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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34화 (34/155)

34화

“이곳은 땅이 고르지 않으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음. 죄송합니다…….”

이건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다. 다치면 안 된다고, 내가 잘못되면 다 망하는 거라고 다짐했던 게 바로 몇 분 전의 일인데 이게 뭐람.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진심을 담아 다시 한번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제 진짜 조심할게요. 아, 제가 다치면 계획도 큰일 나고 공작가도 큰일 나고 우리 목욕도 큰일 난다고 몇 번씩 생각은 하는데 자꾸 기분이 들떠서…….”

“아니, 나디아. 잠시만요. 그게 아니라.”

우물쭈물 건넨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춘 그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잠시 말을 고르다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계획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다치는 게 걱정인 겁니다, 나는.”

“어…….”

“그대가 또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서.”

담담하게 귓가에 내려앉은 말에 잠시 심장이 달그락거렸다. 비상이다. 비상!

클로드 카르테인이 지금 한 말은 별다른 의미 없는, 그러니까 약혼자에 대한 아주 자연스러운 걱정일 게 분명했다.

막 일부러 ‘잘 봐, 난 지금 네 심장을 후려치러 온 거야.’ 같은 의도를 담아 한 말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누구에게 문제가 있다?’

나에게 있다. 왜? 클로드가 내게 한 평범한 말 한마디가, ‘방해자’들에게 위협을 받아 그간 잊고 있던 내 ‘낯가림’을 다시 일깨운 탓이다.

본래 한번 의식하고 나면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했던가? 오, 지금 내가 딱 그 상태다.

‘미, 미친. 우리 지금 너무 붙어 있는 거 같은데.’

그가 나를 붙잡고 있는 모든 부분이 전부 의식된다고나 할까. 나는 그가 눈치챌세라 딱딱하게 굳은 몸에서 자연스럽게 힘을 뺐다.

목도 남몰래 가다듬고, 대외용으로만 짓는 기계적인 미소도 빠르게 장착했다. 일단, 일단 제대로 답만 하면……!

“아, 그, 큽! 그렇, 구나아!”

아씨, 혀 깨물었어!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에 당황한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와 눈을 마주치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내 눈동자를 들킬 것만 같아서였다.

‘안 되겠다. 이게 다 너무 붙어 있어서 그래.’

사람이 숨을 쉴 공간이 좀 필요하지. 나는 아직도 내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그의 손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을 때라면 모를까, 낯가림이 다시 도진 지금은 도무지 이런 자세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바깥에서 이런, 이런 외설적인 자세를 취한단 말이야? 얇은 옷가지 너머로, 어?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냐고!

“그, 음. 공작님?”

“네, 나디아.”

“그만 놔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 이제 위험한 것도 없고 우리 갈 길도 머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겨우 쥐어짜 낸 말에도 카르테인 공작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얼굴이라도 마주하고 있으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내가 지금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이어지는 침묵이 영 어색해서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보다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를 택했다.

“뭐야. 그, 신의 분노가 터지는 정확한 시간도 우리 찾아야 하잖아요. 그래야 계획처럼 마지막에 성스러운 장면도 연출하고 그러지. 그렇죠?”

빨리 그렇다고 답해. 지금 이대로 5초만 더 있다가는 허리에 화상 입을 거 같으니까.

“…그렇죠.”

내 인내심이 떨어지기 직전에 답을 준 클로드가 잠시 손에 힘을 줬다가 스르륵 허리를 놔주었다. 으악, 됐다!

허리가 자유로워진 것을 느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웃음을 지으며 반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티가 나기 전 약간 과장된 자세로 출발을 외쳤다.

“자, 가 볼까요!”

“예. 그런데 나디아, 그 전에.”

“네?”

휙 몸을 돌려 움직이려는 나를 멈춰 세운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긴 채 나를 바라봤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의 눈썹은 평소보다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묘하게 불길한 기분에 침을 꼴깍 삼킨 그 순간,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우리 손잡고 갈까요?”

“…예?”

“왜, 싫으십니까?”

드, 들킨 거 아니겠지?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 그의 표정에 나는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제가 왜, 왜 손잡는 걸 싫어하겠어요!”

어휴, 공작님도 참. 저 그런 거 엄청 좋아해요.

호기를 잔뜩 부리는 내 반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가 조금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북부 대공이 가진 매력을 한껏 드러낸 그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가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다행입니다. 그럼, 잡으시죠.”

“…….”

쿵, 쿵, 쿵.

나는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곧고 긴 클로드의 손이 고무장갑처럼 흐느적거리는 걸 보니 시야가 울렁이는 게 분명했다.

