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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42화 (42/155)

42화

‘아직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거 정말로 괜찮을 것 같은데? 잘 꾸리기만 한다면 단순한 관광지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업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어, 진짜 구상해 볼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내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줄리엔이 말을 걸었다.

“나디아 님, 우선 소파라든가 침대로 자리를 옮기시는 건 어떨까요? 눈 찜질과 손 마사지는 어떠신가요?”

“아, 으응. 좋아.”

“그럼 제가 빨리 준비해 오겠습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방금 떠올린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지금이야 소문이 주는 화제성 때문에 몰릴 뿐이지만, 온천의 효능이 점점 알려지기 시작해 봐.

‘가뜩이나 축복의 물이라느니 치유의 물이라니 거창한 이름까지 붙었는데, 당연히 이거로 수익을 내보려고 하겠지.’

그러다가 사람들이 온천수를 먹는 물처럼 팔아서 누군가 마시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현대라면 먹어서 해가 되지 않는 성분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지만, 여기는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나한테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팔고 사용법 같은 걸 명확하게 명시하는 게 나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공작 가문이 나서면 적어도 주춤하기는 할 거다.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즈음, 줄리엔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야를 들고 돌아왔다.

“자, 손 주세요.”

“으응.”

나는 줄리엔에게 손을 내밀며 반 박자 느리게 그녀에게 질문했다.

“줄리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온천이 어디야?”

“가장 많이 찾는 온천이요?”

줄리엔은 물기를 짜내 온기가 남은 수건을 내 눈 위로 얹었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 내 질문에 답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신의 영역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온천이지 않을까 싶네요. 거기는 마을 이름을 따 ‘레티시아’라고 불리고 있기까지 하거든요.”

“그래?”

“이렇게 세세하게 물어보시는 건 또 드문 일인데……. 자꾸 관심이 가시나 보네요.”

당연히 관심이 간다. 거긴 내 새로운 사업지가 될 곳이니까.

나는 수건이 떨어지지 않게 남은 한 손으로 수건의 끝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까 싶어서 물어봤어.”

“네?”

“레티시아 말이야. 내가 직접 가서 보려고.”

뭐든 현장 조사를 나가야 구체적인 사업 기획이 나오지 않나. 사람들이 온천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수질은 어떤지 등등 알아봐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아, 어느 정도의 온도가 적절하고 얼마만큼의 효과를 보고 있는지도 알아봐야지.

‘덤으로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도.’

기분이 좋아져 웃음을 지은 나는 조금 더 자세하게 말을 덧붙였다.

“가서 할 일이 많아. 온천을 제대로 즐기는 법도 알려줘야 하고.”

“그럼 각하께 말씀드릴까요?”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본래는 그 사람이랑 가려고 하기는 했는데.

‘아직 좀 이른가?’

배후 사건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사업 이야기를 꺼내면 혼란하기만 할 것이다. 우선은 좀 더 그림을 그린 후에 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답했다.

“아냐, 이번에는 혼자 갈게. 아, 완전히 혼자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줄리엔 너나 헤르잔이랑 같이 가면 되지 않을까?”

살짝 수건을 들춰 확인한 줄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끼리 나가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나디아 님…….”

나는 기분이 좋은 듯 생기가 도는 줄리엔을 바라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잔을 꼬시는 건 더 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절대 불가하다며 위험성을 줄줄 내뱉던 그가 내가 슬쩍 내뱉은 말에 잠시 주춤했거든.

‘갑자기 좋은 사업이 생각나서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지금의 흐름을 끌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업, 흐름, 아쉬움.

그가 좋아할 만한 내용을 콕콕 짚은 탓일까? 헤르잔은 잠시 몸을 움찔하더니 내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혹시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럼요.’

나는 기꺼이 대신관과 나눈 대화를 거론하며 그 이후 생각했던 것들을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펜대를 몇 번씩 움직이던 그는 들은 직후 이렇게 대답했다.

‘우선, 각하께는 제가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자세한 건 추후에 나디아 님이 말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예. 그리고 나디아 님, 앞으로는 제게도 말씀을 편히 해주시죠. 이미 시녀장에게는 그러고 계신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 응, 알겠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나는 다소 누그러진 헤르잔의 표정을 보며, 내가 앞으로 가장 많이 손을 잡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물론 클로드 카르테인이 내 일에 나서서 반대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작님이잖아.’

