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어디에 눈을 두면 좋을지 몰라 게슴츠레 눈을 뜬 나는 이윽고 이렇게 눈을 뜨는 게 더 이상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가늘게 떴더니 더 잘 보였거든. 그, 복근의 형태라든가 물기가 있는 장골…….
‘아, 아니! 나디아 골드게이트, 이런 거에 집중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인상 찌푸리면서 이러면 진짜 이상해 보이잖아!
나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몸을 아예 돌려 루핀과 바닥에 엎어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살색에 눈길을 빼앗겨서 그렇지, 전반적인 광경 자체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목에 붉게 실선을 그린 채 닿아 있는 검과 마법사의 손.
‘정말 까닥 잘못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죽을 상황이잖아.’
거기에 옆에서 살기를 뿌리고 있는 아르웬 언니까지. 이 정도면 엎어져 있는 저 남자가 불쌍해질 지경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이 사람은 또 뭐고?”
“혹시 몰라 근처에 설치해 둔 경계 마법에 걸렸어. 근방에 사람들도 배치해 뒀을 거고 1차로 마법들도 설치해 놨는데, 용케 다 피해서 왔더라고? 누군지, 뭘 하러 왔는지는 이제 알아봐야지.”
“윽, 으윽…….”
“다시 한번 묻지. 누구냐.”
끙끙거리며 신음을 내뱉던 남자의 목으로 조금 더 깊게 칼날이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본 그가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볼썽사납게 손을 흔들어 대며 자기 자신을 변호했다.
“저,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의, 의사!”
“의사는 네 정체가 명확해지면 불러줄 테니 나중에 찾고.”
“아, 아, 아니요! 그, 제가 의사… 의사인데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정체를 밝힌 남자가 손등으로 낡은 안경을 고쳐 잡았다. 불안한 듯이 흔들리는 눈과 거칠어진 입술, 그리고 깡마른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의사라면 그래도 수입이 나쁘지는 않을 텐데?’
일반적인 역사랑은 좀 다르게 이런 로맨스 판타지 세계에서 의사는 나쁜 대접을 받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선 전염병을 겪으며 나름대로 전문가로서 자리를 잡기도 하지 않았나.
‘아, 물론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다들 좀 돌팔이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아무리 그래도 의사가 저렇게까지 될 일은 없어 보였다. 남자를 의심쩍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자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클로드가 살짝 검을 당겨 그의 목젖을 겨눴다.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심산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신의 축복과 관련해 무슨 지시라도 받았나? 배후가 누구지?”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진짜 의사, 의사예요! 이 근방에서만 나는 약, 약초가 있는데 그게 필요해서, 그, 하. 아니, 제가 떠돌이라……. 아, 진짜 미치겠네.”
떠돌이?
‘최근에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말거나 남자는 억울함을 담아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몇 번이고 토로하는 말들이 죄다 클로드와 언니에게 막히자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자의 머리카락이 새집이 되어갈 때였다.
“선생님! 저 가지고 왔는데요! 이거죠! 저더러 가지고 와서 보는 앞에서 버리라던……. 어? 영애님!”
“어… 타냐?”
나는 내가 기억하는 이름이 맞는지 고민하며 그녀를 불렀다. 다행스럽게도 이름을 틀리지는 않았는지, 타냐가 반색을 하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영애님! 여기에는 어쩐 일로……. 아니, 옷이랑 머리는 왜 그렇게 젖으신 거예요?”
“이 근처에도 온천이 있거든. 그래서 잠시 시간을 보내려고.”
“아! 그러시구나! 그렇죠. 레티시아는 사람이 너무 많고 혼잡하니 영애님이 오시기에는 적합하지 않겠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기다렸……. 아, 아니.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수줍게 말을 걸어오는 타냐를 보며 나는 내심 감탄했다. 일전에 내 앞에 무턱대고 무릎을 꿇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타냐는 정말 기가 세구나.
지인이 칼에 겨눠진 채 땅에 엎어져 있고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세 명쯤 있다면 눈치부터 보는 게 일반적일 텐데, 그녀는 다른 건 다 제치고 오로지 나만 눈에 담고 있었다.
타냐의 수줍은 말 걸기는 참다못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저기……. 타냐, 나도 좀 신경 써주지 않을…래? 지금으로서는 네가 내 누명을 벗겨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아서.”
“아, 맞아! 의사 선생님, 거기서 왜 그러고 계세요? 약초 따고 있을 테니 집에서 거지 같은 약이나 가지고 오라고 하시더니?”
거지 같은 약?
“그게.”
