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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8화 (18/155)

18화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 아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어디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무거워서 나는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이러고 좀 있으면 누구라도 깨우겠지.’

지금 중요한 건 일어나서 뭘 하는 것보다, 팔 드는 것도 힘들 정도로 쑤시는 온몸과 흐리멍덩한 내 정신이다.

‘아, 진짜 다시는 검이라든가 훈련 같은 건 안 한다.’

내 인생에 이제 그런 건 없어.

사람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이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검도나 펜싱 선수들? 기사들? 실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전부 초인이야. 괜히 몸을 사용하는 활동에서 재능 운운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제 훈련장 쪽은 천금을 준다고 해야 쳐다볼 거야.’

나는 강하게 다짐하며 느릿하게 기지개를 켰다.

‘나를 깨우러 오는 사람이 줄리엔이었으면 좋겠다.’

바로 목욕할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 하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아는데, 분명 몰골도 말이 아닐 거거든. 대충 휴일 전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 몸을 불사른 어리석은 직장인의 말로 같은 몰골이겠지.

‘그래도 이제는 씻을 수 있으니까 상관없지만.’

예전에는 정말 찝찝해서 죽을 것 같았다.

주전자 한 통 분량의 물로 땀에 절어서 끈적끈적한 몸도, 떡이 진 머리카락도, 단내가 나는 입도 전부 해결해야 했으니까.

‘하녀들이 물에 적신 천으로 팔을 쓱쓱 닦아줄 때마다 지금 때 밀면 장난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

아, 이러니까 정말로 때가 밀고 싶네. 뜨거운 물에서 잔뜩 몸을 불리고 때수건으로 몸을 살살 문지르면.

“으…….”

분명 몸에서 각질이 떨어지는 지저분한 장면인데, 왜 상상만으로도 몸이 개운해지고 시원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 물론 전문가들은 때를 심하게 밀면 피부가 상할 수 있다고 그랬지만, 뭐.

‘조금 정도는 괜찮잖아요, 조금은.’

아, 맞는다. 때밀이로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상상을 하다 보니까 생각난 게 하나 있다. 아무래도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에 누군가가 옆에서 계속 말을 한 것 같단 말이지?

‘…눈을 떠.’

‘…알까?’

처음에는 잠결에 환청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로판의 정석적인 장면인 것 같다.

왜, 쓰러진 이유가 감기 몸살이든 근육통이든 아픈 사람 머리맡에서 혼잣말하는 건 모든 창작물의 클리셰이지 않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든가, 혼잣말을 가장한 고백 같은 걸 곁들이면 더욱더.

그러니 대충 그런 말들은 ‘그렇구나’의 마음으로 넘길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혼잣말이 있었다.

‘…내 가슴이 찢어져, 나의 아기 고양이.’

그래, 이거.

밤새 끙끙 앓다가 목이 말라서 잠깐 깼는데 누가 나한테 저 말을 하고 있더라고. 앞에 뭔가를 더 말하긴 했던 것 같은데, 뒷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건 다 잊어버렸다.

‘아기 고양이라니……. 대체 누가, 왜 이런 말을 한 걸까.’

목소리가 굵었으니까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한 말일 텐데, 그게 누구인지를 모르겠다.

내 방에 들어와서 자는 나를 상대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 카르테인 공작?

‘…진짜?’

나는 잠시 카르테인 공작이 입에 ‘아기 고양이’를 담는 모습을 떠올리다 콱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얼얼했지만, 아니 지금 그게 문제냐. 클로드 카르테인이 ‘가슴이 찢어져, 아기 고양이’ 따위의 말을 했다는데!

‘아, 악.’

아닐 거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이 저택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밖에 없다. 얼굴만 겨우 익힌 집사장이 나한테 와서 그러겠어, 아니면 뭐. 어? 의사 선생이 그랬겠어.

‘의사 선생인가?’

머릿속으로 아주 잠시 의심이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내 안의 아이작 달튼은 인형을 들고 ‘자, 따끔!’ 같은 걸 말하는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라 잘 상상이 가지는 않지만.

‘혹시 또 모르잖아.’

다른 것보다 그 선생님이 로판의 서브 남주상인 게 가장 큰 의심 포인트다.

북부 공작보다는 사막의 왕자님이 새끼 동물들을 운운할 확률이 높고, 남주보다는 서브 남주가 가슴이 찢어질 일이 많으니까.

‘언니가 아이작을 꽤 신뢰하고 있어서 그렇지, 솔직히 그 의사 선생님이 날 보면서 아픈 가슴 운운할 사건이 뭐가 있었나 싶긴 한데.’

우선은 두고 봐야겠다. 그럼 지금 닥친 제일 큰 난관은 그거네.

“대체 어떻게 아기 고양이의 범인을 찾아내…….”