내가 뭔가를 얹지 않아도 클로드 카르테인은 바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기는 위생 빼고 K-로판인 세계 아닌가. 북부 대공인 그가 일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조사관들에게 부요의 시기 이후가 제일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마수 토벌과 겨울이 겹치는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랬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편이 효율적인 거지.’

언제까지고 그 사람이랑 모든 곳을 함께 다닐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레티시아를 찾은 나는 그곳에 발을 디딘 순간 과거의 나를 이해했다. 다시 말하자면, 한동안 잊고 있던 더러운 현실을 다시 깨달았다는 소리다.

“으응, 그래. 여기 이런 곳이었지…….”

“네?”

“흡, 아니야.”

나는 침착하게 호흡을 조절하며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클로드 카르테인, 나랑 꼭 결혼하자.’

만약 클로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맺어진다면 이곳과 비슷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될 것 아닌가.

‘물론, 당연히 귀족 가문이 여기보다는 낫겠지만.’

그들은 결코 줄리엔의 알뜰살뜰한 보살핌과 클로드의 세심한 깔끔함을 따라오지는 못할 거다.

그 말은 클로드 카르테인과 결혼하지 못하는 한,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행복이 일시적일 거라는 뜻이지. 나는 참담한 현실을 재차 망막에 또렷하게 새겼다.

‘옷은 그냥 저렇게 땅에 막 벗어둬도 되나? 바로 옆에 가축들이 돌아다니는데.’

‘아, 그래. 그냥 온천에 들어가겠구나.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화장실은 조금 더 멀리 위치시키는 편이…….’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느껴본 적이 없던, 냄새 때문에 오는 두통인데.

‘아, 오랜만에 겪으니까 더 힘드네.’

나는 저절로 고이는 눈물을 닦아내며, 울렁이는 속을 진정하려 노력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너덜거리는 수첩을 꺼내 새로운 체크 리스트를 작성했다.

[온천의 관리 및 인력 보충(인력의 인식 개선 교육 병행), 전반적인 수도 시설 및 설계 개선, 그리고 위생 사업과 관련한 구체적 기획안 작성.]

뭐라고 썼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글씨가 개발새발이었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으, 괴로워.’

숨을 들이마시는 빈도를 최대한 줄이느라 안색이 창백해지자 줄리엔이 내게 다가왔다.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싼 그녀가 가까이에서 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디아 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공작저로 돌아갈까요?”

“아니, 흡. 아냐, 괜찮아.”

나는 줄리엔의 팔을 잡은 채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나는 다시금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줄리엔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재차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괜찮아. 괜찮아야 해.’

여기에는 무수히 많은 눈이 있으니까.

나는 어색해하면서도 나를 흘깃흘깃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금 표정 관리를 했다.

연회장에서 나던 냄새만큼 적나라한 악취가 코끝을 맴돌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쓰러질 수는 없다.

‘나는 신의 축복을 받아 건강해진 사람이잖아.’

만약 내가 여기에서 다시 쓰러지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때는 진짜 난리 나는 거다. 신의 축복이다 뭐다 하며 들떴던 분위기가 단번에 흉흉하게 뒤바뀌겠지.

‘절대 안 돼.’

평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이런 생리적인 현상 따위 정신력으로 버텨내야지.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목표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정신론을 들먹일 때였다.

“여, 영애님!”

어디선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의 인영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러고는 헤르잔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냅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나디아 님.”

줄리엔이 내 어깨를 그러쥔 손에 힘을 준 채 나를 그녀 쪽으로 살짝 당겼다. 나는 반쯤 줄리엔의 품에 안긴 채 그저 눈을 깜박였다.

내 앞에 엎드린 사람은 짧고 짙은 갈색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의 모습에, 레티시아 일대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한 탓에 작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물속에서 찰박이는 소리도 일순 뚝 그쳤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헤르잔이 나와 줄리엔 앞으로 끼어들었다.

“물러서라.”

“…….”

“한 번만 더 말하지. 영애님에게서 물러서. 그러지 않는다면 위협이라 생각하고 조치하겠다.”

날카롭고 단호한 헤르잔의 말에 내가 주춤하던 사이, 고요하기만 했던 공간에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 흐느낌은 무릎을 꿇은 채 엎드린 여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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