목욕하는 걸 어렵게 만든, 목욕 반대자의 시조 격인데.

‘어렵네. 어려운 문제야.’

내가 허공을 노려보며 방법을 고민하고 있자 클로드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작 달튼은 올 테니까요.”

“달튼 자작님이요?”

“예. 그렇지 않아도 계속 영애를 찾고 있었던 거로 기억하거든요.”

“음, 진료는 그렇다 치고 진료 후에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해요? 지금은 건강할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한다든가.”

내 고민은 타당했다. 어찌 되었거나 아이작의 고용주는 골드게이트 공작가고, 내가 건강하면 가문이 반대할 명분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지금껏 목욕을 금지하거나 자제하라고 계속 주장해 왔는데, 인제 와서 말을 뒤바꾸면 의사로서의 체면도 구겨지지 않나.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클로드의 생각은 확고한 모양이었다.

“아니, 자작이 나디아 그대가 아닌 골드게이트의 손을 들어줄 확률은 낮습니다.”

“…예에? 어째서요?”

“글쎄요. 제 입으로 말하기에 그다지 기분 좋은 이유는 아닌지라.”

뭐지. 나는 클로드를 보며 그저 눈을 끔벅거렸다. 그의 표정이 어제 아르웬 언니가 온천에서 지었던 표정과 엇비슷해서.

‘클로드가 말하기에 기분 좋은 이유가 아니라니…….’

궁금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말을 얹을 만한 주제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서늘하게 빛나는 클로드의 주황색 눈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언니와 루핀이 객관적으로 안심할 만한 걸 요구하면 달튼 자작님께 도움을 구하는 거로.”

“예.”

“그리고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요청 말인데, 그것도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 건에 대해서는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보라는 뜻을 가득 담아 눈을 깜박이자 클로드가 미안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될 경우, 저녁 식사는 함께 할 수 있지만 티 파티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런 문제군요?”

“물론 최대한 빨리 가려고 할 테지만…….”

클로드는 나를 낯선 곳에 혼자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미안한 모양이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내 로맨스 판타지 경력이 얼마고, 어? 여기 와서 수도 티 파티를 나간 경험이 몇인데.

수도와 북부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차원 수준의 차이를 버틴 사람이라고, 내가.

“괜찮아요. 그냥 티 파티인데요, 뭘.”

“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럴 땐 나를 믿어요.”

나는 발꿈치를 들어 좁혀진 카르테인 공작의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러 폈다. 내가 문지르는 대로 표정을 푼 그가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쥐어 힘을 주고는 대답했다.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만, 더 성심성의껏 믿어야겠군요.”

“정답입니다~”

“온천에서 본 두 사람도 같은 맥락으로 믿으면 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아, 타냐와 에이포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에게 긍정을 표했다.

“아, 그럼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요.”

“그렇습니까?”

“네, 두고 보세요.”

가슴을 한껏 편 채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자, 그가 소리를 내어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다정한 손길로 내 볼을 끌어당긴 채 부드럽게 이마를 부딪쳤다.

“얼마든지.”

오랜만에 들은 그의 짧은 말에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와 클로드는 한동안 별것도 아닌 대화를 나누며 웃다가 헤어졌다.

옷이 얇아 걱정된다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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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웬 골드게이트의 아침은 항상 다른 이들보다 일렀다. 매일같이 하는 새벽 훈련이 몸에 배어있는 탓이 제일 컸고, 또 선천적으로 아침잠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아침잠이 많아 늘 기상하는 것을 힘들어하던 나디아와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새벽 훈련에 참여하라고 말했던 건 그래서였는데…….’

본격적으로 순회를 가기 전 사용해 본 탓일까? 낯설지 않은 카르테인 공작가의 훈련장에서 구보를 하며 아르웬은 어제처럼 생생한 지난날을 생각했다.

‘생각을 지우려고 뛰러 온 건데, 도리어 생각이 많아질 줄이야.’

