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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39화 (39/155)

39화

클로드 카르테인이 내뱉은 말에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경악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그들이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공작의 속내였던 탓이다.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리거나 말 거나, 클로드의 말은 고해하듯 담담하게 이어졌다. 주황색의 눈이 과거를 헤매며 작게 일렁였다.

“마수의 피로 온몸이 절여졌던 그 전쟁 당시, 저는 괴로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 누울 때면 마수가 습격하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막사에 불이 켜지고, 피가 튀고, 또 그것들이 제 살을 씹다 몸 위에서 무너지고…….”

“저런, 형제님……. 참 괴로우셨겠습니다.”

“북부를 짊어진 사람으로서 약한 마음이지만, 예. 제게는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악마가 머리 위에서 뛰어노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끔찍했습니다. 심지어는 저 자신조차도.”

북부의 패자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속마음은 어딘가 적막했다. 꼭 오래된 상처에 남은 흉터같이.

“그렇게 절벽까지 몰린 후에야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저를 도와달라고, 이 역겨움을 덜어달라고.”

“신께서 응답을 주셨습니까?”

“예.”

단호한 공작의 말에 주위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수군거림으로 가득 찬 공간을 한 손으로 조용히 시킨 대신관이 부드럽게 고갯짓을 했다. 조금 더 설명해 달라는 뜻이었다.

“전투 중 마수들의 땅이라고 불리는 곳에 홀로 떨어졌을 때였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온몸에 구역질 나는 피를 뒤집어쓴 채 있는데, 갑자기 근처에서 뜨거운 물기둥이 치솟았습니다. 하늘 높이 솟은 물기둥은 굳어있던 제 머리 위로 쏟아져, 조금씩 피를 씻어주었습니다.”

클로드는 감히 마수들이 그곳을 밟지 못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마수들은 물기둥이 치솟는 걸 보자마자 도망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도.

“평소와 다르게 멀끔한 제 손을 보면서, 물기둥 근처에 얼씬도 못 하는 마수들을 보면서 저는 이게 신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물로 더러워진 몸을 씻어내라는 은혜구나.”

“…….”

“그럼, 이제 나는 괜찮아질 수 있겠구나.”

바닥을 향하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대신관을 마주했다. 주름진, 그러나 자비로운 대신관의 눈을 바라보며 공작은 자신의 행보를 하나씩 설명했다.

“그 은혜 이후 물기둥이 다시 치솟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낯선 마수들의 땅에서 혼자 마주했던 그때의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 응답이었지요. 놀랍게도 그날 이후 저는 괴로운 환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잠도 잘 수 있었고, 점점 머리도 개운해졌다. 그렇게 자신의 상태를 나열하던 그가 천천히 말을 맺었다.

“그래서였습니다. 문득 불안감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올 것 같으면 물을 끓인 것이.”

“아, 형제님. 혹시?”

“네. 그때의 기억을 더듬었던 겁니다. 일개 인간인 제가 물기둥을 만들 수는 없으니, 몸을 담그는 것으로요.”

여기저기에서 작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어디선가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난 것도 같다.

여러 반응 속에서 클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눈빛을 교환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그랬는데, 그녀가 쓰러졌을 때 ‘신의 영역’에서 물기둥이 솟았다는 소문을 들은 겁니다.”

“허어…….”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축복을 내려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가 감히 기회를 얻어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있게 해주신 것에도 감사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공작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옅게 미소만 그리고 있던 골드게이트의 차녀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감사해야 할 건 저지요. 벌써 두 번이나 축복으로 치유를 받지 않았습니까. 건강한 모습으로 소중한 이의 곁에 설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나디아, 하지만 이건 제가 더…….”

“아니라니까요? 제가…….”

“허허!”

아웅다웅 귀엽게 감사를 늘어놓는 두 남녀를 바라보며 대신관이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곱게 휜 눈으로 부드럽게 두 사람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신께서 두 분의 마음을 다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 이외에 신의 앞에서 더 고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대신관의 물음에 두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스럽지만 애틋하게 서로의 손을 붙잡은 두 남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직접적으로 축복을 받은 공작의 약혼자였다.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푸른 눈빛이 잘게 반짝였다. 공작과 대신관을 담고 있던 그녀의 눈이 이윽고 자신을 향한 무수히 많은 시선을 마주했다.

“…함께 겪은 신의 기적으로 이 사람과 묶이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그리고 제게 내려주셨던 신의 은총을 부디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에게도 내어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그때였다.

