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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36화 (36/155)

36화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다급하게 손등으로 내 볼을 건드렸다. 손등 위로 물에 개어 끈적하게 뭉친 가루가 묻어 나왔다.

‘나디아 골드게이트, 생각이라는 걸 좀 하자!’

나는 속으로 경악을 하며 클로드 쪽으로 다급하게 얼굴을 돌렸다.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낌이 왔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분 따위를 바르지 않아도 새하얗게 질려있을 거다.

“나디아?”

갑작스러운 버둥거림에 클로드가 나를 불렀지만, 내게는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거세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화장이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잠깐. 클로드, 잠깐만요! 저 얼굴 화장! 물!”

“아.”

클로드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공주님 안기 자세에서 벗어나 다시 양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버둥거리다 떨어지지 않게 다리로 단단히 그의 허리를 붙들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원숭이가 나무를 기어오르는 것과 퍽 비슷한 자세였지만, 어쩌겠어. 당장 쏟아지는 물에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건 이 자세뿐인데.

“괜찮습니까?”

물을 피할 수 있는 자세로 다시 나를 붙든 그가 로브로 내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 그러고는 옷깃을 살짝 들어 나를 확인했다.

내 상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곱게 휘어졌다. 굉장히 웃긴 것을 본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아, 영애……. 이건 안 되겠는데.”

아, 설마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내 눈빛에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엄지로 내 볼을 문지르고는 손을 들어 보여주었다.

“아.”

나는 하얀 분이 거의 묻어나지 않은 그의 엄지를 보며 작게 탄식을 흘렸다. 그렇구나.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나는 참담한 심경을 담아 그의 엄지를 붙잡았다가 다시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실책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 깊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저질러진 일인걸.’

나는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조심했어야 했고, 더 세심하게 굴었어야 했지만 그 생각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실수에 대한 반성은 나중에 해도 되지만, 저질러진 일은 지금 수습해야지.’

부주의했던 자신을 질책하며 클로드 쪽으로 시선을 올린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푸핫!”

“음?”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턱 부분을 훔친 내 손등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잔뜩 튀는 물방울 사이에서 나와 그는 엇비슷하게 지저분해진 몰골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웃겨서 나는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웃깁니까?”

“뭐예요. 공작님도 저 보고 웃었잖아요.”

나는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치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아, 진짜 큰일이다. 자꾸 이렇게 일을 하다가도 불쑥 감정이 튀어나와서.

‘집중해야지, 집중!’

곧 있으면 물기둥도 잠잠해질 거다. 꽤 오랜 시간 솟구쳤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던 찰나 높게 솟았던 물기둥이 촥, 하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물이 치솟은 시간은, 음. 한 오 분 정도 되는 거 같네요?”

“그럼 다음 물기둥이 치솟기 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만 확인하면 되겠군요.”

“네. 그럼 될 것 같은……. 앗! 공작님, 저기 봐요!”

간헐천이 공기 중에 물방울을 퍼트린 탓일까? 물기둥이 솟은 자리 위로 낮게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선명하게 빛나는 일곱 가지 색을 바라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우리가 마지막에 계획한 장면에도 이렇게 무지개가 뜨면 좋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물론 그 전에 우리의 몰골부터 정리해야겠지만요.”

손등으로 본인의 턱을 쓸어 낸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맞는 말이다. 이대로 내려갔다가는 순식간에 모든 게 들통날 판이니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아무래도 내려갈 때는 제가 공작님께 안긴 채 어깨에 얼굴을 묻어야겠죠? 그, 엄청 피곤해서 탈진한 설정으로. 어때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은데.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약혼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게 안도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내 약혼자가 여성의 무게 정도는 끄떡없는, 제국의 손꼽히는 검사라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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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척 클로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공작가로 돌아온 그날 이후, 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우선 그날 일은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나와 클로드의 상태를 본 헤르잔과 줄리엔의 턱이 빠지는 줄 알았으니까.

‘제발, 제발 조심해 주십시오.’

헤르잔은 거의 애원하듯이 당부를 했는데, 이해한다. 그의 불안 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거든.

그는 매일 밤 언니가 공작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창가를 내다보고 있다고.

‘헤르잔의 유일한 위안은, 공작의 기도에 신의 가호가 임했다는 소문이 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는 것과 이 모든 일이 내일이면 끝난다는 것 정도이려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수첩에 마지막 체크 표시를 마쳤다.

