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예? 지금 무슨…….”
“되물을 시간 따위는 없다. 네 말대로 그녀를 빨리 침대로 옮겨야 하니까.”
“죄송하지만 공녀님을 넘겨드려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겠습니다만.”
완강한 거부감이 느껴지는 아이작의 대답에, 그의 손을 주시하고 있던 클로드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필요?”
처음 듣는 단어인 것처럼 같은 단어를 몇 번 더 되뇌던 그가 불현듯 아이작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자신이 그에게 맞추어 ‘필요’를 말해줘야 할 이유를.
‘그런 게 왜 필요하지?’
클로드 카르테인은 명백한 제국의 공작이었고, 이곳은 그의 집이었다. 자신이 어떤 해괴한 말을 해도 그 말이 곧 법이 되는 그의 집.
물론 한 번도 부당하게 제 권력을 휘둘러 본 적은 없으나, 원칙은 그랬다. 더군다나 제 말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제 사람도 아닌 일개 외부의 ‘손님’이라면 더욱더.
‘하지만 그래서는 대치 상황이 더 길어질 수 있다.’
아이작 달튼 같은 사람들은 납득이 되지 않으면 끝까지 고집을 피울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그건 클로드에게도 그리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간 아이작의 손을 힐끗 확인한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유는 간단해. 내게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맡기는 게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되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느냐 물었을 때 자작이 뭐라 했나. 열을 내리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
한 발자국 더 아이작에게 다가간 클로드가 손을 뻗어 아이작의 손을 치웠다. 아이작이 저항할 새도 없이 여유롭게 그녀를 받아 낸 그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당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작은 전문가답게 해열제를 챙겨. 사심을 넣어 이렇게 누구에게나 맡길 수 있는 일에 고집 피우지 말고.”
“…….”
사심이라는 단어 탓인지 아이작 달튼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클로드는 아이작을 더 상대하는 대신, 걸음을 옮기는 쪽을 택했다.
계단을 두 칸씩 넘어 빠르게 나디아의 방에 도착한 그가 침대 위로 그녀를 내려놓았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가벼운 몸이 못내 신경 쓰였다.
‘혹시 체중이 줄었나.’
그랬을 수도 있다. 워낙 가벼워 그 정도를 가늠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가만히 기억해 보면 어제 맞댔던 검이 그제 맞댔던 검보다 더 가벼웠던 것도 같다.
이기고자 하는 의지는 여전했는데 검에 힘이 덜 들어갔었다는 건, 몸 자체에 힘을 낼 수 있는 자원 자체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해야 했는데.’
그녀의 몸이 일반인보다도 연약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뒤늦은 후회에 클로드가 재차 인상을 쓰려던 찰나, 더운 숨을 색색 내뱉던 나디아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요…….”
“영애?”
“모, 목욕…….”
의식을 잃고 열에 취해 헛소리까지 하면서 내뱉은 말이 목욕이라니. 잘못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선명한 나디아의 욕구에 클로드의 입에서 작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쓰러지기 직전에도 자신을 붙잡고 뭔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허물어지는 모습에 놀라 정확히 듣지는 못했다만, 분명 뭔가를 알아서 잘하라고 했다.
‘공작님. 이거, 이거…….’
어딘가 간절하기까지 했던 눈빛과 지금의 헛소리, 그리고 일전 폐하와 아르웬 경이 했던 말까지.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면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은 뻔했다.
‘공작님, 이거 목욕 때문에 쓰러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은 알아서 잘 설득하시고, 내가 일어났을 때도 목욕할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 아셨죠?’
대충 이런 거겠지.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과 자세, 그리고 목소리까지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식은땀 탓에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클로드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영애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이다.”
사실을 안 지금은 괜찮지만, 처음에는 정말 미친 여자인 줄 알았다.
죽을 뻔한 걸 살려줬더니 검을 버리는 거냐고 묻지를 않나, 팔에 얼굴을 콱 박고는 쉴 새 없이 살 냄새를 맡지 않나.
제정신이 아닌가 싶어 피하려던 여자는, 꼭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꾸만 제 앞을 알짱거렸다.
처음에는 골드게이트 공작 가문의 차녀이자 무도회의 파트너로, 그다음에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감자로.
