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이작의 말을 들은 클로드가 자신의 허벅지를 검지로 툭 쳤다.
‘의도적으로 꺼낸 말인가, 눈치가 없는 자인가.’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매한가지다만. 클로드는 지난 일 이후로 바닥을 쳤던 그에 대한 인상을 땅속 깊숙이 내리꽂았다.
제 손에 쥐어진 침묵을 잠시 굴리던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그를 겪어보지 못한 외지인이 보기에는 퍽 ‘자비롭게’ 보이는 미소였다.
“나디아에게 가는 길인가? 그렇다면 같이 가는 게 좋겠군. 주치의인 그대의 진료를 직접 보면 마음이 한결 낫겠어.”
“네?”
“아, 공작령의 문제만큼 그녀가 걱정되어서 말이야. 그대도 알겠지만 나디아는 여러모로 내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서.”
“…….”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이작 달튼에게서 무언가를 직감한 클로드는 여유로움을 드러내는 말로 조용히 말의 덫을 놓았다. 그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채로.
“…아닙니다. 가시죠.”
클로드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그의 말에 답하고는 나디아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아이작 달튼이 그녀를 진료하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주는 모습부터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손을 잡은 채 주사를 놓는 모습까지 전부.
“저, 각하. 헤르잔 님이 이제는 움직이셔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그를 기다리다 못한 헤르잔이 두 번째 사람을 보낸 후에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었는데 아쉽군. 자작, 나디아의 상태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이젠 공녀님의 몫이지요.”
“그런가.”
깊게 잠에 빠진 듯한 나디아를 잠시 응시한 클로드가 부드러운 손길로 나디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나디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딱 아이작 달튼이 주사를 놓으며 엄지로 지분거렸던 그 부위였다.
“달튼 자작, 부탁 하나 하지.”
“예, 각하.”
평온한 대답과 달리 아이작 달튼의 눈빛에는 온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눈빛을 모른 척한 채 클로드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나디아가 나를 찾거든, 언제든 집무실을 사용해도 된다고 말해주도록.”
“…집무실, 말씀입니까?”
“그래. 그렇게만 말해도 알 거야. 그건 그녀와 나 사이의 약속이거든.”
아이작이 그랬듯 잠시 말을 멈춘 클로드가 다시 한번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자작이 주치의로 최선을 다하리라 믿네.”
아주 당연하게도, 클로드 카르테인의 시선은 아이작 달튼에게 박혀 있었다.
* * *
아이작 달튼에게 쐐기를 박은 지 불과 몇 시간 후.
‘역시 주치의인 자작을 믿는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 걸 그랬나.’
나단을 벗어나 신의 영역으로 말을 몰던 클로드 카르테인은 아주 드물게도 자신이 내렸던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 그의 직업적인 능력을 치켜세우지 말 걸 그랬다.
그랬다면 다른 의사를 그녀의 곁에 한 명 더 붙여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충 나디아 골드게이트는 귀빈이니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이유 같은 거로.
‘그럼 적어도 달튼 자작 혼자 그녀 곁에 종일 붙어 있는 일은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그림에 클로드가 무의식적으로 꾹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제가 이러는 꼴이 퍽 꼴사납고 웃긴다는 것을.
‘심지어 유치하기까지 하지.’
하지만 드물게도 이성보다 먼저 감정이 아우성을 쳤다.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다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속내에 클로드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웃기는군.’
그녀와 얽히면 늘 평소의 자신이 아니게 되는 기분이었다. 제어되지 않는 야생마를 탄 그런 기분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중요한 문제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각하.”
점점 길어지는 상념에 그가 가볍게 생각을 털어내려던 찰나, 곁에서 함께 말을 달리던 헤르잔이 불쑥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전방을 가리켰다.
“곧 신의 영역입니다.”
보고와 흔적을 따라 도착한 신의 영역은 그가 그간 보아왔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꽤 많은 숫자의 사람이었다.
숲 사이사이로 허름하지만 작은 움막까지 있다는 걸 확인한 클로드가 눈썹을 살짝 밀어 올렸다.
“사람이 늘었군.”
“…소문의 범위가 예상보다 넓다는 말이 되겠군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간절한 이들에게 신의 영역은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 외부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겠지.
“들어가지.”
클로드는 신의 영역에서 일어난 유의미한 변화를 눈에 담으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신령한 곳이라고 불리는, 신의 영역의 안쪽.
