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렇게 말한 클로드가 조금 더 짙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약혼자님은 인기쟁이가 맞는군요. 골드게이트 가문에서는 그대를 보내기 싫어하고 북부는 그대를 원하니까.”
나는 클로드의 말을 들으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아니, 간지러워서 살 수가 있나!
무의식적으로 배배 꼬이는 몸을 겨우 얌전히 놔두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참았던지, 목에서 살짝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본래 그렇게 말해요?”
“음?”
“본래 그렇게 직설적으로, 막, 말에…….”
이걸 말에 버터를 칠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나? 아니, 없다. 버터는 무슨, 이건 ‘빠다’를 바른 수준인데요.
‘북부 대공 대단하다. 관련 없으면 말도 짧고 담백한 사람이 내 여자에게는 장난 없네.’
나는 저런 말, 마음을 먹어야지만 내뱉을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기보다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어? 마음속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하는 말이라고.
하긴, 그러니까 남자 주인공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여자 주인공의 ‘별거 아닌 말로 감동 주기 기술’과 잘 어울리는 능력 아닌가.
‘아, 로판 남주 옆자리 차지하기 힘드네. 배울 게 많아.’
나는 꾹 말을 삼키고는 툭툭 그의 팔뚝을 다독였다. 너 진짜 대단하다는 부장님식 표현이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 소피아 일라리아 백작 부인은 어떤 사람인데요?”
“음?”
“현재 북부 사교계의 중심이라면서요.”
그럼 친하게 지내면 좋지.
내 말을 들은 클로드가 잠시 검지를 까닥였다. 그 모습이 꼭 로딩 중인 컴퓨터 같아 작게 웃음이 나올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좀 고민이군요. 제가 일라리아 백작 부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아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장난기가 다분히 담긴 내 말에 클로드가 소리를 내 낮게 웃었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내게 되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직전보다 더 노골적일지도 모르는데요.”
“으핫! 그럼 참아주세요.”
한 번 더는 힘들다며 머리를 파르르 터는 털자, 그가 재차 웃음을 짓고는 소피아 일라리아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말처럼 대체로 단편적이고, 일반적인 정보들이었다.
“소피아 일라리아는 여러모로 이례적인 사람이긴 합니다. 일라리아 백작과의 혼인부터가 이례적이었지요. 두 사람은 정혼자가 따로 있었던 터라…….”
“그런데 어떻게?”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봤더니 백작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제게 말해주더군요.”
“오, 성격이나 외모는요?”
“긴 은발에 분홍색 눈을 가졌습니다. 눈가에 눈물점이 하나 있는데, 본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성격은 그냥 무난했던 것 같군요. 다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야 다정하겠지. 클로드 카르테인은 공작 아닌가. 어떤 사람이 배짱 좋게 대놓고 그를 막 대했겠어.
“그리고 어린 영애들에게 꽤 동경을 받는 모양이더군요. 아무래도 나이가 젊다 보니…….”
“아, 백작 부인이 젊어요? 의외네요. 저는 사교계의 중심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나이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사교계의 중심은 대충 조별 과제의 조장 같은 존재였다. 생각보다 자잘하게 살펴야 할 것들도 많고, 결정해야 하는 것들도 많은 그런 위치 말이다.
그래서 수도에서도 상당히 경험이 많은 중년의 부인들이 사교계의 중심을 맡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클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그게 두 번째 이례적인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켄팅턴 백작 부인이 세상을 뜨면서 일라리아 백작 부인 외에는 중심이 될 인물이 애매했던 탓입니다.”
사교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았던 부인들은 몇 있지만, 소피아 일라리아보다 지위가 낮거나 나단에서 중심을 잡기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제국의 국경선과 마수와의 최전선을 다 가진 북부의 특성상, 변경에서 잘 이동하지 않는 가문들이 있어서였다.
“그럼 그런 가문들도…….”
“카르테인의 기사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 음. 그러니까 파견 기사들이 있다는 말이군. 하긴, 몇 가문이 국경을 모조리 책임지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지.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가지 정보를 더 말해주던 클로드가 문득 말을 멈추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요?”
“기분이 묘하기는 하군요.”
“음?”
“정말로 영애와 확실히 묶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담담한 그의 말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냥 바로 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씩 해결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거 꼭 결혼식 준비하는 예비부부 같잖아?’
한번 의식하고 나니 어째 계속 그렇게 생각이 흘러서, 나는 괜히 눈을 한 번 굴렸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내가 작게 헛기침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똑똑, 하는 노크와 함께 줄리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각하. 나디아 님.”
