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줄리엔이 나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나디아 님, 정신을 차리신 것을 보니 진심으로 마음이 놓입니다. 자작님의 조언을 따라 목 넘김이 쉬운 음식으로 준비했는데, 지금 식사를 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응, 좋아. 근데 줄리엔, 여기 있어도 돼? 달튼 자작이 말을 해놨다고 듣긴 했는데, 시녀장인 줄리엔이 직접 올 줄은 몰랐거든.”
사실 엄연히 따지면 목욕 시중도 줄리엔이 할 만한 일이 아니긴 했다. 이곳에서 워낙 목욕에 대한 말들이 많으니 믿을 만하고 입이 무거운 수족에게 맡긴 거지.
“저도 개인적으로 나디아 님이 걱정되어서요.”
내 말을 듣자마자 하녀들에게 음식을 가져오라 지시를 내린 그녀가 조금은 어색한 자세로 나를 응시했다.
“저, 그리고 깨어나시자마자 이런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응?”
뒷말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시녀장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늘 당당하던 그녀가 이토록 머뭇거릴 일이라니.
‘공작령에 생겼다는 그 문제 때문인가?’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줄리엔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오늘도 목욕하실 의향이 있으실까요?”
으응?
나는 질끈 눈을 감기까지 한 줄리엔의 모습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 그러니까 지금…….
“아, 그.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말해주신 그 오일 말인데, 호기심이 생겨서 조금 궁리를 해보았거든요. 막 침대에서 일어나셨으니 기왕이면 즐겨 하시는 걸 준비하면 어떨까 싶어서…….”
설마 했는데 진짜로 줄리엔이 나한테 목욕을 권한 거야?
나는 잔뜩 긴장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꾹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이게 무슨 경사야!
“…혹시 제가 영애님께서 목욕을 즐거워한다고 생각한 게 잘못된 판단이라면.”
“아, 아니! 그럴 리가!”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어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는 가슴 쪽으로 양손을 꼭 쥐었다. 나도 내가 이런 순정 만화 같은 자세를 취할 줄은 몰랐는데,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이렇게라도 기분을 누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줄리엔 앞으로 뛰쳐나갈 것 같거든.’
지금도 이불 속에서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아주 곤란하다. 나는 깍지를 낀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은 채 은근슬쩍 줄리엔에게 말을 붙였다.
“그냥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 잠시 놀랐네. 그때 지나가듯 했던 오일 이야기를 기억할 줄이야. 나는 네가 카르테인 공작님이 시켜서 그냥 지시를 따르는 줄 알았거든.”
“아, 그건…….”
공손히 앞으로 모았던 자신의 손끝을 가볍게 문지른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공작님의 기대치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던 것뿐이었어요.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게 시녀장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줄리엔은 그간 카르테인 공작이 요구했던 것과 자신의 노력을 짤막하게 말해주었다. 그녀가 어떻게 청소의 요정님이 될 수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해온 일을 늘어놓는 것이 조금 어색했는지, 줄리엔이 가볍게 자신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뗐다.
“저에게 변화가 생긴 건, 제가 어느 정도 이 일에 익숙해진 이후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희열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희열?”
“…조금 창피한 말입니다만, 네. 희열이요. 이부자리를 지저분한 흔적 하나 없이 향기롭게 정리할 때면 입꼬리가 올라가고, 물로 말끔히 닦아 매끈해진 피부를 볼 때면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지 뭔가요.”
저택과 정원을 아주 아름답게 가꿔내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처럼, 줄리엔은 지저분한 것이 뽀득뽀득 깨끗하게 변하는 모습이 퍽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조금씩 눈길을 주다 보니 이전에는 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암, 그 마음 잘 알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줄리엔이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래서 사실은 나디아 님의 목욕 시중을 들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리고 영애께서 목욕에 적극적으로 나서실 때 굉장히 즐거웠답니다. 각하와는 달리 나디아 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제가 관리해 드릴 수 있어서요.”
“아, 그럼 손 마사지나 이런 것도…….”
“다양한 걸 시도할 수 있게 즐겨주신 덕분입니다.”
가볍게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어쩐지 내 가슴이 더 설렜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해?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예기치 않은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엄마, 나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한 명 더 찾은 거 같아!’
물론 줄리엔이 꽂힌 부분은 뭔가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쪽이지만, 결국 모든 관리의 최종 목적지는 자기 자신이 아닌가.
‘솔직히 목욕을 한 번도 안 해봤다면 모를까, 딱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을 거거든.’
생각해 봐라. 목욕할 때 제일 힘든 건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는 거다. 들어가기까지 세 시간이 걸릴지언정, 씻고 나와서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니까 지금 중요한 건 뭐다? 줄리엔에게 목욕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마련하는 거다!’
