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나는 어딘가 아찔하기까지 한 루핀의 말에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정신 차리자, 나디아. 내가 무릎을 꿇을 일을 저지른 건 맞지만, 물어볼 건 물어보고 말할 건 말해야지.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루핀의 추궁 아닌 추궁에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루핀 골드게이트, 인사보다 먼저 들어야 할 게 있을 것 같다만.”
“…….”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나는 분명 그대가 내 집을 휘젓고 다니는 걸 허가한 기억이 없는데.”
그래! 네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물어보는 거다.
나는 내 마음을 대변하는 말에 휙 고개를 돌려 클로드 카르테인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대놓고 바라봐서인지, 루핀을 응시하던 그가 잠시 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허공에서 마주한 주황색 눈이 아주 잠시 반달로 휘어졌다.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짧은 찰나였다.
“아, 그리고.”
언제 나를 보고 웃었냐는 듯 표정을 바꾼 카르테인이 루핀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바깥에서 있었던 일도 설명해 줬으면 하는군. 줄리엔의 행동이 자연스럽지 않았는데, 정황상 그대가 무언가 했을 것 같아서.”
“맞아, 줄리엔!”
그러고 보니 바깥이 조용해진 게 영 심상치 않았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밖을 살펴보려고 움직이는데, 루핀이 가볍게 손을 내저어 내 걸음을 멈췄다.
“됐어. 누나가 직접 움직일 필요까지 있나. 괜찮아, 그냥 간단한 수면 마법이거든.”
“뭐? 줄리엔에게 수면 마법을 썼어?”
“응. 그런데 그다지 후회가 생기진 않네. 그러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게 보여서.”
한 번 더 욕조로 힐끔 시선을 준 루핀이 카르테인 공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들어와 얼굴을 맞댄 이후, 루핀이 내가 아닌 공작에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서면으로 연락이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겠다고.”
“그랬지.”
“답변으로 허가는 받았던 것 같은데.”
“골드게이트에서 누굴 보내는지는 내 관심이 아니다. 지금 그대에게 물은 건 절차와 방법에 관한 거지.”
단호한 클로드의 말에 루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깔끔하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했다.
“인정합니다.”
짤막한 사과를 덧붙인 그가 다시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르웬 누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좀 급했거든. 누나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워낙 크게 돌아서.”
“아, 그 쓰러졌다는 소식 말인데 나는 지금…….”
“말하려는 게 건강 관련 이야기라면 안 해도 돼.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으응, 그렇구나.
나는 냉랭하기 그지없는 루핀의 말에 찍소리 못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무 저자세인 것 같다면 정답이다. 솔직히 내가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명백한 죄인이라.’
솔직히 한 번 크게 앓았던 가족이 의사가 하지 말라고 당부한 걸 하다가 또 쓰러졌다는데, 눈 안 돌아갈 사람이 어디 있겠어.
‘더구나 타지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명목을 대면서.’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나는 당장 상대를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데리고 갔을 거다. 아니면 직접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 말렸든가.
루핀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가 멋쩍게 웃고 있을 즈음, 바깥쪽에서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웬 경,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나도 내가 지금 저지르는 행동이 결례인 건 아네. 하지만 루핀이 나디아를 데리고 나타나지 않는 게 수상해. 분명 무슨 일이……. 음?”
“줄리엔!”
오.
나는 헤르잔이 줄리엔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다급히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욕실이 있는 작은 방과 내 침실 사이의 천을 들춘 채 바라본 곳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진 줄리엔을 받친 헤르잔과 줄리엔의 맥을 짚고 있는 아르웬 언니가.
“음, 다친 곳이 있는 건 아니야. 아무래도 루핀이 저지른 짓인 것 같군. 대신 사과를…….”
“언니?”
“나디아!”
내 부름에 재빨리 고개를 돌린 언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달음에 내 앞으로 다가와 양쪽 어깨를 짚었다. 언니의 푸른 눈동자가 걱정을 담은 채 일그러지는 것이 선명했다.
“나디아, 너는. 넌!”
“언니, 그게…….”
“이럴 줄 알았다면 널 두고 가지 않았다!”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와락 소리를 친 언니가 세심하게 내 몸을 훑었다. 체감상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선이었다.
언니의 시선이 정수리에서 시작해 내 상체로 내려갈 즈음, 뒤에서 낮고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디아 누나는 멀쩡해.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것 같더라.”
“정말이야? 네가 확인했어?”
“신체는. 영혼 쪽은 아직 못 살펴봤어. 안쪽에서 예상치 못했던 걸 보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것?”
아악! 나는 아르웬 언니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는 다급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아르웬 언니와 루핀의 팔에 한 짝씩 팔짱을 끼기까지 했다. 일단은 이곳에서 멀어져야겠어.