잠시 나와 클로드, 그리고 아르웬의 눈치를 보던 남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면서 했던 말들을 처음부터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이 근방에서만 나오는 약초가 있어서 그걸 찾아온 건데… 저는 정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고, 예……. 마법이나 뭐 그런 것도 못 느꼈습니다. 사람도 그, 저는 못 만났는데요…….”
“못 만났다고?”
“그, 동굴 안쪽으로 와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 동, 동굴!”
타냐의 말에 의사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클로드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포인트베리 절벽 위쪽에 있는 동굴을 말하는 건가?”
“공작님도 아시는군요!”
“그 안쪽은 험준해서 사람이 통과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텐데.”
“거기에 자라는 나무의 껍질이 약초로 쓰기 좋아서요. 그, 저기 떨어진 가방…….”
그가 필사적인 손길로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천으로 된 넝마 같은 가방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클로드는 검을 거둔 채 발걸음을 옮겨 그가 말한 가방을 열었다.
나무껍질과 이파리, 그리고 열매들이 분류되어 가득 담긴 가방 속에서 그가 껍질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보였다.
“이게 그 동굴에서 나는 나무껍질인가? 펠트 나무의 껍질 같은데. 이건 마취 성분이 있지 않나?”
“아, 아세요?”
동그래진 눈으로 지저분한 안경을 잡은 그가 타냐와 시선을 교환하며 말을 이었다.
“그, 타냐가 무릎 통증이 심한데 그, 그때 우려서 먹입니다. 일정 분량이 있긴 한데, 아무튼 그, 네. 그럼 아픈 게 덜어져서…….”
“치유의 물도 있고 영애님이 말씀하신 대로 찜질을 자주 하다 보니 이제는 잘 먹지 않지만, 그 전까지는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오늘 온 것도 제가 바빠서 다른 의원님에게 갔다가 받은 약 때문인데.”
“그건 약이 아니야!”
처음으로 강하게 의사 표명을 한 의사 선생이 타냐가 들고 있던 약병을 한 번, 그리고 바닥을 한 번 가리키며 말했다.
“버려, 빨리! 그걸 바르면 피부에 스며들어 통증이 줄어들 거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제대로 된 의사는 점점, 어? 씨가 마르고 있어.”
“음, 네. 그러려고 가져오긴 한 거니까요.”
대체 뭔데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지?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타냐에게 그 약의 정체를 물었다.
“그 약이 뭐로 만들어진 건데?”
“어……. 삭힌 생선이랑 나무뿌리를 재운 뒤 으깨서 수액이랑 섞은 연고요.”
“…아, 그걸 피부에 발라?”
“네.”
나는 타냐의 괴상한 약을 지그시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려 의사 선생을 바라보았다. 의사 선생은 혼자 구시렁거리며 여전히 화를 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머릿속 어디에선가 작게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묘하게 설레는 기분을 애써 무시한 채 나는 조심스럽게 의사 선생을 불렀다.
“타냐에게 떠돌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왜 의사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거지? 보통은 정착을 하기 마련인데.”
“그건…….”
“제가 알아요, 영애님. 다른 의사 선생님들에게서 쫓겨났거든요.”
“왜?”
“의사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고 매일 화를 내서요. 자세한 건 잘 모르는데, 뭐로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던가?”
나는 타냐의 말을 듣자마자 소리가 날 정도로 홱 고개를 돌렸다. 거친 입술을 꾹 깨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의 손은 당연하게도 지저분했다.
그 지저분함이 손톱에 때가 껴서가 아니라 약초를 캐느라 흙이 묻었기 때문이라는 게 다를 뿐.
눈으로 그걸 발견한 순간, 입가에서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찾았다. 내 연구자.’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입꼬리를 겨우 진정하며 나는 점잖게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는 점잖아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떠돌이 선생.”
“네?”
“혹시 이름이?”
“그, 에이포드 짐머입니다만…….”
“아, 성이 있구나. 잘됐네.”
상냥함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자 옆에서 클로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괜찮다. 나는 그에게 아주 멋지고 믿음직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주며 강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믿어, 클로드 카르테인.
“에이포드. 지금은 좀 그렇고, 언제 한번 타냐와 카르테인 공작가로 찾아올래?”
“저도요?”
“응. 타냐, 네가 조향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네, 네!”
“아주 좋아.”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채 경계하는 남자와 설레어 보이는 타냐를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미래의 내 직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도무지 배부른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그럼 이제 끝난 건가? 온천 구경도, 사건도.”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루핀의 짧은 정리에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몸도 다 식었고, 온천을 즐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생겼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동 마법을 준비하는 루핀의 곁에서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낼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네!”
“…예에.”
좋았어. 이제 돌아가서 두 사람을 꼬여낼 방법을 좀 고민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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