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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41화 (41/155)

41화

주점에서 봤던 주근깨가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찾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기껏 거주지를 찾아내 잡으러 간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헤르잔은 분함과 죄송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이 사실을 전하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서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눈빛이었다.

눈여겨볼 만한 건, ‘신의 축복’ 이후 모든 군소리가 깡그리 사라졌다는 점이다. 언제 수작을 부렸냐는 듯이.

‘지금은 몸을 사릴 때라는 거겠지.’

그러다 약점이 다시 생기면 그걸 집요하게 물어뜯겠다는 거고. 내가 알아챌 정도의 의도를 파악 못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지만, 그냥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낀 싸늘한 기분이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호기롭게 방해가 되는 사람은 다 덤비라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쥐고 있던 칼이 장난감 칼이었음을 깨달은 기분이라고 할까.

‘그도 아니면 상대가 아동용 만화에 나오는 악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범죄물의 흑막 같은 느낌이거나.’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처음 마주한 죽음은 그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클로드 카르테인은 내가 보인 몇 초 정도의 미적거림에서 이 모든 것을 눈치챘다.

“나디아.”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그가 내 손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다 다시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디아, 괜찮습니다.”

그게 뭐가 되었든.

손가락의 끝에 얽힌 그의 손을 보고 있자니, 입 사이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이, 그럼요. 저도 알아요. 게다가 공작님은 지는 싸움은 해본 적이 없으시잖아요?”

“그도 그렇군요.”

참 웃긴 말이긴 한데, 아무래도 그의 ‘괜찮다’라는 말에는 진정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면 불안하고 무겁다고 생각했던 게 일순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내가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혼자 생각할 즈음,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불쑥 상체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서,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네?”

“인기쟁이라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헤르잔에게 뭔가 고민이 깊어 보였다고도 들었는데…….”

아, 그거.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머쓱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 으음. 별거 아닌……. 아니지.”

“음?”

“별거이기는 해요.”

암, 목욕이랑 관련된 이야기니까 별거이긴 하지. 나는 의아함이 엿보이는 그의 표정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제가 이번 온천에서 본 게 좀 있어서요.”

한번 서두를 떼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흔들림 없는 그의 주황색 눈을 마주하며 내가 봤던 것들을 하나씩 입에 담았다.

일의 시작은 그러니까, ‘신의 축복’이 있고 난 바로 다음 날 대신관이 나를 찾아오면서부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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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충격적일 정도였습니다!”

“충격적일 정도로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다행이요? 이건 그저 다행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아깝습니다. 왜 각하와 영애가 신께서 축복을 내리셨다고 했는지 알 것 같군요. 신께 맹세컨대, 온몸에 활기가 느껴지지 뭡니까.”

힘이 넘치는 대신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확신했다. 신의 분노를 신의 축복으로 탈바꿈하려던 우리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정말이지 이게 대성공이 아니면 대체 뭐가 성공이지?

‘이렇게 대신관이 잔뜩 흥분한 채 내게 찾아와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말이야.’

나는 세 번째 부탁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대신관에게서는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차를 반쯤 비우고 쿠키를 집는 사이에도 그는 열심히 자신의 첫 온천 경험과 이걸 통해 느낀 신의 은혜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의 노인이 잔뜩 풀어진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의 간증과 두 눈으로 목격한 신의 응답에 저도 동참해 보길 잘했습니다. 이 늙은이의 인생에 있어 가장 평온했던 시간이었답니다. 뼈의 마디마디가 다 개운해지는 느낌, 이건 분명 신께서 주신 특별한 물 덕분이겠지요!”

예에. 그건 뜨끈한 물에 근육이 풀려서 그런 겁니다. 그, 관절이랑.

나는 미처 내뱉을 수 없는 말을 고이 삼키며 그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보았을 때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보일 법한 완벽한 미소일 거다.

‘실제로 드는 마음은 흡족함에 가깝지만.’

이게 바로 잘 키운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일까? 나는 드디어 누군가가 목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다는 사실에 홀로 짜릿함을 느꼈다.

‘하……. 더 해줬으면 좋겠다, 더.’

줄리엔을 제외하면 대신관은 내가 그토록 고생해서 얻은, 값진 첫 보상 아닌가. 이참에 푹 빠져서 우리 계획에 도움을 주면 좋지.

만족스러움이 담긴 내 시선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한참 동안 온천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던 대신관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이제야 시계를 본 모양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말을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겠지.

