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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28화 (28/155)

28화

나는 제법 객관적으로 자신을 분석하며 나단을 둘러보자는 공작의 제안에 긍정했다. 휴,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속은 몰라도 입 밖으로 내뱉는 말투는 말짱해서.

“공작님 추천으로 다니는 거면 안 좋은 곳이 없을 것 같은데요? 아, 참고용으로 말하는 건데 저 옷은 여자 친구들하고만 보러 가요. 음, 애초에 살롱은 되도록 이용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살롱을 되도록 이용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만, 영애들하고만 보러 가는 이유는 뭡니까?”

“따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굳이 꼽자면 그게 더 구경할 맛이 나서? 예쁜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라주면 기분 좋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하던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무슨 말을 꺼낼지 딱 보이네, 보여.

나는 그가 말을 뱉기도 전에 먼저 그의 말을 부정했다.

“으응, 아니에요. 잘생겨도 공작님은 옷 친구 탈락입니다. 내가 공작님 얼굴을 좋아하는 것과 옷걸이가 좋은 건 다른 문제거든요.”

포크를 까닥이며 꺼낸 말에 공작이 짧게 웃음을 흘리며 탁자에 놓인 물컵을 들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잔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빠르게 내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앗, 괜히 봤다.

제법 말을 주고받는 게 자연스러워서 이제 좀 괜찮아졌나 했는데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니 그, 뭐야. 그… 가슴이 이상야릇하게 조이는 게……. 아, 역시 기분이 이상하다. 이걸 진짜 어째야 하나.

‘확 뽀뽀부터 해야 하나.’

왜, 확 바뀐 사람을 보고 180도 바뀌었다고 말하지 않나. 거기서 다시 180도를 돌리면 제자리니까, 나도 한 번 더 크게 일을 치르면 전과 엇비슷한 눈으로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이러다가는 공작이 손을 잡으면 경기를 일으키면서 도망칠 것 같단 말이야.’

점점 심각해지는 증상을 두고 당장 있을 저녁 데이트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가 식당의 문을 열고는 빠르게 걸어 들어왔다.

은색 테의 깔끔한 안경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얇은 입술, 지성으로 가득 찬 눈빛. 외모로만 보면 딱 지난밤 클로드의 입에서 여러 번 언급됐던 보좌관 같은 인상의 사람인데…….

“각하, 말씀하셨던 조사 시각을 조금 더 당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네.

나는 잔뜩 심각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을 살피며 가볍게 클로드 카르테인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 보좌관이 ‘조사’를 입에 담을 사항은 신의 분노 딱 하나인데, 그마저도 시간을 당겨야 한다고 하는 건…….

“신의 분노와 관련된 집단적 움직임 같은 거라도 생겼나?”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문장에 카르테인 공작만을 오매불망 바라보던 이가 휙 나를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살짝 커진 게 보였다.

나는 내 포크질로 너덜너덜해진 스테이크를 한 번 바라보고는 무릎에 얹었던 냅킨을 식탁 위로 올렸다. 클로드 역시 여유로움을 챙긴 움직임으로 식사를 정리하고는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사에 합류하실 생각입니까?”

“아, 그거 정말 그래도 되나요?”

“당연한 말을. 애초에 도와달라 손을 내민 건 제가 아닙니까.”

그대는 이제 약혼자라는 자격을 얻기도 했고. 나는 행간에서 생략된 그의 말을 읽어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저 잠시 방에서 챙겨 올 게 있어요.”

당장 이렇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어제 적은 종이를 방에 두고 왔다. 거리낌 없는 내 태도에 보좌관이 다시 고개를 돌려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각하.”

미간에 주름이 진 것으로 보아, 그는 지금의 상황이 퍽 우려스러운 모양이었다.

‘음, 당연한 거지만.’

저 사람이 봤을 땐 공작가와 아무 상관 없는 내가 가문의 일에 막 끼어드는 것같이 보일 거 아닌가. 갑자기 부외자가 끼면 좀 그렇지. 그것도 무려 ‘공작’을 겨냥한 민감한 문제에.

보좌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문제는 본래 집주인이 해결하는 거니까.

‘힘내라, 내 약혼자!’

이런 일 정도는 가뿐하게 해결 해야 점차 대륙을 누빌 선진 청결 기업의 공동 대표를 시켜주지 않겠나. 나는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방의 서랍에 고이 넣어둔 종이를 챙겼다.

대체 어디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건지, 짠 하고 나타난 줄리엔에게 옷도 받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너무 무난하다나? 공작님과 조사단이 입을 옷과 얼추 비슷한 격으로 맞춰주어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나선 조삿길은 시작부터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의견을 모으느라 아직 공작가의 앞마당을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지금 이건 기강의 문제라니까? 수작질이라고! 이 자리를 감당할 사람이 각하밖에 없으니, 직접 반란을 저지르지는 못하고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애를 쓰는 거야.”