대신관이 입술을 마저 떼기도 전, 잘게 땅이 울었다.

심장 박동과도 같은 울음소리에 가슴이 함께 울렁이던 찰나, 콰아아 소리와 함께 잠잠하던 호수에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마치 그녀의 청을 허락한다는 것처럼, 강하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방울이 몸을 잔뜩 적시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하늘 높게 치솟는 물기둥과 그 앞에 서 있는 작은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신께서 은총을 내려주셨네요.”

물에 젖은 채 작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이, 부드럽게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가 기적 그 자체였으므로.

신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은 신전과 그날 목격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북부 전역과 제국 전체로 퍼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말해보게. 내 딸이… 뭘 해?”

골드게이트 가문이 뒤집혔다.

* * *

ㅎㅂㄹㄱ

“정확하게 어디에서 들었지? 누가 전달한 말인가?”

“그건.”

골드게이트 공작가의 주인인 데릭 골드게이트의 목소리가 차게 깔렸다. 그럴 만도 했다. 집사장이 전한 소식이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으니까.

“자네가 뭘 잘못 안 것이 분명하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라니.”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공작의 말에 집사가 잠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귀를 의심했습니다만…….”

“그럼 지금 나디아가 정말 카르테인 공작과 약혼을 했단 말인가? 나도, 내 아내도, 우리 가족 중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불면 꺼질세라 쥐면 터질세라 애지중지하던 둘째다. 심지어 쓰러진 그날 이후로는 제대로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던 아이인데…….

‘요양차 보낸 북부에서 약혼을?’

벌써 세 번째 같은 문장을 되뇌고 있었으나, 여전히 데릭은 해당 문장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디아가 사고를 칠 만한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르웬이 잠잠하지 않은가.

엄격한 규칙을 가진 그 아이라면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곧장 연락을 주었을 것이다. 데릭 골드게이트가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받은 연락이 뭐였지?’

아, 그래.

‘나디아는 부요의 축제가 끝날 때까지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체류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나디아에게 황금 열쇠도 내어줬어요.’

나디아가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머문다는 연락이었다. 과거의 일을 떠올린 공작의 짙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허공을 훑었다.

‘나는 이동하는 게 몸에 부담되어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어?

데릭의 입술이 일자로 굳었다. 제국의 재상다운 예리한 감이 위험을 알렸다. 만약, 그 체류 결정에 더 많은 것들이 얽혀 있었다면? 카르테인 공작이 나디아에게 마음이라도 품었다면?

‘아니,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어느 쪽이든 아르웬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마지막 남은 보루를 떠올리며 데릭이 사색에 잠겨 있을 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골드게이트 공작가의 안주인인 프리지아 골드게이트였다.

“여보, 제가 방금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는데……!”

“나디아의 약혼 이야기 말입니까?”

잔뜩 억눌린 데릭의 목소리를 들으며 프리지아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귓가에서 찰랑거리는 보석 귀걸이와 질 좋은 실크 장갑, 그리고 풍성한 치맛단은 그녀가 다급하게 달려왔음을 보여주었다. 사실이었다.

프리지아는 뜻밖의 소식을 듣기 직전까지 황후의 대리자로서 궁의 행사를 주관하고 있었으니까.

“백작 부인이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섭섭하다고 하더군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집안에 생긴 이런 경사를 남의 입으로 듣게 하느냐고!”

“하, 경사라…….”

“약혼이라뇨! 북부와의 굳건한 연결 고리라뇨! 아르웬과 황후 폐하를 따라 축제에 참여하러 간 그 아이가 왜 갑자기!”

“저도 방금 들었습니다, 부인.”

“누군가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닐까요?”

프리지아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이게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이득 없는 소문을 퍼트린단 말인가.

카르테인 공작가와 골드게이트 공작가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걸 알려서 두 공작가가 손해 볼 게 뭐가 있다고.

‘아니, 아니다.’

책상 위로 팔을 뻗어 휘청이는 몸을 지탱한 공작 부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수작일 수도 있겠군요, 카르테인 공작가의.”

“카르테인 공작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카르테인 공작가가 왜 나서서 나디아에게 그런 수작을…….”

“지금 공작 위에 오른 클로드 카르테인의 소문이 별로 좋지 않으니까요.”

공작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 두 공작 내외의 시선이 빠르게 창가 쪽을 향했다. 언제 열렸는지도 모를 창문 앞에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연한 보라색이 감도는 은발과 차가움이 서린 금색 눈동자.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를 공작이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단단히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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