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래요. 좋아요, 공작님. 우리 이렇게 된 김에 다 터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사람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가장 자주 봤던 장면을 따라 한다고 했던가? 나는 근처에 굴러다니던 펜을 손가락에 끼운 채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발표 내내 딴짓을 하던 팀장님이 회의가 끝날 때쯤 요점 정리를 요청하며 취하는 자세였다.
“제안이라면 그때 청혼을 말하는 거죠?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헛소리라고 했잖아요. 저를 그냥 영애 1 정도로 생각하고 계셨던 거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신 거예요?”
“…갑자기?”
부릅뜬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내가 한 말을 따라 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라…….”
눈꺼풀 아래로 공작의 주황색 눈동자가 사라졌다 다시 드러났다.
고민을 머금은 듯 일자 모양으로 굳어졌던 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딘가 고르고 고른 듯한 목소리였다.
“갑자기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내가 말을 되묻기도 전, 숨을 살짝 머금은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기 고양이 같은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어도 영애가 쓰러졌을 때 그대의 푸른 눈을 빨리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랐던 건 맞는다. 공무 중에 그대라면 어떤 말을 할지 영애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기도 했지.”
“…….”
“이걸 갑작스럽다고 해도 되는 건가? 어쩌면 그냥 머리가 몸보다 느렸던 걸지도 모르지.”
“…그, 어……?”
“…그래, 그런 거군. 나는 영애가 내 유일무이한 이해자가 된 그 순간부터 그대를 특별하게 여긴 거다.”
클로드가 내뱉은 말은 분명 내 질문에 대한 답이었으나 동시에 어딘가 독백에 가까웠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한 손으로 입 근처를 가리던 그가 일순 눈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영애도 내게 이유 없는 다정함을 운운했던 것 아닌가?”
그건 확신에 아주 가까운 말이었다. 내가 그렇다고 한마디만 내뱉는다면 나에게도 그에게도 진실이 될 그런 말.
나는 ‘그건 그런데’만 무한 재생하는 입을 꾹 닫은 채 눈을 도르르 굴렸다. 어딘가 기이한 열기가 서린 공작의 주황색 눈동자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꼭 그가 내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였다.
대답 없는 내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던 그가 가볍게 주먹을 쥐다 역으로 내게 질문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그대에게 묻지. 그때 그 사랑 고백은 목욕 때문이라 치고, 지금의 영애는 나를 사랑하나?”
“…그으…음.”
“참고로 이렇게 된 김에 터놓고 말하자고 한 건 영애였다.”
그게 다짜고짜 고백하겠다는 뜻은 아니었거든요! 나는 포장된 말은 기각하겠다는 그의 단호한 의지에 질끈 눈을 감았다. 나도 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걸.
‘왜, 왜 아기 고양이 따위 이야기를 꺼내 가지고! 그냥 온천의 기쁨만 나눈 채 방으로 갈걸!’
나는 과거의 내 결정을 후회하며 입 안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분명 지금 눈을 뜨면 태양을 닮은 선명한 주황색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올 테지.
갑작스럽게 내게로 돌아온 화살에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즈음, 머리 바로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디아?”
이런 오묘한 분위기를 너무 오랜만에 마주해서일까?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목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열감을 느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서두를 뗐다.
“…려요…….”
“안 들리는데.”
“사랑까지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끌린다고요! 선명한 주황색 눈도, 깊은 목소리도, 단단한 몸이랑 크고 따뜻한 손도, 안 그런 척하면서 대놓고 다정한 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맘에 안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마음이 가요!”
“…….”
“…이, 이제 됐어요?”
쥐어짜듯 내뱉은 고백은 거의 발악과도 같았다. 나는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있는 패를 모두 까고 나니 뒤늦은 창피함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 그냥, 그냥 좀 덜 솔직하게 말할걸.’
대체 어쩌자고 공작의 말에 곧이곧대로 대답한 거지? 첫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청소년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미 끝난 상황에 속으로 주먹을 날리고 있던 찰나, 머리 위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창피해하던 것도 잊고 따라 웃을 만큼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공작이 웃음기가 남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렇다.”
되물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그러쥔 그가 조금 더 가까이 상체를 당긴 채 나와 눈을 맞췄다.
“생동감이 넘치는 푸른 눈이, 맑은 웃음이, 솔직한 말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애의 모든 구석이 다 아름다워서 눈이 갔어.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하면서 정말 이게 고백이 아니라고요.”
“헷갈리니까. 이게 그대에 대한 ‘사랑’인 건지, 갑작스럽게 만난 행운에 취한 건지.”
“그게 중요해요?”
“내게는 중요해.”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외치는 사람이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한다니.
