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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31화 (31/155)

31화

쿵!

갑작스레 울린 굉음에 시끌벅적하던 식당이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마저 사라진 공간 속에서 어딘가 상기된 얼굴을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북부에 위험이 닥치고 있어.”

“…….”

“그간 조용히 돌았던 그 ‘집착’에 대한 소문이 다 맞았던 거야! 수호자인 공작 각하께서 악마에게 단단히 세뇌를 당하신 거지.”

침을 튀길 정도로 열정적인 목소리에 식사를 즐기던 몇 사람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멈칫한 주인장에게 말을 걸었다.

“저놈은 뭐야? 이봐, 주인장. 단상에 웬 미친놈이……!”

“근래 들어 불길한 일 벌어진 것 없나? 들어봤지? 저 멀리 신성한 신의 영역에서 뜨거운 물기둥이 치솟았다는 거! 신의 분노가 곧 나단까지 집어삼킬 거라고!”

그게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나단에 퍼진 소문을 콕 짚은 남자의 뒤를 이어 단상의 아래쪽에서 동조하는 이들이 말을 보탰다.

“맞아! 우리 애도 신의 분노가 터진 뒤로 아팠다고! 태어날 때부터 건강해서 지금껏 감기 한번 걸린 적이 없는 애인데!”

순식간에 해괴한 사람을 보듯 손가락질하던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확하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이들이 입을 다물자, ‘방해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뚜렷해졌다.

“하필 부요의 시기인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악마의 수작으로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아가씨도 쓰러졌다면서요?”

“신의 영역 근처의 마을에서는 부글거리는 연못들이 생겨서 제대로 약초 채집도 못 한다지?”

부정적인 말은 언제나 긍정의 말보다 힘이 세다. 그것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것 같은 불행이라면 더욱더.

나는 순식간에 소문이 여관을 휩쓰는 것을 지켜보며 힐끗 클로드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진짜가 아니라 해도, 본인을 대상으로 한 소문이 도는 건데 괜찮은 건가 싶어서.

‘나라면 화나서 목 뒤를 부여잡았어. 아니면 엄청 상처받거나.’

물론 그는 나와 다르지만, 그래도 속상하지 않나. 못한 것도 아니고 열심히 싸우기까지 했는데 이런 소리 들으면.

‘내가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된 거 같고.’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살핀 클로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무감하게 군중을 담고 있는 주황색 눈과 얼핏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손동작.

클로드 카르테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북부 대공 같았다. 그의 표정이 바뀐 건 그가 내 시선을 눈치챈 후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목욕이 걸린 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눈을 마주친 순간 심장이 덜컥거렸다.

‘계약 결혼이나 원작 여주의 대역, 이런 걸 입에 달고 살던 여자 주인공들이 왜 홀라당 사랑에 빠지는지 알겠네.’

서늘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던 사람이 자신을 본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면 그 누가 안 떨리겠어. 그것도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나는 살짝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기까지 한 클로드 카르테인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그냥, 공작님이 좀 걱정돼서요.”

“그렇습니까.”

“거지 같은 말들이 거슬리면 꼭 말해요.”

내 말을 들은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거슬린다 하면 손으로 귀라도 막아주실 겁니까?”

“손으로…는 생각 안 했는데요. 임시 귀마개라도 만들어 드릴까 했죠.”

당황해 손을 내젓는 내 모습에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목을 울려 웃었다. 그때였다.

“그, 그럼 큰일 난 거 아니야? 어떻게 해야 신의 분노가 가라앉는데?”

조성된 공포에 휩싸인 사람 하나가 툭 말을 꺼낸 것을 기점으로, 조금씩 고조되고 있던 ‘방해자’들의 논의가 딱 절정을 찍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 그들이 해결 방안이라 주장하는 것들이 드디어 하나둘씩 튀어나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공작님이 악마와의 교감을 끊어야지!”

“맞아. 신께서 분노를 가라앉히실 때까지 용서를 구해야 해!”

“신전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생각하네! 이러다 북부 전역의 물이 끓어올라 불바다가 되면 어쩌나!”

허무맹랑한 말을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아, 난리 났다. 난리 났어.

북부 전역의 물이 끓어오를 정도면 그냥 이번 생을 포기하는 게 낫다. 그 말은 북부 전체가 전부 화산 지대에 속한다는 거니까. 그것도 활발히 활동하는 화산 지대.

‘아주 그냥 팔팔 끓다가 터지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래. 로맨스 판타지 세계가 멸망하는 것도 참 볼만하겠어.’

그럼 이제 소설 하나 더 써야 한다. 대충 ‘로판 빙의인 줄 알았는데 장르가 이상합니다’ 같은 그런 거로. 키워드에는 아포칼립스물을 꼭 넣어줘야 한다.

‘진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저런 거로 겨우 얻은 내 청결한 생활을 방해받아야 해?’

나는 잔까지 들어 올리며 북부를 수호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다.