“줄리엔?”
“그, 방해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잠시 의아함을 느끼다 그제야 내가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줄리엔은 아직도 나와 공작님이 이 새로운 욕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 아냐! 방해랄 게 뭐 있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찮아!”
“정말 죄송합니다…….”
다급하게 전한 의도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침울한 목소리로 사과를 건넨 줄리엔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손님이 오셨는데요. 이건 빨리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손님?”
“네, 그…….”
손님의 이름을 전하려던 게 분명한 줄리엔의 목소리가 잠시 뚝 끊겼다. 이상함을 느낀 나와 클로드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손님이 왔다는 건 또 뭐고?
‘설마 아르웬 언니가 벌써 온 건가?’
아니다. 아무리 부요의 축제가 막바지라지만, 아직 축제가 완전히 마무리될 시기는 아니었으니까. 아르웬 언니가 황후 폐하만 놔둔 채 내게 왔을 리 없다.
그럼 대체 누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손님’의 정체를 헤아리며 절로 입술이 달싹였다.
“대체 누구지?”
맹세컨대, 이건 정말로 답을 바라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냥, 현대인이라면 다들 습관처럼 한다는 혼잣말 같은 거라고. 그러니…….
“누구긴 누구야. 누나의 가족이지.”
“흐꺅!”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내가 펄쩍 뛴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다.
반사적으로 클로드 카르테인을 끌어안은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나서야 방금 들은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고저 없이 덤덤하고 낮은 목소리, 직설적이다 못해 차가운 문장. 아, 설마…….
“루, 루핀?”
“안녕, 누나.”
나는 아주 평온하게 돌아온 그의 대답을 듣고는 잠시 얼이 빠진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내가 얼결에 클로드 카르테인을 끌어안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보랏빛이 도는 은발과 금안, 그리고 귓가에서 흔들리는 푸른 마정석.
아무리 손으로 눈을 비벼봐도 눈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은 내 남동생이 맞았다. 그러니까, 골드게이트 가문의 셋째이자 마탑의 마법사인 루핀 골드게이트가 맞는다고.
“놀랐어?”
“어? 어…….”
“그래, 그래 보이네.”
루핀은 오늘 아침에 만났던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일상적인 말과 다르게 그의 금안은 냉랭하게 나를 담고 있었다.
“북부가 다소 춥긴 하지.”
더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클로드 카르테인을 껴안고 있는 내 손과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카르테인 공작을.
아무런 말 없이 카르테인을 응시하던 루핀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옆… 옆이면…….
‘욕조가 있는 곳이잖아?’
나는 순식간에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경험을 하며 꾹 입을 다물었다. 나무 욕조와 깔끔한 판, 몸을 감쌀 수 있는 새하얀 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허브와 오일이 담긴 트레이까지.
내가 감탄해 마지않았던 것들을 하나씩 다 훑어본 그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누나, 이게 다 뭐야?”
“아. 그게 말이지, 루핀. 잠시 기다려 봐.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건 그, 다른 게 아니고…….”
“말하기가 좀 곤란한가 보네.”
“으응?”
“누나는 뭔가 숨기고 싶을 때나 곤란할 때, 그리고 당황했을 때 말을 많이 하잖아.”
툭 말을 내뱉은 루핀이 시린, 그러나 미약한 온기가 담긴 눈으로 나를 가만히 마주했다. 그의 귓가에 매달린 마정석이 짤랑, 하고 흔들리는 소리가 맑게 공간을 울렸다.
나는 루핀의 시선을 피해 재차 눈을 굴렸다. 그가 마법사라서일까? 어째서인지 루핀의 금안을 마주하면 속에 있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볼게. 그렇지 않아도 내가 보고 들은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었거든. 사실이야?”
“…뭐가?”
“누나가 카르테인 공작 때문에 아르웬 누나와 싸우고, 따로 공작가에 남아 있다가 쓰러질 정도로 무리했다는 말.”
나는 루핀이 건넨 질문을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내 뒷머리를 매만졌다. 어딘가 얼얼한 게,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그런 느낌이 든 탓이다.
아니, 하나씩 따져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긴 했다. 아르웬 언니와 대결을 한 것도 맞고, 따로 카르테인 공작가에 남은 것도 맞고, 또 그것 때문에 무리해서 쓰러진 것도 맞지.
분명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자극적이냐.’
무슨 인공 감미료를 팍팍 친 주말 드라마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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