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 뒤로는 뭐, 클로드에게 말했던 그대로다. 타냐와 게일을 대하며 보인 모습 덕분인지 나는 헤르잔과 함께 레티시아를 돌아다니는 내내 호의 섞인 시선을 받았다.
그러다 간혹 용기를 낸 영지민과 짧게 대화를 나눴고, 또 그러다가 뭘 얻어먹었다. 아, 물론 그래서 헤르잔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지.
“그럼 고민하셨다는 내용은 변화와 관련된 것이겠군요.”
“으음, 네.”
나는 옆에서 짤막하게 요약하는 클로드의 말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괜히 멋쩍어지는 기분에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돌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이게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건 알아요. 냄새나지 않는, 깨끗한 북부를 만들고 싶다니.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사실 저도 확신하기는 어렵고…….”
“영애.”
“아. 그리고 제가 공작 부인이 아니라 그, 약혼자의 위치라 월권이라는 생각도 들긴 하는데.”
“나디아.”
내 이름 하나로 구구절절 늘어놓던 말을 정리한 클로드가 양손을 올려 내 어깨를 감쌌다. 마주 보는 상황 속에서, 그가 조용히 내 눈을 바라봤다.
“이 북부에서, 그대가 하고 싶은 걸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
“그게 허무맹랑해 보이는 소리이든, 다른 이들이 경악할 만한 일이든 카르테인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카르테인은 물러서지 않으니까.”
단호하고 간결한 그의 말에 또다시 심장이 쿵쿵거렸다. 나는 애써 그 감정을 꿀꺽 삼키고는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골드게이트는 황금 길의 개척자고요.”
“하, 하하!”
“아니, 왜 웃어요, 나도 공작님처럼 내 가문의 특징을 읊어준 것뿐인데! 우리 가문이 웃겨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뭔데요!”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가 달린 클로드에게 치대며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스러운 말로 어떻게든 무사히 넘겨서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님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답하든 다 느낌이 이상해지잖아.’
고맙다고 하면 나도 카르테인 가문의 일원같이 보일 거고, 됐다고 하면……. 음, 그건 좀 웃기지. 내 제안에 긍정해 준 건데.
나는 ‘우리’라는 단어로 묶인 그와 나를 떠올리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쪽이 간질거리며 몸이 절로 떨렸다.
‘아니, 뭐. 절대 싫은 건 아니지만.’
북부의 주인이 내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다는데 싫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것도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나를 지지해 주겠다는데.
나는 클로드 몰래 옷깃으로 붉어진 목덜미를 슬쩍 가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믿어줘서 고마워요. 골드게이트답게 잘할게요.”
“나디아. 골드게이트 가문에 관해 이야기가 나와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영애께 드려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음?”
예상과 완전히 다른 말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무슨 일인지 짐작도 못 하는 나를 바라보며 클로드가 품에서 편지 두 장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나는 그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아 발신인을 살폈다. 소피아 일라리아, 그리고 데릭 골드게이트……. 데릭 골드게이트?
‘그거 우리 아빠잖아.’
어딘가 낯익은 이름에 화들짝 놀란 나는 빠르게 편지를 뜯었다. 그러고는 안에 적힌 내용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그… 지금 저희 가문에서 항의서를 보냈다는 말이에요?”
“예.”
“카르테인 공작가가 동의 없는 약혼을 주장하고 있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클로드를 바라보며 재차 편지지로 시선을 내렸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가 날카로운 필체가 또렷하게 편지지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아빠가 보낸 편지에서는 사람을 보냈다는데.”
“헤르잔과 저는 아르웬 경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요의 축제도 거의 막바지이니까요.”
“아, 아…….”
그랬지. 나 여기에 축제 끝날 때까지만 머무르기로 되어 있었구나.
나는 그간 새카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나와 클로드가 벌인 일은 제법 규모가 컸고, 도리어 소문이 퍼지도록 장려하기까지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수도에 있는 가문에 연락이 닿고도 남았겠지.’
그래서 당연히 연락 정도는 오겠거니 했다. 그게 이렇게 ‘항의서’라는 무시무시한 형태일 줄은 몰랐지만.
‘아르웬 언니도 같이 왔으니 우선은 두고 보실 줄 알았는데!’
나는 차갑게 표정을 굳힌 아르웬 언니가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림을 떠올리고는 슬쩍 양팔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심장이 직전과 다른 의미로 쿵쾅거렸다.
‘와, 와아. 언니가 이 방에 생긴 욕조를 보면 어떻게 하지?’