“거참, 애당초 이렇게 커질 일도 아니었어. 각하께서 신전이 나설 일이 아닌 걸 확인하셨다며? 그럼 그냥 신이 분노를 내린 거라느니 뭐라느니,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을 떠벌린 자식들을 찾아 모조리 족치면 돼.”

“자네는 이게 무슨 마수 사냥인 줄 아는가? 사람을 모조리 족치게?”

―바스락.

“응?”

눈치 없이 발소리를 낸 탓에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단박에 내게 몰렸다.

“그,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나는 회의 시간에 늦은 팀원처럼 조심스럽게 눈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카르테인 공작의 옆으로 다가갔다.

너는 누구길래 그리로 가느냐는 의문에 가득 찬 시선이 나를 좇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사람 좋게 방긋 웃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갑자기 분위기를 다 가르면서 자기소개를 할 수는 없잖아.

“큼, 크큼! 뭐, 일단 다시 조사에 대한 대화로 돌아가면 일단은 조직적인 움직임이 생긴 이상 그치들이 원하는 거나 속셈을 좀 들어봐야 한다는 거야. 어떻게든 처음 시작한 자를 찾아 일벌백계를 한다 해도, 우선은 일을 정리해야 하니까. 시간을 놓치면 공작가는 물론이고 황후 폐하께 영향이 가네.”

“그래, 특히나 이번에는 폐하께서 임의로 순회의 순서까지 바꾸시지 않았나. 가장 마지막에 들러야 하는 나단을 제일 먼저 들러 부요의 축복을 주셨는데, 신이 분노했다는 소문이 이것과 엮이면 그땐 정말 일이 커진다고.”

나는 점점 커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카르테인 공작의 팔을 툭툭 쳤다.

“내가 뭘 놓쳤어요? 다른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니, 딱히. 그저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이 집단적 움직임을 어떤 방향으로 대할지에 따라 조사에서 얻어야 하는 정보들이 달라지니 말입니다.”

“아하.”

다 좋은데, 너무 가까워.

나는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숨결에 슬금슬금 몸을 빼며 남몰래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아, 냄새 뭐 이런 거 때문은 아니다. 카르테인 공작은 내가 선물로 준 치약을 유용하게 쓰고 있었으니까. 대신 심장이 떨려서 죽겠다.

‘내용, 내용에 집중해. 나디아. 조사 방향성을 정한다잖아.’

내가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던 그때, 누군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각하, 조금 전부터 여쭙고 싶었는데 골드게이트 영애는 왜 여기에 있습니까?”

지극히 타당한 그의 질문에 클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대들이 말하던 게 정리되면 그때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잘됐군.”

자신에게 쏠린 여러 쌍의 눈동자를 마주한 클로드가 태연한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대꾸했다.

“내가 약혼을 했거든.”

마치 어젯밤의 저녁 메뉴를 말하는 듯한 어투에, 질문을 던진 이가 눈을 끔벅 감았다 떴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한 번 긁기까지 했다.

느릿하게 클로드의 문장을 곱씹은 그가 손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예에? 각하께서, 약혼을요? 누구랑……?”

“아, 저랑요.”

발랄하게 손을 들자 정원이 일순 고요해졌다. 나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 무려 어젯밤에 약혼자가 된 나디아 골드게이트입니다.

내가 수줍게 속눈썹을 팔랑이거나 말거나 침묵에 휩싸였던 이들이 다시금 제 목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이 유례없는 상황에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저렇게 갑작스럽게 약혼을 진행해도 되는 건가?”

“골드게이트 영애면 그, 얼마 전에 아르웬 기사단장에게 도전했던 영애이지 않나. 그게 각하와 함께 있고 싶어서다 아니다, 말이 많았는데……. 사실이었나 보군.”

“뭐야? 그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난 왜 몰랐지? 자넨 뭘 했나. 나 안 부르고.”

분위기 파악 못 하는 한 사람을 노려본 이들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와 클로드를 힐끗 보곤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각하께서 워낙 누구도 안 만나시고, 또 그 성격의 변화도 있으셔서 전대 공작 내외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알아서 짝을 찾았으니 좋은 거지.”

“이 사람아, 그분들의 허락도 아직 안 받지 않았나. 으잉? 허락을 받고 약혼을 하는 거랑 아닌 거랑 같아? 이러다 전대 공작 내외분이 허락 못 하시겠다 하면, 골드게이트 영애는 뭐가 되느냔 말이야.”

“뭐가 되긴. 그냥 차인 사람이 되는 거지. 약혼 깨지는 게 뭔 흠이라고.”

사담과 논의, 그 사이 어딘가를 맴도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관심이 갔다. 남의 이야기에도 절로 귀가 열리는 판에, 그 대상이 나라니 얼마나 솔깃하겠어.

만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찰나, 식당으로 클로드 카르테인을 찾으러 왔던 보좌관이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클로드가 이야기를 정리하려던 딱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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