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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32화 (32/155)

32화

클로드 카르테인은 여성에게 아주 조금의 관심도 없던 주인이었다.

마수와의 전투가 잦은 북부의 상황상 만날 기회 자체가 적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만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의 주인은 북부의 주인이 아닌가. 그에게 말 한마디를 붙이고자 기다리는 여성들이 여럿이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사랑에 빠질 거라며 넘겼던 문제가 심각해진 건, 클로드 카르테인이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이후의 일이었다.

‘각하?’

‘헤르잔, 가서 물수건을 가져와. 불결하군.’

단언컨대, 헤르잔은 그런 클로드 카르테인의 모습을 처음 봤다. 씻는 것에 집착하고,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그런 모습들 말이다.

‘각하, 전대 공작 부인께서 영애들과의 티타임에 참석을…….’

‘어머니께 시간이 없다고 전해.’

‘그럼 일전에 자주 참석하셨던 사교 모임은…….’

‘아, 그것도 있었나? 앞으로는 힘들 것 같다고 백작 부인께 전달해. 약소한 선물도 잊지 말고.’

점점 예민하고 까칠해지는 주인의 태도를 헤르잔은 계속해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클로드 카르테인의 충실한 부하임과 동시에, 카르테인 공작가를 지탱할 보좌관이었으니까.

‘각하, 혹시 환각을 보시는 게 아닙니까? 손에 자꾸만 피가 묻은 것 같다거나 그런 거요. 이해합니다. 낙마 사고가 있었던 그 전쟁에서 각하는 온몸에 피를 묻히셨으니까요.’

보다 못한 그가 그런 말을 건넸을 때, 그의 주인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솔직히 이제는 잘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디아. 내기를 거는 것은 좋습니다만, 그렇게 무게 중심을 앞으로 하다가는 넘어집니다.”

이토록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주인의 표정을 보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사실이었다. 여성을 대상으로는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래서 헤르잔은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신기했다. 물론 골드게이트 가문의 차녀는 여러모로 독특한 점이 많은 사람이기는 했다.

연약한 게 눈에 보이는 몸으로 아르웬 경의 검을 버틴 것도, 지금처럼 전혀 다른 관점을 툭툭 내어놓는 것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신기한 점을 꼽자면, 헤르잔은 고민 없이 딱 하나를 고를 자신이 있었다.

“에이, 공작님이 있는데 뭘 걱정해요. 넘어지기 전에 잘 잡아주실 텐데.”

나디아 골드게이트는 그 누구도, 심지어 전대 공작 내외도 넘지 못한 주인의 선을 스스럼없이 넘나드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본인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해사하게 웃는 나디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헤르잔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답지 않게 잠시 상념에 빠졌다만, 지금은 이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공녀님.”

“네?”

“저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적절한 해결 방안이 아닌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따로 생각하신 방안이 있으신지요? 명분은, 저희가 아닌 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차분한 말을 들은 나디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여관의 상황을 재차 눈으로 훑은 후에 입을 열었다.

“명분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쪽이 신을 써먹는다면, 우리도 신을 써먹으면 되니까.”

“신을 써먹는다……?”

“아실 테지만, 소문 하나하나에 집중해서는 소문의 배후가 내미는 또 다른 변수에 대응하기가 어려워요. 우리가 해야 할 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의 토대를 흔드는 겁니다.”

‘신을 써서 토대를 흔든다’라…….

나디아의 답을 들은 헤르잔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영애께서는 치솟는 물기둥을 신의 분노가 아닌 다른 거로 바꿀 생각이시군요. 가령, 축복 같은 거로.”

“정확해요.”

“혹시 그 축복의 이유 역시도 영애로 돌릴 생각이신지요? 각하와 공녀님의 약혼 사실은 저희조차 모르고 있던 정보이니, 그 사실을 이용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제 생각이 맞습니까?”

“와…….”

작게 탄성을 지른 골드게이트 영애가 환하게 웃으며 긍정을 표현했다. 웃음에 상쾌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거로 보아, 자신의 답이 꽤 맘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헤르잔.”

“예.”

클로드 카르테인의 주의에도 다시금 상체를 기울인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소문을 하나 내주셔야겠어요.”

“어떤 소문 말씀입니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제가 아프다는 소문이요.”

헤르잔은 그제야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았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쓰러졌다는 소문과의 공통점, 신의 축복일 물기둥, 그리고 약혼.

헤르잔이 생각하기에도 이 작전은 제법 성공률이 높았다. 다소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배후를 완전히 캐내는 것에도 그 정도의 시간은 드니 말이다.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나인가.’

