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빠르게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선 나는 집무실에서 그토록 바라던 클로드 카르테인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어색해서 말조차 붙이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
“…큼.”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그도 나 못지않게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는 거다. 문을 등진 자세 그대로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는 공작의 모습은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그, 공작님?”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몸을 움찔한 공작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눈은 아직 질끈 감은 채였다.
“…그, 정말 미안하군. 고의는 아니었다만 내가 부주의했다.”
“…어, 아니요. 그…….”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그의 태도에 눈을 도르르 굴리는데, 그의 입에서 묘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현실…….”
“예?”
“아니, 아무것도. 그냥 혼잣말이다.”
카르테인 공작, 방금 현실 어쩌고 하지 않았어?
‘설마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건가? 부끄러워서?’
그럼 진짜 귀여울 것 같은데. 뭔가 내 취향을 살살 건드는 단어에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떠졌다.
‘앗.’
갑작스럽게 마주친 시선에 이번에는 내가 움찔했다. 휴, 순간 속내를 들킨 줄 알았네. 나는 손가락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약간 멋쩍게 웃었다.
“어, 그, 음. 줄리엔은…….”
“왔을 때는 아무도 집무실에 없었다.”
“아, 그렇구나.”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잠시 응시한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여 나를 바로 마주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어쩐지 그의 눈빛에 심장이 덜컥거리는 느낌이 들어, 나는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그……. 왜 온 거예요?”
나는 공작의 시선에 잠시 황당함이 스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왜겠냐. 목욕하러 왔겠지.’
하필 질문해도 이런 질문을 골랐냐고 반성하던 그때,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대답했다. 어느샌가 완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은 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영애야말로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지?”
“어, 그야 공작님이 집무실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허락했으니까요……?”
“시간에 의미를 둔 질문이었다만. 몸은? 언제 일어났지? 이렇게 침대에서 막 나와서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수치스러움도 잠시, 연이어 떨어지는 그의 질문을 듣고 있자니 굳어있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딱 아이작에게 ‘집무실’에 대한 걸 들었을 때의 기분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상대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가슴이 콩닥거릴 것 같은 그런 기분?
‘뭐야, 클로드 카르테인. 아기 고양이 때부터 수상하다 했더니 결국 나한테 빠진 거야? 응? 그래?’
아기 고양이를 생각하니 갑자기 자신감이 치솟았다. 나는 짓궂음을 담아 슬쩍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고는 은근히 그에게 물었다.
“왜요? 걱정했어요?”
“그건…….”
자연스럽게 몸이 공작 쪽으로 기울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장난기가 서린 표정으로 콧잔등을 살짝 찡긋거렸다.
“얼마나 했는데요? 하늘만큼 땅만큼? 막 일어나라고 속삭이고, 침대맡에서 내 손도 잡아주고 그랬나?”
클로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잘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손만 잡았을까.”
“…아니, 이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단어에 나는 급하게 양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아무리 공작이 내게 관대하다 해도 엄연히 그는 공작이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클로드 카르테인은 이 점을 짚고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대답은? 며칠간 의식이 없었는데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말실수의 ‘ㅁ’ 자도 꺼내지 않은 채 질문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만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야 말았다. 이거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상황 아닌가.
나는 살짝 입술을 삐죽이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털어놓았다.
“그럼요.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해요. 아이작 선생님이 직접 확인했답니다.”
“…그가?”
사실 아이작 달튼은 공작령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좀 더 몸을 돌보라고 내게 신신당부했지만……. 뭐, 그 의사 선생님은 골드게이트 가문에 있을 때부터 나를 과보호하는 축에 속하니까. 가족들의 목욕 반대가 더 거세진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아차, 그러고 보니 공작령에 대한 것도 물어봐야 하네.’
나는 잊기 전에 공작령에 대해 물으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마주한 공작의 표정이 영 별로였던 탓이다.
나누고 있던 대화로 미루어 생각해 보자면, 아이작 때문에 이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으음, 왜 그러지. 내가 쓰러진 사이에 둘이 싸웠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낮에 진료를 봐준 아이작 달튼도 클로드에 관련한 이야기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가볍게 속눈썹을 팔랑이며 생각에 빠져있을 즈음, 클로드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
“그럼 그간 못 했던 목욕을 몰아서 할 셈으로 늦게까지 욕실에 있었던 건가? 내 기억상 영애는 이 시간이면 침대에서 쉬는 걸 더 선호했던 것 같아서.”
