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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33화 (33/155)

33화

촛불에 데시데로 나뭇잎을 태우며 간절히 기도를 드리던 게일이 빤히 두 사람의 모습을 살폈다. 긴 로브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남자와 함께 온 여자는 상당히 상태가 나빠 보였다.

시체같이 창백한 피부와 가냘픈 목소리, 마른 체구.

“조금 더 제게 기대는 게 좋겠습니다.”

“하아……. 고마워요, 클로드. 아직은 조금 힘이 드네요.”

심지어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어 걸어야 할 만큼 힘겨워 보였다. 게일은 걱정이 물씬 느껴지는 남자의 눈빛을 본 순간, 그가 이곳을 매일같이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아, 사랑하는 사람이 아팠구나.’

남자가 품에 안은 이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어깨 근처에서 서성이는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꽉 쥐자니 연약해 보이는 어깨가 아플 것 같고, 힘을 빼자니 넘어질까 불안한 거겠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움찔거리던 남자가 재차 여자에게 물었다.

“나디아, 너무 힘이 들면 제가 안고 갈까요?”

“아니에요. 같이 가요. 당신과 함께 걸어서 가고 싶어요. 제 걸음이 느려도 봐줄 거죠?”

“당연한 말을.”

보는 사람이 절로 응원하게 될 정도로 힘겹게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이 천천히 영역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더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한 게일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저 모습을 보니 낮에 약초를 팔며 들었던 소문이 생각난 탓이다.

‘…신의 분노 말이야. 빨리 공작님이 회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직 아무 소식이 없으시지? 이러다 더 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 일각에서는 신전의 도움을 청하러 가자는 움직임도 있다며.’

‘아니, 근데 최근에 다른 말이 돌잖아. 그게 신께서 분노하신 게 아니라 은총을 내리신 거라고.’

‘은총?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신의 축복을 받은 이까지 쓰러지게 해서, 어? 신께서 분노하신 거 아니었냐고.’

‘아니, 알고 보니 그 신의 축복을 받은 이랑 우리 공작님이 실은 사랑하는 사이라지 않나! 그런 분이 쓰러지니까, 공작님이 기도를 올린 모양이야. 실제로 공작님이 매일같이 신의 영역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오는 걸 본 사람들이 있대! 정말 신께서 노하셨다면 그럴 수 있었겠어?’

‘에라이, 공작님이 직접 신의 영역을? 말도 안 돼.’

그때는 그게 그냥 떠도는 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게일의 입에서 혼잣말이 작게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자신은, 살면서 한 번 보기도 어려운 공작을 매일같이 보고 있었던 거다.

‘심지어 말까지 걸었지.’

게일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억울해졌다. 저렇게 신실하게 신을 믿는 북부의 주인이 악마와 소통한다는 오해를 받다니.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그의 곁에서 함께 기도를 드리던 타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게일도 그 소문 들은 거죠? 우리가 지금껏 궁금해했던 저 귀족이 공작님이었다는 그 소문. 그래서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 꺼낸 거 아니에요?”

“예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일을 바라보던 타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클로드와 나디아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니, 아마 신의 영역에서 기도드리는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했을걸요? 공작님께서 정말 애쓰시던 거 우리가 다 봤잖아요.”

“그렇지요.”

“게일, 만약 그 소문이 진짜라면요. 우리가 지금껏 신의 분노라고 부르던 물기둥이 신의 은총이라는 것도 사실일까요? 신께서 정말로 공작님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셨던 걸까요?”

간절함이 가득 담긴 타냐의 목소리에 게일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피부의 간지러움 때문에 이곳을 찾은 사람이었다면, 타냐는 다리의 통증 때문에 이곳을 찾은 사람이었다.

“전 그 소문이 진짜라고 믿어요.”

“…….”

“그래서 저는 방금 봤던 그 공작님의 약혼자님도 기적처럼 몸이 낫기를 바라요. 그럼, 정말로 신께서 두 분을 굽어살피셨다는 거고.”

거기까지 말한 타냐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쓰게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 곁에서 저도 축복의 부스러기 정도는… 바랄 수 있지 않을까요? 완치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딱 하루만이라도 다리에 통증 없이 자 보고 싶어서요.”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녀의 말을 들으며 게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게 바랐기 때문이다.

타냐도 자신도, 아주 조금이라도 이 아픔을 줄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촛불이 데시데로 나뭇잎을 다 집어삼킬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게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함께 기도하면서 지켜봐요, 우리.”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이곳을 드나들 것 같으니까. 그렇게 대화를 정리한 이들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고요히 마음을 적셨다.

* * *

“나디아, 이곳은 땅이 고르지 않으니 움직일 때 조심…….”

“…우와! 공작님, 여기 생각보다 훨씬 멋있네요!”