‘이야, 사람이 정말 분노에 차면 웃음이 난다는 말을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속을 가라앉히며 주위를 살펴보니, 조사관 몇 명이 욱해서 일어나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게 보였다. 주동자를 잡아야 한다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혈질인 게 빤히 보이는 조사원을 보며 고개를 내젓고 있을 찰나, 그 근처에 있던 남자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챘다.

‘뭐지.’

소란의 한가운데 끼어 있는 남자는 분명 주위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술잔을 마주치고 음식을 먹고, 가끔 이야기에 말을 얹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 눈에는 저 사람이 묘하게 고요해 보였다. 그래서였을 거다. 그 사람이 한 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만약, 공작님께서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요?”

남자가 흘린 주제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람 지금…….

“뭐?! 공작님이 용서를 빌지 않으시면 어쩌냐고? 북부의 주인이 그러실 리가 있나!”

“아무렴, 전대 공작님의 핏줄을 이은 분인데! 대전쟁의 영웅! 어? 우리 목소리를 들으면 끝끝내 나서서 해결해 줄 걸세! 정 상황이 심각하면 전대 공작께서 각하를……!”

탕!

“작작들 해! 술 마시고 못 하는 말이 없구먼! 지금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믿는 건가?”

“어어? 지금 내 멱살 잡았냐? 그럼 저 물기둥은 뭔데! 눈에 보이는 증거가 뚜렷하잖아! 이익!”

여관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분위기에 따라 한두 잔씩 마시던 술은 이성을 마비시켰고, 마비된 이성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더 강하게 믿게 했다.

그리고 몸싸움이 일어나 어수선해진 그 틈을 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간다.’

이렇게 소란을 일으키고 자기는 조용히 자리를 뜬다고? 어디선가 싸한 기분이 정수리를 지나 허리를 쭉 타고 내렸다.

‘나 지금 선동과 날조의 현장을 직접 본 거지?’

나는 물 흐르듯 사라지려는 남자의 모습에 급하게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만 달싹여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클로드, 헤르잔. 저 사람. 지금 나가는 저, 저……!”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주근깨가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 말이군요. 들어올 때는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안경을 벗어서 확인해 두었지요.”

그건 또 언제 알았대?

나는 기다렸다는 대략적인 인상착의를 말하는 헤르잔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반 정도는 커졌을 게 분명한 내 눈을 마주하며 헤르잔이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문제라도?”

“아, 아뇨.”

“다행이군요. 저 사람을 추적할까요?”

“어, 네…….”

헤르잔은 어렵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디론가 수신호를 보냈다. 신기하다, 정말.

‘저 정도의 눈썰미는 있어야 보좌관을 하는구나.’

범상치 않은 헤르잔의 모습에 남몰래 혀를 내두르고 있던 순간, 헤르잔이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기하군요.”

“네, 네?”

“공녀님이요.”

알쏭달쏭한 말을 꺼낸 헤르잔은 그 뒤로도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잘 듣지는 못했다만, 내가 들으면 간지러울 그런 말인 듯했다.

왜, 있지 않나. 과연 각하께서 선택한 사람이다 뭐다, 그런 말들 같은 거.

‘저 남자는 그냥 얻어걸린 건데.’

흔히들 우연이라고 하지. 하지만 그마저도 어쩐지 빙의자의 특혜 같아서 나는 도르르 눈을 굴렸다. 멋쩍은 기분에서 나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클로드였다.

“나디아, 그래서 필요한 정보와 해결에 대한 실마리는 찾은 겁니까?”

“아, 네. 그럼요!”

나는 방긋 웃었다. 저쪽이 먼저 선동과 날조로 싸움을 걸지 않았나. 그럼 해결할 방법은 당연히 하나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 어디 한번 정정당당한 선동과 날조가 뭔지 보여주자고.

* * *

“나디아, 그래서 필요한 정보와 해결에 대한 실마리는 찾은 겁니까?”

“아, 네. 그럼요!”

당당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헤르잔이 가만히 눈앞의 여인을 응시했다. 보닛 사이로 슬쩍 삐져나온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유독 반짝여 보였다.

남들이 들을세라 눈을 굴려 주위를 살핀 그녀가 살짝 상체를 숙이고는 작게 속닥였다.

“우선 저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건 절대 해결 방안이 될 수 없어요. 그 물기둥은 앞으로도 계속 터질 거거든요.”

“…….”

거기까지 말한 골드게이트 가문의 영애는 잠시 그와 그의 주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눈빛으로 냉정한 말을 내뱉었다.

“공작님이 목욕을 그만두고 몇 년 동안 무릎 꿇고 빌어도, 아주 극단적으로 공작님이 신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작위를 내려놓으셔도 그건 계속 치솟을 거예요. 내기해도 좋아요.”

확고함을 담아 올라간 입꼬리와 당당함이 느껴지는 자세. 작달막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를 고스란히 느끼며 헤르잔은 재차 생각했다.

‘정말이지 신기하군.’

대체 어디에서 이런 사람이 툭, 하고 튀어나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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