그에게 분노했다는 신이 거하는 곳이지만, 클로드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때였다.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투박한 목소리 하나가 클로드의 발을 잡았다.
“어, 그, 저기! 신관님이 없이는 신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지, 기껏 그를 잡은 남자의 눈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막상 붙잡고 나서 보니 행색이나 기백이 쉽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되는 이들 같아 보였던 탓이다.
혹시 큰일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싶어 몇 번이고 클로드의 눈치를 살핀 그가 꽉 막힌 목 너머로 겨우 침을 삼켰다.
“그…….”
“할 말이 있다면 말해도 괜찮다.”
그렇게 말하고는 맘에 안 들면 목을 쓱싹 해버리는 건 아니겠지?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감에 목을 움츠리던 남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어물거렸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제단이 있는 곳인데… 거긴 신이 임하시는 곳이라 신이 허락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노여움을 살 수도 있고 또, 그. 위험해서…….”
“신이 허락한 자.”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은 클로드가 느릿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쩌면 신의 분노 자체가 허락일지도 모르겠군.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을 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 예?”
“아니, 아무것도. 걱정해 줘서 고맙다.”
“아, 아닙니다.”
클로드의 읊조림에 잠시 움찔했던 남자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가 작게 내뱉었던 혼잣말 중에 어째서인지 익숙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잘못 들었나?’
남자가 간지러운 제 피부를 살짝 긁으며 눈을 깜박였다. 방금 신의 분노가 허락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아마 자신이 잘못 들었을 것이다.
‘신께서 분노하신 게 어떻게 허락받은 게 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너무 긴장했던 탓이라며 생각을 지운 남자가 다시금 몸을 돌려 촛불 앞으로 양손을 모았다.
한편, 졸지에 ‘이상한 사람’이 된 클로드는 헤르잔과 함께 영역의 안쪽을 살폈다. 신이 임한다는 신령한 장소는 남자가 서 있던 입구와는 확연히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비교가 되는 것은 바위도, 흙의 재질도, 희뿌연 안개도 아닌 온기였다.
“이게… 신이 분노한 흔적이군요.”
“그래, 그런 것 같다.”
“정말로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주위를 찬찬히 살피던 헤르잔이 얇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현상은 본 적이 없었다. 간혹 신전에서 제사를 위해 왔을 때도 분명 이런 열기는 없었는데!
“이렇게 열기를 품은 물줄기가 이 일대 근처로 더 흘러내렸다면 마을 주민들이 문을 걸어 잠글 만도 해.”
“그건…….”
헤르잔은 기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휑하던 마을을 떠올리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제 주군의 판단이 맞았다.
직접 보니 보고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불안이 짙게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형태라는 걸 아주 잘 알겠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현상이 익숙한 생활 반경을 침범한 셈이니까.
여전히 따뜻한 감이 남아 있는 물웅덩이 근처의 흙을 확인하는 클로드를 잠시 바라보던 헤르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소문이 단시간에 퍼진 게 당연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근처 마을들을 뒤덮은 뒤숭숭한 분위기는 곧 여러 가지 거래를 위해 지역을 찾은 이들에게 퍼졌을 것이고, 그게 북부의 중심인 나단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을 떠올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흙이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모든 소문은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클로드 자신의 목욕과 관련해서 해괴한 소문이 도는 것도 사실이고, 눈앞의 현상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개인 두 사실이 곧장 ‘신이 클로드 카르테인에게 분노했다’라는 문장으로 연결될 수는 없지.
“결국, 누군가가 건드렸다는 건… 헤르잔, 뒤로 붙도록.”
담담하게 상황을 정리하던 클로드가 빠르게 제 보좌관을 뒤로 물렸다.
푸드덕 소리를 내던 새들마저 자리를 떠 삽시간에 고요해진 공간 속에서, 클로드가 검은 쥔 채 천천히 상체를 낮췄다.
아무리 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에 그가 습관처럼 검기를 둘렀다. 그리고 알아챘다. 이 기묘한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
‘밑.’
발아래의 땅이 자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면 모를 정도로 미세한 흔들림이었지만, 분명한 진동이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의 귓가에 무언가 우르릉 낮게 우는 소리가 들린 찰나.
―쿵, 쏴아아!
제단이 놓인 근처의 연못에서 커다란 물기둥이 치솟았다. 무언가를 할 새도 없었다.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온 물 폭발에 클로드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을 가린 왼팔 사이로 마주한 광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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