그날부로 북부에 전쟁이 일어나는 거 아닐까? 어쩌면 나도 고스란히 잡혀 황궁의에게 진찰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지. 미리 아이작을 찾아가서 이런 말들을 좀 공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럴 줄 알았다면 종종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알리바이를 만들어 두는 건데! 나는 안일했던 과거의 나를 혼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의식적으로 끙끙거리는 나를 잠시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한 손을 들어서 내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엄지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눌러 깨물던 것을 저지했다.
“나디아, 대체 뭘 그렇게 걱정하시는 겁니까.”
“네?”
“저희는 카르테인인데요.”
웃음기가 서린 그의 입꼬리를 보며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뭐, 물러서지 않는다고?
아주 잠시 그의 뒷말을 유추한 내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래서 문제인데요!”
나는 지금 그쪽이랑 우리 쪽이랑 전쟁 나는 거 아닌지 생각 중이었다고! 우리 집도 내 목욕과 관련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산과도 같으니까!
내가 한마디 더 말을 얹으려던 찰나, 그가 다른 편지 한 장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편지 내용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편지? 무슨 편……. 아, 맞아.”
편지 두 장이었지.
나는 씩씩대던 것도 잠시 잊고는 손에 들고 있던 다른 한 장의 편지를 바라봤다. 편지는 은은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살짝 클로드와 눈빛을 나눈 나는 다시금 편지를 보낸 발신자에게 집중했다.
‘소피아 일라리아……. 처음 보는 이름인데.’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니, 근데 또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란 말이지. 나는 도통 알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읽었다.
편지는 제법 간략했다. 정중한 인사와 자신의 소개로 시작했다가 일라리아 백작가로 초대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거든.
“어…….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저를 백작저로 초대하겠다는… 편지네요?”
“역시 그렇게 되었군요.”
“역시?”
“지금 북부 사교계의 축을 맡은 이가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라서 그렇습니다. 본래라면 켄팅턴 백작 부인이 먼저 초대장을 보냈을 텐데,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나는 배는 혼란스러워진 표정으로 다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북부 사교계의 중심이 일라리아 백작 부인인 것과 초대장이 무슨 관계인데요?”
“그대가 저의 약혼자니까요.”
도무지 감을 못 잡는 듯한 나를 가만히 보던 그가 작게 입술을 벌리고는 내게 물었다.
“나디아, 혹시 북부의 절차에 익숙지 않으십니까?”
“으음, 네에?”
“그렇군요.”
감을 잡았다는 듯 클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래턱을 문지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북부는 외지인에게 다소 폐쇄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 절차 역시 수도와 비교했을 때 좀 번거로운 면이 있지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새로운 주인에 대한 가신 가문의 충성 서약입니다.”
“아?”
“카르테인 공작가를 섬기는 가신 가문에는 대표적으로 총 여섯 개의 가문이 있습니다. 공작가의 새로운 주인이 될 이는 여섯 가문의 초대를 받아 한 번씩 식사 자리를 가집니다. 그렇게 안면을 트고, 파악하는 것이죠. 자신이 모시게 될 새로운 주인을.”
“…….”
“그렇게 초대를 모두 받은 이후에 북부의 귀족들 앞에서 충성 서약을 받는 겁니다.”
나는 클로드의 말을 들으며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저걸 현대로 치환하면 상견례만 여섯 번을 해야 한다는 말이야?
눈에 불을 켜고 자격을 꼬치꼬치 캐물을 시댁이 여섯 개나 있는 거냐고. 잠시 아연하여 입을 벙긋거리다가 클로드에게 물었다.
“만약, 충성 서약을 받지 못하면요? 그럼 약혼이나 혼인도 무효가 되나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귀를 매만졌다. 분명 어떤 말도 없었는데, 클로드의 대답 뒤에 이 말이 덧붙어서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딜 감히.’
그건 일종의 자신감 같기도 했다. 카르테인이 선택한 자가 부족할 리 없다는 믿음. 자신과 가문을 굳건히 믿는 듯한 그가 주황색 눈동자에 나를 담으며 말을 이었다.
“편하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영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니까요. 그저 그들에게 모실 이를 파악할 시간을 주는 거지.”
“아…….”
“여섯 가문 중 일라리아 가문, 그것도 일라리아 백작이 아닌 백작 부인이 먼저 연락을 보낸 것도 상징성 때문입니다. 카르테인에 새로운 주인이 생긴 이상, 사교계의 주인도 바뀌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클로드가 살짝 시선을 내려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내 손 위에 놓인 두 편지를.
“보통은 혼인과 관련된 논의를 시작한 이후에야 진행되는 절차인데, 이렇게 빠르다는 건.”
“…….”
“북부에서 영애의 평이 상당히 좋다는 것이겠지요. 미적거리다 놓치기 싫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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