나는 남몰래 길게 심호흡을 하며 이것저것 변명을 덧붙이는 줄리엔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조금은 대담하게 그녀에게 제안을 던졌다.
“줄리엔, 직접 목욕을 해보는 건 어때?”
줄리엔의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지는 모습이 선연했다. 잠시 적막이 흐르는 공간 속에서 내가 담담한 척 말했다.
“가볍게 생각해도 좋아. 그냥 일이 너무 많아서 유독 피곤한 날 나를 찾아오면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욕실을 내어줄게. 물론 각하께 허락은 내가 받을 거야.”
“나, 나디아 님…….”
“잘 생각해 봐, 줄리엔. 요리하는 사람이 맛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훌륭한 맛이 나올까? 너도 마찬가지야. 직접 해보는 것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건 달라.”
“그, 그렇지만.”
“이건 시녀장으로서 본분을 지키는 것이기도 해. 모시는 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리 준비를 끝마치는 게 ‘진짜 능력’이라는 거잖아? 경험이 없이는 알 수 없는 것도 분명 있어.”
나는 일정 부분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줄리엔의 모습에 담담히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줘.”
만약 줄리엔의 반응이 좋으면, 이걸 시작으로 사용인들을 하나씩 씻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르테인 공작저를 청정 지역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거지.
왜, 다단계 판매가 그래서 빠르게 퍼지는 거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씩 끌어들여서.
‘물론 목욕을 다단계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지는 장밋빛 미래에 씩 입꼬리를 당겼다. 반짝이고 있을 게 분명한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줄리엔이 아주 신중한 자세로 내 말을 긍정했다.
“잘 알겠습니다. 나디아 님이 주신 제안,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이 정도 반응이면 충분하다.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짧은 말을 덧붙이면서.
“목욕은 저녁에 준비해 줘.”
네 말대로 오일을 곁들인 목욕을 하면 밤에 잠이 잘 올 것 같거든.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러겠다는 답을 건넸다. 그러고는 때마침 준비된 식사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식사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정된 목욕과 약간의 희망, 그리고 맛있는 밥. 아직 보지 못한 클로드 카르테인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지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나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줄리엔이 덜어준 수프를 입에 밀어 넣었다. 완벽한 맛이었다.
* * *
“나디아 님, 그럼 허브티와 수건은 여기에 놔두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응. 고마워, 줄리엔.”
“별말씀을요.”
상기된 볼로 즐거웠다는 듯이 웃음을 지은 그녀가 조용히 욕실의 문을 닫았다. 나는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한 귀로 흘린 채 가만히 욕조에 머리를 기댔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조금 전에는 괜히 목욕을 저녁까지 미뤘나 싶을 정도로 온몸이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다. 그럴 만하지. 정신을 잃고 앓는 동안에 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겠어.
나는 줄리엔이 정성스레 우려낸 허브티를 홀짝이며 일렁이는 촛불을 가만히 응시했다. 절로 노곤해지는 기분에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굳이 이 시간에 목욕을 고집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안 왔네, 결국.’
아이작이 내일 올 거 같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느지막이 집무실을 찾았다가 운 좋게 클로드 카르테인과 마주칠 수 있을지.
‘목욕은 나름의 명분이지, 명분.’
그럼 이 늦은 시간에 집무실을 찾은 이유를 댈 수 있으니까. 나는 찻잔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빙빙 돌리며 괜스레 입술을 삐죽거렸다. 로맨스에서 보면 이럴 때 딱, 남자 주인공도 만나고 그러던데.
‘우연 같은 운명처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가볍게 넘기며 다시 한번 차를 홀짝였다. 역시 밤이 되니까 감수성이 높아지는군.
그때였다.
―달칵
“음?”
거짓말처럼 누군가가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여는 게 고스란히 눈에 담겼다.
순정 만화의 그렇고 그런 장면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돼? 줄리엔이 언제든 불러 달라고 했는데. 뭔가 놓고 갔나 보네.’
게다가 언제 적 순정 만화람. 나는 푹 젖혔던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욕조 옆에 놓인 트레이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며 담담하게 고개를 들었다.
“뭐 놓고 가기라도 했……. 으아악! 크, 크, 클로드 카르테인?”
“나디아?”
“아, 맞으니까 눈! 눈 감아요! 아냐, 뒤돌아서 나가!”
나는 황급하게 트레이에 놓여있던 수건을 끌어당기며 그에게 소리쳤다. 아니, 내가 로맨스다운 마주침을 바라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야심한 밤, 욕실에서 마주친 두 주인공. 키워드만 보면 참 클리셰적인 상황에 나는 기가 막혀 재차 헛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욕조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는 웃긴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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