나뭇가지에 던져놨던 수건으로 땀을 닦은 그녀가 넓은 훈련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림처럼 나디아가 훈련장에서 헉헉거리며 뛰던 모습이 그려졌다.

‘잠도 많은 아이가 비틀거리면서도 매일같이 나와 뛰고, 베고, 또 바닥에 드러누웠었지.’

지금 생각해 봐도 그토록 생생하게 움직이는 나디아를 본 건 오래간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잃기 전에도 나디아 골드게이트는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아르웬 경, 곧 시작됩니다.”

“그래, 고맙다.”

“말씀하셨던 자료도 방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편하게 가져가시면 됩니다.”

자신이 맡은 바를 착실히 수행한 부하를 보내며, 아르웬은 절도 있는 걸음으로 훈련장을 벗어났다.

널찍한 훈련장을 지나 안뜰의 복도를 걷고 있자니, 북부 특유의 시린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는 게 느껴졌다. 잔뜩 땀을 흘려 열이 올랐던 머리가 시원하게 느껴질 만큼 냉한 바람이었다.

‘사시사철 일정한 온도를 가진 골드게이트 영지에서는 이런 바람을 느낄 수 없겠지.’

한쪽 어깨에 대충 얹어 두었던 코트를 입으며 아르웬은 문득 온천에서 나디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언니, 난 정말로 북부가 좋아. 사랑까지는 솔직히 과장이기는 하지만, 카르테인 공작님도 좋아해.’

‘그게 아니야. 북부라서 좋아. 그치지 않는 바람도 좋고, 건조한 기후도 마음에 들어.’

그 아이는 북부가 좋다고 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부는 냉한 바람도, 건조한 기후도 마음에 든다고. 골드게이트의 비옥한 영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르웬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말을 하는 동생의 표정 역시, 생생했다는 것.

방에 들러 항의서를 챙기고 집무실로 향한 아르웬은 제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동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좋은 아침. 루핀은 잠시 마탑에서 연락이 왔다고 집무실에서 나갔어.”

“그래? 오면서 마주치지 않은 걸 보면 다른 장소로 이동한 모양이네. 일찍 왔구나, 나디아.”

“언니랑 새벽 훈련 할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야.”

“너도 그때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냥……. 언니 보니까 생각이 났어. 그렇게 새벽에 훈련하고 또 검을 맞대면서 처음으로 언니의 세계를 엿본 기분이 들었었거든.”

조잘거리는 동생의 목소리와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발그레한 볼을 고스란히 눈에 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쥐고 있던 항의서가 무척이나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것도…….

“나디아, 아르웬 경.”

“공작님! 좋은 아침이에요. 마침 헤르잔을 만나서 타냐와 에이포드에게 사람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는데, 보고 들으셨어요?”

“들었습니다. 시기는 조금 조절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제가 바꾸긴 했습니다만.”

“어? 정말요? 언제로요?”

클로드 카르테인과 자연스럽게 자신도 모르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 있자니 더욱더.

그때 온천에서 동생이 했던 말은 정말로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곳에 있으면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던 그 말.

‘골드게이트가 자랑이자 큰 방패라면, 카르테인은 뿌리를 내리고 싶은 곳이라 했던가.’

하녀가 잽싸게 마련해 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르웬이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기이하리만치 마음이 고요했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그녀가 얼마나 애를 끓이고 분노했는지를 떠올린다면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단지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있을 뿐, 아르웬은 이러한 제 마음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시작할까.”

“응, 좋아. 언니, 내가 어제 언니가 했던 말을 생각해 봤거든?”

“부모님을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

“응. 그래서 말인데, 아이작 선생님한테 의견을 물어보는 건 어떨까?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진찰도 하고. 그럼 부모님도, 언니도 다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나디아가 아이작을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또박또박 말하는 순간, 아르웬은 알 수 있었다.

항의서는 봉투에서 나올 일이 없을 것이며, 자신은 동생의 약혼을 허락하게 되리라는 걸.

애초에 이건 아르웬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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