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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48화 (48/155)

48화

“아니, 근데 그게 클로드 카르테인 때문은 아니지.”

불쑥 튀어나온 내 목소리에 루핀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정확하게는 루핀을 포함해 방 안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봤다.

“아, 방금 제가 공작님 이름을 불렀어요?”

“괜찮습니다.”

“음, 네. 아무튼, 아무도 원인을 알아내지는 못한 거잖아. 달튼 자작님이 찾아낸 원인도 추측에 불과하니 정답이라고 확신할 순 없고.”

나는 반대편 손을 들어서 팔을 붙잡은 루핀의 손등을 감쌌다. 사실 감쌌다기보다는 반쯤 힘을 주어 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공작님에 대한 내 관심이 거짓이라는 건 아닌데…….”

“응?”

“네가 말한, 내가 최선을 다한 ‘이상한 사람’은 나라고 봐야 해.”

아니, 정말이다.

클로드 카르테인과 내가 그런 관계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내가 저지른 행동의 원인이 카르테인 공작인지를 묻는다면 답은 절대적으로 ‘아니오’였다.

난 북부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이 멀어 지극히 이기적으로 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기도 하고, 누군가를 회유하기도 하고 헤집어 놓기도 했다.

‘쓰러진 것도 이곳에 남고 싶다는 욕심에 무리하다 그리된 거고, 신의 분노 사건도 내 대계를 원활히 이루기 위해서였지.’

그런 쪽으로 생각한다면 카르테인 공작은 도리어 내게 휘둘린 사람으로 봐야 했다. 갑작스러운 태풍을 만난 나그네라고나 할까.

클로드 카르테인을 단순히 이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내 행동의 우선순위는 나였다. 그가 아니라.

“이상하네.”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루핀의 눈에서 은색의 빛이 사라졌다. 내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일이 끝난 모양이다.

마저 말해보라는 듯한 내 시선을 물끄러미 받아내던 루핀이 다시금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루핀,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르웬 언니의 걱정을 넘긴 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재차 살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마정석이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제법 청아하게 들렸다.

“영혼이 이전과 비교했을 때 도리어 좀 안정되었어.”

“그럼 좋은 거 아니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결과가 좋으면 된 거 아니냐는 듯한 내 물음에도 루핀은 심각한 표정을 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프로그래머였던 친구가 ‘어? 이게 왜… 되지?’라고 고민할 때의 모습과 엇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또다시 기이한 고요가 퍼지려던 찰나, 잠시 입을 다문 채 상황을 파악하던 줄리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온천수 때문이 아닐지요?”

“온천수?”

루핀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줄리엔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신의 축복인 치유의 물이요. 나디아 님은 그 물에 여러 번 접촉하셨으니까요. 실제로 온천수로 목욕물을 꾸리기도 했고요.”

“나디아가 목욕을 자주 했다고?”

“다른 물도 아니고 신이 내려주신 치유의 물인걸요? 대신관님도 극찬을 하셨답니다.”

잠시 뾰족해졌던 아르웬 언니의 눈초리가 대신관이라는 단어를 듣고 다시 내려갔다. 빠르게 바뀌는 언니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있잖아, 아르웬 언니. 그럼 같이 가볼래?”

“지금 신의 영역을 말하는 거니?”

“신의 영역이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 아니면 그 근처의 다른 온천들, 음. 레티시아 같은 곳을 가도 좋고.”

“…….”

“그냥 이렇게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고 겪으면 또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대신관을 감동하게 한 경험이 있어서일까? 제법 자신감이 생겼다.

적어도 언니와 루핀에게 보여줬을 때 두 사람이 나를 당장 들쳐 메고 집에 데리고 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확신 같은 것 말이다.

‘겸사겸사 사심도 좀 챙기고.’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언니와 루핀을 씻기겠어. 게다가 레티시아에 가게 된다면 일전에 급하게 요청했던 사항들이 적용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여러 가지를 떠올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내 앞에서 시선을 내리깐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루핀이 대뜸 입을 열었다.

“괜찮은 생각이네. 가자.”

“루핀 골드게이트!”

의외의 답에 놀란 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르웬 언니의 반응에도 눈 하나 깜박 안 한 그가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궁금하잖아. 정말로 그게 영혼의 안정화에 도움이 되었는지.”

처음 보는 흥미로움이 담긴 루핀의 미소에 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한 나를 대신해 상황을 정리한 것은, 내 영혼 문제가 거론된 이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클로드였다.

“아르웬 경, 두 사람의 말마따나 이참에 그대의 눈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건강과 관련된 문제가 마음에 걸린다면 의사를 대동하지.”