‘클로드 카르테인이라는 사람을 몰랐다면 지금 나랑 장난하냐고 멱살을 잡았을 텐데.’
하는 수 없지. 북부 대공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봐주는 수밖에. 작게 한숨을 쉬며 울렁이는 기분을 정리하려던 그때였다.
“그래서 약혼을 하고 싶은 거다. 그대와.”
갑작스러운 흐름에 잊고 있던 주제가 예고도 없이 다시금 나를 흔들었다. 더 정확하게는 교묘하게 유혹을 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내 숨을 앗아 간 거지만.
“그대가 알려준 방법 아닌가.”
“…….”
“확실하지 않을 땐, 마음이 진행될 때까지 상대와 더 깊게 얽혀야 한다고. 약혼은 그런 의미에서 그대와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나는 살짝 휘어진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멈췄다. 아니, 내가 공작저에 체류 허락을 받으며 한 말이 저렇게 노골적인 말이었다고?
“아니, 그게… 그게……!”
원형 따위 눈 씻고 봐도 없는 말에 내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찰나,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내게 물었다.
“이런 이유로 약혼을 청하면 기분 나쁜가?”
우수가 서린 듯한 눈빛, 부드러워 보이는 회갈색 머리카락,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
나도 안다. 이 모든 건 그냥 밤과 촛불과 고된 여정 때문에 생긴 착각이라는 걸.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요망하다.’
아니, 정말로 이 단어 말고는 클로드 카르테인을 표현할 말이 없었다. 저거, 배 갈라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안에 여우 백 마리 정도 살고 있는 거 아니냐고.
나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꼭 부여잡은 채 그를 가만히 노려봤다. 이, 이…….
“이… 기만자.”
“기만자? 내가?”
“내가 기분 나빠 하지 않을 거 알고 말한 거잖아요, 그거.”
괜스레 톡 쏘아붙인 말에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채 그제야 입꼬리를 당겼다.
“지는 싸움은 해본 적이 없어서.”
“허…….”
“그래도 칼자루는 영애에게 있다.”
칼자루 같은 소리 하네.
나는 한 번 더 지그시 그를 노려보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웃긴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말할게요.”
“그래.”
“약혼이나 이성적인 관계로 서로를 묶지 않아도 나와 공작님은 같은 걸 공유하는 이해자로서 평생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겠지.”
공작의 담백한 대답을 들으며 나는 대담하게 양손을 뻗어 그의 양 볼을 감싸 내 쪽으로 당겼다.
얌전히 얼굴을 내어주는 모습에 또다시 뱃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괜찮다. 이 정도의 간질거림은 무시할 수 있어.
“부정하지 않아요. 설레고, 좋고 그래요. 그래서 솔직히 공작님 약혼 덥석 받고 이것저것 하는 것도 생각했는데…….”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나는 살짝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이것저것 해도 그, 저는 공작님을 대신해서 죽고 그런 거 못 해요.”
솔직히 그런 사랑이 진짜 있나 싶긴 한데 혹시 모르잖아! 여긴 로판 세상이고, 난 소설에서 서로 목숨 거는 세기의 사랑만 봐왔다고.
내 말을 듣고 있던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런 건 나도 원치 않는다. 아기 고양이부터 대신 죽는 것까지, 대체 영애는 무슨 연애를 겪거나 봐온 거지?”
아, 역시 그 정도는 아니야? 나는 멋쩍어지는 기분에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진짜,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아무리 약혼이어도 공작님 위치상 쉽게 무르기 어렵잖아요. 으음. 뭐, 이것도 대뜸 청혼부터 날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가볍게 말했지만 진지함이 담긴 내 물음에, 카르테인 공작이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내 손등 위로 손을 포갰다.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온기에 어쩌지 못할 묘한 기분이 피어날 즈음,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영애, 나는 제법 욕심이 많고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대라는 존재가 나를 신의 분노 앞에서도 당당하게 했지.”
“…….”
“그걸 안 순간, 나는 이 특별함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아졌다.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손깍지를 끼고, 오롯이 내 곁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사랑’ 하나 입에 담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주황색의 눈에 잠시 깊은 감정이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았다.
“그러니 진짜, 정말 괜찮냐는 말은 내가 아니라 영애에게 물어야지.”
나를 생각해 주는 듯한 말과 달리 클로드의 손이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내 손을 옭아맸다.
“절차에 맞추어 다시 요청도 할 거고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것 또한 얼마든지 영애의 마음이지만, 나는 은근히 참을성도 부족한 사람이라서 정식으로 말은 하고 싶군.”
촛불이 일렁이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그가 천천히 깍지를 낀 손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 부디 저와 미래를 기약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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