머릿속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과연, 잘 알겠습니다. 소문이 아르웬 경에게 닿기 전에 부디 이 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러게요.”

정말이다. 아르웬 경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면 그때는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하지만 정말, 이것으로 신의 분노가 해결된다면…….’

헤르잔은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꾹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그 역시도 마음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주인을 모실 마음 말이야.’

물론 아직은 이른 생각이었다.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새로운 주인을 모실 준비가 아니라, 골드게이트 영애가 제안해 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신의 분노를 신의 축복으로 바꾸는, 그 일 말이다.

* * *

북부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전설이 있다. 신의 영역에서 간절히 신께 기도를 드리면 아주 드물게 신이 은총을 내려준다는 전설.

그래서일까? 신의 영역 근처에는 항상 간절한 사람들이 모여들고는 했다. 게일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짧은 더벅머리에 듬직한 체격. 가업을 이어 금속만 만지고 살아오던 평범한 젊은 청년은, 위험하다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기어이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신의 영역 근처에 움집을 지었다.

매일같이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그가 바라는 소원은 단 하나였다.

‘제발, 제 피부를 낫게 해주세요. 단 하루만이라도 피부가 간지럽지 않게 해주세요.’

누군가 들으면 그런 별것도 아닌 일로 이 위험한 곳까지 왔냐고 하겠지만, 게일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북부 전역을 돌고 돌아도 그의 피부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나 주술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나티오 나무를 태워 그 잿가루를 피부에 바르시오. 그런 뒤 술에 적신 수건으로 피부를 닦으면 나아질 것이오.’

‘뜨거운 것으로 상처 부위를 지져야 해. 긁어서 피가 나니까 거기에 또 더러운 게 묻어서 가려워지는 것 아닌가. 아예 지져서 피부를 봉합해야 하네. 그래야 나쁜 것이 더 침투를 하지 않아.’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보았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흉터로 흉측해진 몸과 여전히 가려운 피부뿐이었다.

남은 희망이라고는 신에게 일말의 자비를 바라는 것밖에 없던 그는, 정말로 신실하게 신의 영역을 밟았다.

흉흉한 ‘신의 분노’가 터졌을 때도 신의 영역에 머물던 이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리어 간절한 이들이 더 많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잃을 것 하나 없는 그들에게 ‘신의 분노’란 신이 이곳을 굽어살피고 있다는 일종의 증표와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저의 소원에 응답해 주세요.’

‘제게도 잘못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게일의 일과는 늘 같았다. 아침에 기도를 드리고 채집을 나갔다가 다시 해가 지는 저녁이면 영역의 입구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

계절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 곳에서, 게일이 최근 보았던 변화는 단 하나였다.

‘어, 그, 저기! 신관님이 없이는 신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요…….’

‘아니, 아무것도. 걱정해 줘서 고맙다.’

두렵지도 않은지 영역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온 이상한 사람의 등장. 그때는 그냥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더는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들어갔다 나오겠습니다.”

“아니, 일전에 내가 생각했던 게 맞았다. 이건 분명 신께서 내게 내린 기회이자 응답이야. 내가 직접 이 시련을 버텨야 한다.”

또다.

게일의 시선이 함께 온 사람을 뿌리치는 남성에게로 닿았다.

두 번째 방문 때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영역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남자는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신의 영역을 찾았다.

그러고는 게일이 매일 신께 기도를 드리듯,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영역의 안쪽을 밟았다.

그건 거의 고행을 버티는 사도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신의 영역을 밟으면 밟을수록, 남자의 몰골이 점점 초췌해져 갔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표정만은 정말 세상을 얻은 듯이 환해서, 게일은 이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점점 관심이 갔다.

‘뭘까.’

그 사람이 그토록 힘겹게, 매일같이 통에 담아 오던 것은. 그리고 신께서 응답과 기회를 내려주셨다는 그 말이 진짜일까? 진짜라면, 그는 도대체 무슨 기회를 받은 걸까?

아주 오랫동안 갈급했던 사람들은 작지만 특이한 이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단순히 남자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던 게일은 이제 저 이상한 남자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그건 간절함을 가진 사람으로서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었다.

‘저렇게 귀해 보이는 이도 해결하지 못한 소원은 무엇일까?’

‘대관절 어떤 간절한 소원이기에 신께서는 기회를 주신 걸까?’

날이 갈수록 높아지던 궁금증이 딱 절정에 달했을 때쯤, 남자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디아, 다시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영역의 안쪽은 정말 위험해요.”

“아니에요, 클로드. 당신 덕분에 그래도 이렇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걸요. 저도 함께 신께 기도를 드려야지요.”

함께하는 일행에 변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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