“아, 루핀! 그, 그래! 영혼! 그거 지금 살펴보면 되지. 어? 내가 소파에 앉으면 될까? 침대? 아니다. 두 사람 머물 곳부터 정해야 하지 않을까? 헤르잔!”
“예?”
“언니랑 루핀이랑 머물 곳 좀 정해주면 좋겠네? 아, 줄리엔이 그… 보다시피 잠들어서.”
“아, 누나가 원하면 깨워줄까? 그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뭐? 지금? 야, 잠깐. 지금 줄리엔을 깨우면……!
내가 미처 루핀을 말릴 틈도 없이, 루핀이 슬쩍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을 휘휘 내저었다.
루핀다운 은빛 반짝이가 손가락 끝에서 반짝이는가 싶던 찰나, 헤르잔의 품에서 축 늘어져 있던 줄리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억! 나디아 님의 가족이신 아르웬 경과 루핀 님이 오셨는데 욕실은 정리하는 편이……. 어?”
“뭐를 정리해? 욕실?”
“어, 이건 대체……. 나디아 님? 헤르잔?”
“하, 그러니까 지금 저 안에 있는 게 욕실이었어?”
언니의 팔에 끼워져 있던 내 손이 스르륵 풀렸다. 자의로 푼 건 아니고, 언니가 부드럽게 풀어내고는 몸을 돌린 것에 가까웠다.
작은 방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린 언니를 보고 있자, 어쩐지 자꾸만 입가에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작스럽게 뒤바뀐 상황에 당황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줄리엔도, 이마를 짚은 헤르잔도, 그리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듯이 무표정한 루핀도 이제는 웃겼다.
물론 지금 이곳에서 가장 웃긴 장면을 꼽으라면 내 선택은 단 하나지만.
“카르테인 공작.”
“아르웬 경.”
작은 방의 앞에서 아르웬 언니와 클로드가 서로 마주친 장면 말이야.
“하, 하하하! 하하…….”
와, 개판이다.
나는 복잡하게 꼬인 상황을 바라보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풀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뭐, 이제는 내가 뭘 해도 딱히 소용이 없다. 그도 그럴 게 이미 다 봐 버리지 않았나.
‘욕실도, 그 안에 있던 클로드 카르테인도.’
내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 그저 웃음을 흘릴 때쯤이었다. 아르웬 언니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클로드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군, 카르테인 공작. 우선 사과부터 하지. 절차대로 응접실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여기까지 올라와 미안하네. 큰 결례를 저질렀어.”
“정말 그런가?”
아르웬 언니의 말을 들은 클로드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언니의 말에 답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의 답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클로드의 주황색 눈동자가 감정 없이 아르웬 언니에게 닿았다.
”나는 경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경도, 루핀 골드게이트도 입으로 내뱉는 말과 다르게 카르테인을 무시한 행위를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카르테인을 무시한 행위라……. 그건 우리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아주 잠시 말을 멈춘 언니가 살짝 본인의 이를 악물었다.
“나는 공작에게 분명 내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들은 소문이 뭐지?”
“…….”
“나디아가 원인도 모르는 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뜬 그 이후로 위험하다는 신의 영역을 다녔다? 그도 아니면 클로드 카르테인과 약혼을 했다?”
아르웬 언니의 입에서 으드득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골드게이트 가문을 무시한 것은 그대가 아닌지.”
“아르웬 언니!”
아, 안 되겠다.
나는 소파 위에 붙였던 엉덩이를 들고는 다시금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이번에는 루핀이 그 어떤 방해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온 것을 눈치챈 언니와 클로드가 동시에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봤다.
“일단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
“나디아, 잠시 루핀과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니? 지금은 골드게이트 가문의 대리인으로 카르테인 공작과 나눌 이야기가 좀 있어서.”
“아냐, 그럴 수는 없어.”
다른 건 몰라도 이 일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번 일을 적극적으로 이끈 사람이 난데 어떻게 내가 이 이야기에서 빠질 수가 있겠어.”
“나디아.”
“공작님, 공작님도 잠시만요.”
나는 나를 부르는 클로드를 잠시 멈추고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언제 다가온 건지 아르웬 언니의 뒤편에는 루핀이 서 있었다.
당황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아르웬 언니와 루핀을 또렷이 마주한 나는 한 번 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루핀, 직전에 설명이 듣고 싶다고 했지? 응, 맞아. 네가 말한 건 다소 과장되고 또 자극적이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야.”
“…….”
“내가 하고 싶다고 했어. 신의 분노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도, 약혼도.”
“나디아!”
겨우 쥐어짜 낸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일을 저질러야 했다. 나는 옆에 있는 클로드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말했잖아. 나, 사랑해.”
내 말을 기억해낸 언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 사랑해!’
북부에 처음 왔을 때, 의도적으로 뒷말을 삼켰던 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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