‘근데 어떻게 해. 손잡고 그러는 거 엄청 좋아한다고 해서 물릴 수도 없고.’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쯤 되면 답답해서 먼저 손을 채 갈 법도 한데, 우리 공작님께서는 인내심도 아주 강한 분이셨다.

나처럼 내 손만 쭉 응시하던 그가 눈꺼풀을 들어서 나와 눈을 마주했다. 빨리 손을 달라는 독촉의 의미였다.

“왜, 뭔가 문제라도? 분명 그대가 시간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빨리 신의 분노를 확인하러 가야 한다고.”

“아, 음. 그, 그렇죠. 제가 확인하러 가야 한다고 했죠. 그, 갈까요?”

어딘가 떨떠름한 대답과 함께 나는 다시 찬찬히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겨우 그의 손바닥에 손끝을 올린 나는, 그가 내 손가락을 살포시 그러쥔 순간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손을 뺐다.

그것도 짧고 굵은 비명과 함께.

“끄악!”

내가, 내가 그랬잖아!

이렇게 낯을 가리다가는 공작님의 손을 잡고 경기 일으키면서 도망갈 것 같다고. 전기가 올라온 것처럼 손끝이 찌릿했다.

나는 짜릿한 손끝을 왼손으로 부여잡으며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어쩌지!’

클로드의 반응을 걱정할 여력 따위는 내게 없었다. 지금의 나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제대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친 그때 지척에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글렸다.

“어쩐지. 얼마 전부터 낌새가 이상하더니.”

“…그, 그으.”

“내 약혼자님이 도망을 치고 있었군요.”

목소리가 들린 순간 떠오른 것은, 내가 물렸던 거리보다 목소리가 훨씬 가까운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다시 거리를 좁힌 것 같은데…….

‘미치겠다, 진짜.’

지금 이 상태로도 매우 벅찬데 이를 어쩌면 좋냐.

나는 완전히 눈을 뜰 자신이 없어, 아주 살짝 실눈을 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가만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카르테인 공작의 단단한 가슴이었다.

“흐읍!”

딸꾹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삼키며, 나는 조금 더 눈을 위로 들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당연하게도 클로드 카르테인이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말이 맞습니까?”

“어…….”

듣기에는 제법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클로드의 시선은 어딘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요놈 잡았다!’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디아.”

대답을 종용하는 듯한 단호한 부름이 그의 입에서 다시 떨어졌다. 나는 거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작게 답했다.

“…예에.”

“그렇게 서슴지 않고 내 몸에 손을 대더니, 이제는 다가가기만 하면 도망치는 이유가 뭡니까.”

“…….”

“정말 싫다면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도망칠 법도 한데, 눈길 닿는 곳에는 늘 있고. 날 두고 시험이라도 하는 중인지?”

시험? 시험은 댁이 하고 있고, 이 사람아.

나는 지금도 목소리로 내 심장을 조지는 당사자의 모습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당황스러운 상황인 게 맞으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도 아니면.”

“…….”

“막상 약혼하고 나니 마음이 변했습니까?”

저걸 봐라.

‘저 사람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치고 가잖아.’

이건 불가항력이라고 인정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바닥 쪽으로 살짝 시선을 떨군 채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 신이시여.’

그에게는 진지하기 짝이 없을 상황인 걸 알지만, 도무지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보기 쉽지 않은 분위기와 눈빛이 또 다른 오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 탓이다.

‘나를 붙잡고 애원하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느낌이 들잖아.’

심지어 그의 성격상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를 담지 않고 있는 저 시선이 도리어 입술을 바짝바짝 마르게 해서, 나는 그의 팔을 잡은 채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야 말았다.

“그, 공작님. 죄송한데, 눈… 평소처럼 그냥 저 보시면 안 될까요. 그, 피하지 마시고요.”

귀여워 보이면 그땐 정말 끝이다.

차라리 평소처럼 눈을 마주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꺼낸 말에 그가 천천히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익숙한 주황색 눈을 바로 마주한 순간, 나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양손으로 그의 뺨을 밀치고야 말았다.

“으악! 아냐, 제가 잘못했어요! 보지 마세요. 그, 나랑 눈 마주치지 마!”

일순 멈췄던 숨을 다시 가쁘게 내쉬며 나는 잔뜩 울상을 지었다. 아, 진짜 미안하다. 카르테인 공작에게 너무 미안한데, 어떻게 할 방법을 모르겠다.

‘또렷하게 나만 담고 있는 주황색 눈이랑 아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단 말이야…….’

이대로면 그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 그런 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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