“…….”

“마침 그대가 신뢰하는 아이작 달튼도 나디아의 주치의로 있지 않나.”

정말 흠잡을 곳이 없는 설득이야.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언니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덥석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속눈썹을 팔락였다.

“같이 가보자, 언니. 직접 온천수에서 목욕도 하고. 응?”

“내 앞에서 목욕을 하겠다고?”

“그 온천수는 치유의 물이라……. 아니, 아니야. 언니가 정 걱정되면 나는 다리만 담그고 있을게.”

물론 온천까지 가서 그게 무슨 아쉬운 소리인가 싶지만, 이건 대를 위한 작은 희생이다.

언니의 푸른 눈이 나와 루핀,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로드 카르테인에게 향했다. 찬찬히 우리를 살펴본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수긍했다.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응, 그럼! 헤르잔, 줄리엔.”

“바로 준비하죠.”

나는 묵례를 한 채 나가는 줄리엔과 가볍게 시선을 교환했다. 줄리엔이 금색 틴 케이스와 꽃무늬의 작은 유리병을 들고 나간 걸 보면 시선 교환이 성공적으로 된 모양이다.

금색 틴 케이스와 꽃무늬의 유리병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나와 줄리엔이 제일 좋아하는 목욕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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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역 동쪽 부근, 레티시아에서 다소 떨어진 부근에는 작은 온천이 두 개가 있었다. 벨루가와 다르홀로 불리고 있는데, 이 이름은 대신관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여기가 대신관이 홀로 와서 기도하고 몸을 담근 곳이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온천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할 예정이라서 헤르잔이 이곳을 추천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레티시아는 평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곳이니 말이다.

벨루가와 다르홀은 레티시아와는 또 다른 느낌의 온천이었다. 레티시아가 대욕탕같이 큰 물길이라면, 여긴 비밀 정원 같은 모양이라고 할까?

아니, 살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르홀은 어떨지 몰라도 눈앞에 있는 벨루가는 그랬다.

‘일단 숨겨져 있잖아.’

연못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작은 크기의 온천은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폭 안겨있다시피 했다. 나는 온천을 지나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가는 온천수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딱 두 사람이 와서 즐기기에 좋은 곳 같아 보였다.

‘나중에 다르홀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클로드에게 물어봐야지.’

물론 그 전에 루핀과 무사히 다녀오길 바라야겠지만.

뽀얀 빛으로 일렁이는 작은 온천과 주위의 풍경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어색하게 주위를 살피던 아르웬 언니가 온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정말, 이게 사람이 들어가도 안전한 거라고?”

“응? 응.”

“이렇게 김이 나고 온기가 도는데?”

나는 망설임을 담은 채 물을 건드릴까 말까 고민하는 언니의 손끝을 보며 잘게 웃었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발을 온천 안으로 담갔다.

“나디아!”

“괜찮아, 언니.”

화들짝 놀라는 언니를 말리며 편안하게 온천 끄트머리에 앉았다. 따뜻하고 미끈거리는 온천물 특유의 감촉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종아리를 휘감는 게 느껴졌다. 분명 발만 담갔을 뿐인데 정수리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분 좋게 몸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즐기며 살짝 상체를 수그렸다.

“으으으으……!”

“나디아?”

“으으으! 너무 좋아!”

화들짝 놀라 내 곁으로 다가오는 언니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리를 동동 구른 탓에 물이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들이 튀었지만, 그 모습에 도리어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배시시 웃으며 탄성을 내지르자 아르웬 언니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디아! 이런 장난은 재미없어. 네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줄 알고 놀랐잖아.”

“재미라니! 아냐,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냥 튀어나온 반응이야! 언니도 들어와 보면 알걸?”

“…….”

“빨리.”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나는 아르웬 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온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하아.”

“생각보다 안 뜨겁지?”

“…그래, 그렇구나.”

아르웬 언니는 내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온천 속에서 다소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게 생각보다 너무 신기한 기분을 주어서 나는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언니가 내게 신경 쓰지 못하는 틈을 타.

―풍덩!

옷을 입은 채로 요란하게 온천으로 들어갔다. 어찌나 야단스럽게 입수했는지, 내 손을 잡고 있던 언니가 쫄딱 젖었다.

“푸하! 나디아, 너!”

“아하, 아하하하!”

“너…….”

평소보다 들뜬 기분 탓일까? 물에 빠진 생쥐가 된 우리의 모습이 유난히 웃겼다. 언니의 손을 잡은 채 크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고 있자니 언니가 어딘가 아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내 웃음이 진정될 때까지 물끄러미 나를 눈에 담고 있던 언니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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