“허허, 제가 말이 길었군요. 나중에 신전에도 한 번 방문해 주시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드려요.”

나는 대신관을 따라 무거웠던 엉덩이를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넘어갈 정도로 즐거워 보이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나디아 영애, 저는 정말 진심입니다. 정 믿기지 않는다면 이른 시일 안에 다음 약속을 잡는 건 어떻습니까? 이 늙은이의 말동무가 되어주시면 좋겠군요.”

“그럼 그때는 제가 선물로 북부의 온천수를 가지고 갈게요.”

“온천수?”

“아! 신의 축복이 내린 특별한 물을 뜻하는 거랍니다. 매번 그렇게 부르려니 너무 길어서, 공작님과 상의해서 새로 명칭을 만들어 보았어요.”

대신관은 다시금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기 어렵지 않은 짧은 단어가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럼 조만간 신전에서 사제를 보내지요. 영애께 오늘도 신의 기쁨이 깃들기를.”

“신의 기쁨이 깃들기를.”

나는 방을 나서는 대신관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러고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디아 님!”

“아, 줄리엔.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놀라서 단번에 달려오는 줄리엔을 말리며 나는 가만히 내 볼을 꼬집었다. 얼얼한 통증이 얼굴 전체로 퍼지는 느낌에 나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정말인 거지?”

“네?”

“…정말로 대신관님이 목욕을 긍정적으로 말한 게 맞지?”

솔직히 대신관이 주야장천 말할 때는 좀 실감이 안 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하도 바라는 통에 이런 내용의 꿈을 꾼 기분? 그런데 이게 실화라는 거잖아.

가만히 눈을 비비는 나를 보고 작게 소리 내 웃은 줄리엔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잘 들으셨습니다. 아주 긍정적이시던걸요?”

“정말……? 진짜지? 나 너만 믿는다, 줄리엔?”

“네,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제가 처음 목욕한 이후에 감사 인사를 드릴 때도 이러시더니, 이번에도 똑같으시네요!”

“아, 으응. 그랬지.”

나는 줄리엔이 신이 나 내게 전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숨을 골랐다.

대신관의 극찬 때문에 새하얗게 잊어버리긴 했지만, 줄리엔이 처음 후기를 들려줄 때는 제대로 숨도 못 쉬었다. 떨려서.

‘나디아 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감사 인사를 하던 그녀를 떠올리고 있자니, 불현듯 지금까지의 노력이 실패율 0%라는 것이 생각났다.

‘클로드, 나, 줄리엔, 그리고 대신관님. 벌써 넷이네.’

비록 한 명은 온천이 특별한 물이라고 믿고 있어서 그런 거지만, 그래도 이 숫자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본래 세 명만 있으면 메이저 아니냐.’

그럴 거다. 게다가 온천 사업은 일종의 믿고 내거는 상품인걸.

혼자 온천을 ‘사업’으로 격상한 내가 다시금 줄리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이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른 질문이 있어서였다.

“줄리엔, 사람들이 신의 영역이나 온천을 많이 찾니?”

“음, 네. 눈앞에서 신의 은혜를 볼 기회인걸요. 북부도 북부지만, 제국 전역에서 오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다소 떨어진 근방의 마을까지 호재라는 이야기도 들었답니다.”

“…그래?”

아니, 벌써 관광 단지가 조성되고 있단 말이야?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내가 눈만 깜박이고 있을 즈음, 줄리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네. 신의 영역 안쪽은 여전히 방문하기에 두려운 곳이라서, 신의 영역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온천이 생긴 주변의 마을로 사람들이 발걸음을 돌리고 있거든요.”

“그렇구나…….”

“그새 여러 이름도 붙은 것 같아요. ‘치유의 물’이나 ‘기적의 물’ 같은 거로요. 곧 있으면 상인들까지 붙을 것 같아 헤르잔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습니다.”

기적의 물과 상인.

나는 어딘가 묘하게 친숙한 단어의 나열에 꾹 입을 다물었다. 내가 방금 대신관님께 뭐라고 했었지?

‘그럼 그때는 제가 선물로 북부의 온천수를 가지고 갈게요.’

그래, 선물로 온천수를 가지고 간다고 했다. 선물로. 그때는 그냥 별생각 없이 했던 말인데, 이거 잘만 하면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대충 예를 들자면 온천수 배달 서비스 같은 거 말이야.’

배달에 진심인 현대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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