간헐천에서 물이 솟구치는 시간도 재차 검토했고, 안전거리도 봤고……. 사람이 몸을 담글 수 있는 온천의 수량과 위치도 다 파악했지.

‘와, 진짜 다했네.’

나는 빼곡하게 지워진 계획 목록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힘들었다.

‘이럴 때는 같이 일한 팀원들이랑 고기 한번 구워줘야 하는데.’

회사 근처에 정말 맛있는 솥뚜껑 삼겹살집이 있었다.

거기에서 삼겹살로 건배를 하고 나면 그제야 기분 좋은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면서 긴장이 풀렸지. 팀장님은 프로젝트가 끝난 걸 몸이 아는 거라고 했었다.

내가 흔적들이 여러 번 덧입혀진 종이를 꼭 끌어안은 채 소파에 늘어져 있을 때였다.

“어머, 나디아 님.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피부 관리 용품을 한가득 든 줄리엔이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이제 친숙해진 그녀를 바라보며 덩달아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응, 좋아. 지금 느낌대로라면 순조롭게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거든.”

“정말요? 듣던 중 기쁜 말이네요. 그럼 더 기분 좋게 쉬실 수 있도록 이쪽으로 앉아주시겠어요? 화장했던 거, 마저 지워드릴게요.”

나는 줄리엔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첫날에 비하면 거의 화장을 하지 않다시피 한 거울 속의 나를 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열심히 공을 들인 덕에, 기존의 소문과는 완전히 원인이 다른 소문을 잔뜩 띄울 수 있었다. 내가 쓰러졌다는 것, 클로드가 이에 대해 신께 청을 드렸다는 것, 그리고 ‘신의 은총’을 통해 응답을 받았다는 것까지 모두.

“나디아 님, 내일은 어떻게 화장을 하면 좋을까요? 오늘은 입술만 조금 칠하고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음, 내일이 결전의 날이니까 생기가 돌 듯이 화사하게? 근데 화장을 한 티가 나면 안 돼. 물을 맞을 거니까.”

음, 마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뜨겁게 달라는 말 같군.

내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다시 부탁하려던 순간, 천에 화장수를 적시던 줄리엔이 어렵지 않다는 듯이 내 말을 받았다.

“아,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알겠네요! 아무래도 내일은 보이는 게 중요한 날이니까요. 그럼 각하도 그런 느낌으로 정돈해 드려야겠어요.”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일 챙겨야 할 것들을 분류하는 그녀의 모습에 잠시 감탄했다. 저게 바로 장인인가.

‘보이는 게 중요한 날이라…….’

그래, 어떻게 하다 보니 내일이 정말로 결전의 날이었다.

물론 계획 전체로 봤을 때 내일 만든 행사는 소문에 쐐기를 박는 정도의 일이었다. 아직 배후도 완전히 캐내지는 못했다고 들었고.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내일 제대로 간헐천을 신의 축복이라고 각인시키지 못하면 사람들은 온천물에 손도 담그지 않을 거야. 목욕으로 여러 병을 예방할 수도 없겠지.’

그럼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넘어간다 해도, 또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소문이 기어 나올 거다. 바퀴벌레처럼.

‘내가 이걸 어떻게 해냈는데.’

미세하게 나아지는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서 정말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았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평소에도 부단히 주의를 기울였지.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에 뚜렷하게 남았던 것을 딱 하나 꼽자면 사람들이었다. 정확하게는 사람들의 눈빛.

내 얼굴에 혈색이 돌아올수록, 그리고 내 걸음에 조금씩 힘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호기심과 체념에서 기대감으로, 기대감에서 경이로움으로, 그리고 종내는 희망으로.

감히 나를 만지지도, 그렇다고 손을 물리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솔직히 양심이 조금 아팠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기적을 부려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세상에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다.

‘정말 미안해요, 여러분……. 그렇지만 이게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좋은 거라고 진짜 장담할게요.’

온천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도움이 될 거라는 것에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온천물로 몸을 닦으면 몸은 절로 깨끗해질 거고, 위생은 모든 치료의 기본이니까. 질병 예방의 기본이기도 하고.

‘정 그렇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그건 내가 몰래 뒤에서 도와야지.’

나는 홀로 코를 훌쩍이며 미안한 마음을 잠시 뒤로 물렸다. 언니에게 골드게이트 가문의 열쇠를 받아두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 나디아 님. 얼굴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아, 응.”

부드러운 손길로 화장을 지우던 줄리엔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작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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