“그대는 알까? 그대가 나만큼이나 주위가 신경 쓰인다고 한 그 말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클로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내뱉으며 쓰게 웃음을 지었다. 마수와 치렀던 전쟁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에 가족처럼 여겼던 말이 꿰뚫리고, 자신은 졸지에 땅으로 떨어져 피로 물든 대지를 굴렀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구른 게 땅이었는지 시체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의 기억은 수채화처럼 모조리 흐릿했으니까. 단 한 가지, 아직도 뇌리를 치는 기억이 있다면 그건 바로 냄새였다.
제 몸 위로 쏟아지던 말의 비린 피 냄새, 시체에서 새어 나온 분비물의 냄새, 뭐 그런 것들.
‘그때가 기점이었을 거다.’
대체 무엇이 제 후각을 자극했는지는 몰라도, 클로드는 그날 이후로 모든 냄새에 예민해졌다. 불어오는 바람이나 흐르는 물에도 고유한 냄새가 있다는 걸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클로드 카르테인은 이게 저주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있을 때도, 아끼는 부하들과 어울릴 때도 갑자기 맡게 된 이 ‘냄새’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편했던 장소는 더 이상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걸 이해하던 친우는 갑자기 낯선 사람이 되었다.
‘각하, 혹시 환각을 보시는 게 아닙니까? 손에 자꾸만 피가 묻은 것 같다거나 그런 거요. 이해합니다. 낙마 사고가 있었던 그 전쟁에서 각하는 온몸에 피를 묻히셨으니까요.’
‘클로드, 제발 그만해.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야. 대체 왜 자꾸 새 옷을 다시 빨아 오라고 하는 거냐. 공작가 사용인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이 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전쟁에서 돌아온 공작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한다. 폭군이 되어 온 것만 같다고!’
처음부터 이랬던 게 아니었기에 더 잘 알았다.
예민하고 까칠하며 이상한 쪽은 그들이 아닌 자신이라는 걸. 그런데 그런 제 앞에 불쑥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나타났다.
‘카나페를 집어 먹고 있는 테일즈 백작의 검은 손톱 때, 제넷 자작 부인의 머리 장식 사이로 보이는 각질, 지금 이 후덥지근한 공간을 은근하게 떠돌고 있는 악취들. 전부 아찔할 정도로 신경 쓰인다고요.’
그것도 그가 보는 세상과 완전히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디아가 구구절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을 나열하던 그 순간 클로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때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크게 요동쳤는지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다음.
‘어……. 그, 그래도 이제 둘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혼자는 고독해도 둘은 외롭지 않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을 들었을 때는 차마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무채색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그녀의 그 한마디로 색색깔의 찬란한 빛깔을 되찾아 갔다. 그 색깔의 중심이 나디아 골드게이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는지는 그대도 알 수 없을 거라 장담해.”
나디아 골드게이트에게 느낀 동질감은 빠르게 편안함으로 바뀌어 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서 그녀에게 더 관대하게 굴었던 것도 같다.
아무리 황당한 말이나 요구라도 그 말을 한 사람이 나디아 골드게이트인 이상, 자신은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거절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구애를 허락해 달라는 황당한 요구도 받아준 건데…….
‘영애는 그렇게 여기에 머물고 싶은가?’
‘그럼요?’
어쩌다 보니, 그녀에게 편안함을 넘어선 궁금증을 느꼈다.
이를 악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필사적인 움직임. 보면 볼수록 한 번도 검을 쥔 적 없는 이가 이토록 움직일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목욕? 자유? 그도 아니면…….
‘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른다. 그녀의 청혼을 거절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녀에게 관심을 두나 싶어서.
어떻게 생각하면 인정하기 싫었던 걸 수도 있다. 지금 자신에게 피어난 일말의 관심을 긍정하면, 결국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냄새’ 때문에 그녀에게 끌리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제 됐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순간, 돌연 자신의 세상이 멈췄다.
클로드 카르테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한번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를 만난 사람은 다시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빨리 눈을 떠. 나 역시 할 말이 많다.”
나디아의 이마에 가볍게 손등을 댄 클로드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이유 없는 다정함에 대한 거라든가.”
나디아가 정신이 있었다면 혹했을 법한 이야기를 몇 개 더 던진 그는 차분한 눈으로 방의 입구를 응시했다. 저 멀리에서부터 들리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예상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작 달튼이었다.
“…해열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잘했군.”
“그 이후에 다른 증상은 없었습니까?”
“딱히 없었다.”
“하…….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치료를 해야 하니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단단히 준비한 듯한 아이작의 질문을 들으며 클로드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아, 예. 감사합니다.”
일 보 후퇴 이 보 전진.
그건 클로드 카르테인이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써먹는 단골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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