“아, 공녀님! 다행입니다. 눈을 뜨셨군요!”

“으악! 고양이 새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얼굴에 화들짝 놀란 나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빠르게 상체를 튕겼다.

아니, 정말 놀랐다. 어느 정도였냐면 상체를 튕기면서 상대의 안면과 내 이마가 부딪친 것 같은데 그 순간에는 아픈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윽…….”

“허윽…….”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확인한 곳에는 방금까지 범인 후보자에 올라 있던 아이작 달튼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코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인 상태로.

“아, 죄송해요. 달튼 자작님! 제가 다른 생각을 하다가 너무 놀라서 그만!”

“그, 아닙니다. 저야말로 놀라게 해드려서…….”

“아니, 세상에! 지금 코에서 피 나는 거 아니에요? 치, 치료를……!”

“아, 아뇨. 정말로 괜찮습니다.”

개의치 말라는 듯이 살짝 눈웃음을 지은 그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능숙하게 코를 고정했다.

의사 선생은 곧게 뻗은 예쁜 손으로 코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이윽고 작게 코를 풀었다. 깨끗한 손수건의 아랫부분으로 코 주위를 닦은 것은 당연했다.

“음… 괜찮으세요?”

“네, 그럼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재차 미소를 지은 그가 얼굴에서 손수건을 치워 보였다.

이런 것도 로판 세계의 보정일까? 처치를 마친 아이작 달튼의 얼굴은 코에 약간의 붉은 기가 도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아니, 눈물 때문에 눈이 촉촉해 보이는 것이 잘생긴 얼굴에 처연함을 더한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마법 같은 변화에 감탄하는 사이, 완전히 회복을 마친 선생님이 다시금 말을 걸었다.

“우선은 안색이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아 다행입니다. 몸도 무리 없이 움직이시는 것 같군요. 어지럽다거나 속이 메스껍지는 않으시고요?”

“아, 네. 전부 괜찮아요.”

그야, 뒤로 넘어간 게 체력의 고갈 때문이었으니까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일전의 ASMR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반응이 꽤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뭔가를 적어 내리던 그에게서 넘기기 힘든 말이 나왔다.

“공녀님이 벌써 3일째 정신을 못 차리셔서, 아르웬 경에게 연락을 드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거든요.”

“네? 3일……? 언니에게 연락이요?”

“예. 아, 물론 정신을 차리셨으니 진료에 큰 이상이 없다면 연락을 드릴 필요는 없지만요.”

미쳤네.

수도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도 만 하루를 넘겨 본 적이 없는데, 졸지에 북부에서 최장 기록을 갈아 끼우게 생겼다.

“체온은 정상인 것 같고. 음, 눈도 큰 문제는 없네요. 귀와 목도…….”

“괜찮습니다. 진짜 하나도 안 아파요. 아, 근육은 좀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내 모습에 달튼 자작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생긴 눈이 곱게 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방금 고성을 지르며 제 얼굴을 머리로 박은 걸 생각하면, 예.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

“아앗, 그건…….”

“새끼 고양이를 찾으셨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새끼 고양이를 운운하는 그의 모습에 슬쩍 눈을 굴렸다.

‘아기 고양이’를 말한 사람이 본인이면 아무렇지 않게 새끼 고양이를 찾을 수는 없을 텐데, 마주한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꿈에서 본 거 같아서요.”

“아, 그러셨군요.”

자신도 고양이를 좋아한다며 가볍게 주제를 환기하는 게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럼 아이작 달튼은 범인이 아닌가?’

정말로 그 괴상한 말을 입에 담은 게 카르테인 공작이라고?

그 덩치에 그 분위기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아기 고양이’를 말했을 걸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 내 앞에서 직접 부르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도 같고.’

뭐지, 이게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인가?

나는 점점 마음이 복잡해져서 빠르게 머리를 털고는 양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다 됐고, 우선은 빨리 진료를 끝내고 씻고 싶었다. 무려 3일간이나 앓아누워 있었다지 않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사과주스를 마시면 분명 돌아가지 않던 뇌도 쌩쌩하게 돌아갈 거다.

‘그리고 줄리엔이 일전에 내가 말했던 아로마 목욕을 준비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슬쩍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목욕이랑 관련된 일은 카르테인 공작이 잘 해결한 거겠지?

“저, 자작님.”

“네, 공녀님.”

“혹시 제가 쓰러진 사이에 별다른 사건은 없었나요? 저와 관련된 것도 좋고, 공작이나 언니의 근황도 좋아요. 그냥, 3일이나 지났다니까 궁금해져서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나는 달튼 자작에게 슬쩍 그간의 일을 물어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카르테인 공작에 대한 것도 같이 묶어서.

“아…….”

약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노트에 무언가를 표시하던 그가 내 질문에 짧게 입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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