클로드를 따라 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나는 말로만 듣던 풍경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라던 의사 선생님의 말과 달리, 이곳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나는 여기에 생명의 조짐이 없을 줄 알았지.’

정말이다. 간헐천의 온도 때문에 주위가 다 바위로만 조성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뭐람. 낮게 자란 풀에는 색색깔의 작은 꽃들이 피어있었다.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한 바위들 틈 사이로도 이끼가 끼어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잡아챈 것은 따로 있었다. 물웅덩이, 그것도 물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깎이고 다듬어진 땅 사이에 생긴 작은 연못들이었다.

“와아…….”

나는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탄성을 내뱉으며 물웅덩이 앞에 잠시 쪼그려 앉았다. 진짜 장난 아니다. 내 눈으로 뽀얀, 하늘색의 물을 볼 수 있다니.

‘이게 뭐였더라. 물이 뭘 반사하면 이런 색이 나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반쯤 까먹어 가물가물한 지식을 떠올리던 나는 일렁이는 물의 표면에 다시금 정신을 빼앗겼다.

‘후우, 저거 만지면 분명 부들부들할 거 같아.’

왜 유독 피부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물들이 있지 않나. 딱 저게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단처럼 착, 하고 내 피부에 달라붙을 것 같은 느낌!

나는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기분을 내리누른 채 연기를 위해 뒤집어썼던 로브를 훌렁 벗었다.

냄새도 사람들의 시선도 걱정할 필요 하나 없는 깨끗한 자연에서는 이래야 할 것 같았다.

“공작님. 그 신의 분노를 보셨다는 연못, 여기서 멀어요?”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만, 무슨 일 있습니까? 어디가 아프다든가…….”

“아뇨, 그냥 일하기 전에 여기 풍경을 좀 더 만끽하고 싶어서요. 이 근방 좀 돌아다녀도 괜찮죠?”

“네. 일전에 왔을 때도 딱히 위험한 것은 보지 못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안전하다는 소리군.

나는 클로드의 허락을 뒤로한 채 신이 나 신의 영역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아, 물론 풀이 자란 곳들만 골라서 돌아다녔다. 그냥 일반적인 흙바닥은 몰라도, 물웅덩이가 있는 곳이나 돌 사이의 틈새는 물이 뜨거워 위험할 수 있으니까.

‘구경하다가 잘못해서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떻게 해.’

내 몸이 느낄 고통도 고통이지만, 실수로 화상을 입었다가는 우리가 세운 계획도 망한다.

왜냐면 지금 나와 클로드가 연기하는 게 ‘병약했으나 하루가 지날수록 건강해지는 약혼자’와 ‘약혼자에게 일어난 기적에 진심으로 감격하는 공작’이거든.

그런데 신의 응답을 받아 기도를 드리겠다고 들어갔던 사람이 더 심하게 다쳐서 나온다?

‘아주 제대로 망하는 거지.’

어쩌면 더 소문이 커질지도 모른다. 악마 때문에 타락한 두 사람이 신의 영역을 멋대로 밟아서 신이 더 분노했다고 말이야. 나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뒤로한 채, 거듭 당부하던 헤르잔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시겠습니까? 당분간은 공작저에서도 밖에서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목격자가 나올지 모르니까요. 자칫 들켰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모든 명분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되도록 저나 줄리엔이 붙어 있으려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꼭 명심해 주십시오.’

음, 정말 칼 같았지.

나는 어느 때도 철저하게 ‘병약한 콘셉트’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검지로 코를 쓱쓱 문질렀다. 손가락 위로 하얀 가루들이 쓱쓱 묻어 나왔다.

다른 게 아니고, 파리한 피부를 만들기 위해 화장품을 덧칠하고 또 덧칠해서 생긴 일이었다.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로브를 쓴 것도 이 때문이지.

‘어떻게 해도 너무 인위적으로 칠한 듯이 보였거든…….’

현대였다면 혹시 경극 배우냐고 누가 물어볼 정도다.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나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질 계획이니까.

지금이야 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면 굳은 화장품이 후드득 긁혀 나오지만, 마지막 날에는 뽀얀 맨피부를 보여줄 거다.

생각만으로도 개운한 기분에 몸을 바르르 떨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나디아.”

“엇!”

내 이름을 부른 그가 뒤에서 팔로 내 허리를 휙 낚아챘다.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짓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자, 클로드가 내 앞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앞을 보라고?’

다시 고개를 돌려 확인한 곳에는 내 머리통만 한 바위 하나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그것도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갔다면 분명 걸려서 넘어졌을 법한 위치에.

순식간에 이해된 상황에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목을 움츠렸다. 클로드의 눈에 엄격함이 서리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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