당신 나를 언제 이렇게 잘 파악하게 된 거야? 아주 잘 알고 있군.
나는 정답만을 쏙쏙 말하는 그의 모습에 손가락으로 재차 귓불을 매만지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사실 잘하면 공작님과 집무실에서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이렇게, 그, 음.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를 기다리느라 늦게 목욕을 한 거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아요. 이르면 오늘 저녁에 오실 수도 있다고 들어서요. 그, 말할 것도 있고.”
“…내가 오늘 오지 않았다면?”
“뭐, 목욕 잘 즐기고 들어가서 잤겠죠?”
여기가 뭐,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지역도 아니고 내 방이 코앞인데.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은 답에도 클로드는 무언가를 고민하듯 살짝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어딘가 퇴폐적인 느낌까지 풍기는 그의 모습이 영 낯설어서 유심히 그를 관찰한 나는, 문득 그가 내 기억보다 여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며칠 사이였는데도.
‘공작령에 생겼다는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나?’
그러고 보니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피곤한 게 눈에 훤히 보였지. 아이작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분명 지금까지 진상을 확인하고 온 걸 거다.
나는 잠시 손목을 만지작거리다 진지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공작령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제가 쓰러진 것과 연관이 깊다는 것도요.”
“아, 할 말이라는 건 이걸 뜻하는 거였나.”
“음, 아뇨. 그건 따로 있는데… 우선은 이 주제부터. 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내 질문을 마지막으로 집무실 안이 침묵으로 휩싸였다. 그로부터 몇 초 뒤, 느릿하게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누른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공작령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보니 내 질문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신의 분노가 터졌다. 그 소문이 그대의 실신과 또 맞물렸고.”
신의 분노?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내 표정에 카르테인 공작이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톡톡 건드렸다.
어디에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이윽고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혹시 북부에 ‘신의 영역’이 있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
“신의 영역이라고요? 아뇨, 들어본 적 없어요.”
“나단에서 한참 위에 위치한 곳이다. 늘 안개와 연기로 가득 찬 곳인데,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지형도 기괴해서 신이 지배하는 땅이라고 불리지.”
“아하.”
클로드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신을 찾는 사람들이 그 근방을 찾기는 하지만, 워낙 척박한 곳이라 근처에 영지민들은 살지 않는다. 문제는…….”
잠시 말을 멈춘 클로드가 나와 가만히 시선을 마주쳤다. 촛불과 퍽 닮은 주황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을 즈음, 그가 가장 중요한 말을 내뱉었다.
“문제는 제단이 마련된 성지에서 땅이 흔들린 것과 동시에 물기둥이 치솟았다는 거지. 그것도 신이 분노했다는 걸 알리듯 아주 뜨거운 물이.”
“잠깐! 뜨거운 물이 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고요?”
“그래. 공교롭게도 그대가 쓰러진 시기와 물기둥이 치솟은 시기가 겹쳤어. 게다가 그대가 쓰러진 다음 날은 그 근방 다른 곳에서도 물기둥이 솟았다고 하더군.”
“그건…….”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카르테인 공작이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안색이 달라졌는데. 혹시 누가 그대의 탓이라고 뭐라 했나?”
“어……. 네?”
“그대의 탓이 아니니 마음 쓸 필요 없어.”
누가 북부 공작 아니랄까 봐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의 말은 명백하게 위로를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과 한 박자 늦는 대답 때문인 것 같은데, 지금 당장은 오해를 풀어줄 수 없을 것 같다.
클로드가 말한 그 신의 분노,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거 같거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그, 지금은 제 이야기 말고 그 이야기가 더 궁금해서요.”
“무슨?”
“신의 분노 말이에요. 직접 확인하고 온 거죠? 그거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나는 콩콩 뛰는 가슴을 꾹 누르며 강렬한 눈으로 클로드 카르테인을 응시했다. 나를 마주하고 있던 클로드의 눈이 내 의중을 가늠하듯 잠시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초롱초롱해진 내 눈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영애는 도통 알 수가 없군.”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고를 들은 건 그대가 쓰러진 다음 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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