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언니가 나를 부른 이유는 내가 이곳에 머물기 위해 정리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가에 머무는 동안 시녀와 하녀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 상황에 대해 부모님에게는 누가 어떻게 연락을 하는 게 좋을지, 뭐 그런 중요하지만 소소한 것들.
그렇게 긴 기간의 체류도 아니라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언니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가지고 있어.”
“언니, 이건…….”
“그래. 황금 열쇠야.”
다른 보석도 아닌, 골드게이트 후계자의 증표를 내게 넘겨주려고 할 정도로.
말 그대로 번쩍번쩍 빛이 나는 황금 열쇠의 자태에 나는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가지고 있기에 저 열쇠는 너무 버거운 물건이었다.
‘루핀이 저거 하나면 제국에 있는 모든 은행에서 VVIP 대접을 받을 거라고 했단 말이야.’
저 열쇠는 그러니까 우리 공작가를 대표하는 징표이자, 막대한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듣기로는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어 가문의 사람이 아닌 이는 쓸 수 없다던데, 아무튼.
“언니, 이건 너무 과해.”
“황제 폐하의 관이 아닌 이상, 제국의 그 무엇도 네게 과분하지 않아. 감히 네게 과분 운운하는 자가 있다면 데리고 오렴.”
“아니…….”
누가 우리 언니의 콩깍지 좀 떼어주세요.
나는 어쩐지 핑글핑글 도는 듯한 정신을 붙잡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이건 후계자의 증표잖아, 언니. 이걸 후계자도 아닌 나한테 주면 어떻게 해.”
“음, 그게 뭐가 문제지?”
“아니… 내가 이거로 시도 때도 없이 가문을 내세우며 권력을 휘두르면 어쩌려고. 이 증표가 있으면 막 은행에서 멋대로 돈 당겨 받고, 어? 내 뜻이 차기 공작 뜻이라고 북부 귀족들 협박하고 그러는 것도 가능하잖아.”
“그러라고 주는 거다. 막 휘두르라고.”
심해를 닮은 푸른 눈으로 물끄러미 날 응시한 언니가 내 양어깨를 손으로 쥐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카르테인 공작이 체류를 허락한 이상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곳은 네 집이 아니잖니. 너 홀로 휘두를 힘은 있어야지.”
“…….”
“내 욕심이기도 해. 나는 너를 지켜줄 가장 첫 번째 보호막이 언제나 골드게이트였으면 하거든.”
그 말을 한 언니는 자신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루핀이었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며, 기어이 내 손에 열쇠를 쥐여주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가족의 사랑에 그렇지 않아도 뜨끈했던 얼굴이 홧홧해졌다. 언니는 황제가 쓰는 관이 아닌 이상 내게 과분한 게 없다고 했지만, 아니다.
황제의 관보다도 넘치도록 주어지는 이 사랑이 더 과분하다. 나는 언니가 준 황금 열쇠를 꼭 쥐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래.”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밝게 웃은 언니가 밥은 어떻게 할 생각인지를 물었다. 지금은 크게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언니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 결투를 치르고 나면 피로감이 강해 그럴 수 있지. 종종 있는 일이야. 그래도 가벼운 과일 정도는 먹어두고.”
“아, 응. 알겠어. 챙겨 먹을게.”
“그래. 마음 같아서야 방에 가서 좀 쉬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지?”
“응…….”
조금 전에 인사할 때 보니까 그 영애들이 벼르고 있더라고. 특히 네펠리 영애가.
아무래도 내가 카르테인 공작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된 것이 제법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서운함이 가득 담겨 있던 그녀의 눈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언니랑 영애들이랑 다 가고 나면 할 일도 없을 텐데, 뭐. 그때 쉬면 되지.”
“…알겠다. 그럼 나도 이만 폐하를 보필하러 가야 해서, 조금 있다가 보자.”
“응, 이따 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언니와 헤어진 나는, 네펠리 영애가 머무는 방으로 가기 전 눈으로 훈련장을 훑었다. 혹시나 아이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나 싶은 마음에서였다.
‘없네.’
나랑 언니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먼저 자리를 뜬 모양이다. 다행이지, 뭐. 당장 상대해야 할 사람이 한 명 줄어서.
‘기력이 이제 아슬아슬하거든.’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 자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나는 네펠리 영애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을 연 탓일까? 떠날 준비로 복작거리던 이들이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공간 속에서 내가 결국 미안함을 가득 담아 샐쭉 눈웃음을 지었다.
“늦게 알게 해서 미안해요. 기분 풀어주러 왔어요.”
“…정말? 나 오늘은 봐주지 않을 거예요.”
가늘게 눈을 뜬 네펠리 영애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권했다. 회포를 푸는 긴 대화의 시작이었다.
* * *
“다 정리되었나?”
“네, 폐하. 이제 출발하시면 됩니다.”
“그렇군. 좋아.”
움직이기 편한 외출복 차림으로 제 사람들을 훑은 그녀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에 매달린 꽃무늬 귀걸이가 새로운 출발에 경쾌함을 더했다.
“아르웬, 기사들에게 대기하라고 해. 나도 인사만 마치고 마차로 들어갈 테니까. 아, 나디아 영애와 따로 인사가 필요할까?”
“아, 아닙니다. 조금 전에 이미 인사를 마쳐서요.”
“그렇군.”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폐하가 시선을 돌려 카르테인 공작을 마주했다. 인자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녀가 카르테인 공작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카르테인 공작, 이곳에 오게 된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대의 변함없는 환대에 고마움을 표하는 바네.”
“아닙니다, 폐하. 공작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북부에 계시는 동안, 폐하의 길이 순탄하기를 바랍니다.”
정중하기 짝이 없는 공작의 인사에 폐하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대가 전대 공작의 다리 뒤에 숨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참 세월이 빨라.”
“폐하.”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이렇게 놀리지 않겠다고 그이와 철석같이 약속하고는 그만. 더 말이 길어지기 전에 가야겠어. 영애도 몸 건강히 즐겁게 지내고 오거라. 황궁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네, 폐하. 또 뵙겠습니다.”
“그래.”
옆집 할머니처럼 내 손을 다정하게 다독인 그녀가 차분히 몸을 돌려 마차에 올라탔다.
뿌우―
폐하께서 출발한다는 뿔피리 소리를 시작으로 길게 늘어져 있던 행렬이 천천히 움직였다.
기사들과 마차, 그리고 순회에 필요한 짐까지. 길다면 긴 행렬을 공작의 곁에서 배웅한 나는 마지막 마차가 빠져나간 그 순간 그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공작님.”
“음?”
“이런 말 진짜 미안한데요. 나 지금 쓰러질 거 같아요.”
거짓말이나 과장이 아니고, 진짜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리면서 몸에 확 부담이 온 것 같은데. 아, 이제 진짜 못 참겠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러고는 당황함이 잔뜩 서린 공작의 눈을 강렬하게 바라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공작님. 이거, 이거…….”
이거 목욕 탓 아닌 거 알죠? 나 진짜 정신 차렸는데 목욕 같은 건 하면 안 된다는 말 나오면 울 거야. 진짜로!
“영애, 정신 차려!”
“알아서 잘…….”
거기까지 말한 나는 마저 말을 잇지도 못한 채 결국 뒤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아니, 더 이상은 어지럽고 메스꺼워서 버틸 수가 없네.
“나디아 골드게이트!”
사라져 가는 의식 속, 공작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실없이 생각했다.
‘내가 북부까지 와서 말도 끝까지 못 하고 픽 쓰러지는 병약한 역할을 계속하게 될 줄이야.’
인생 진짜 모르겠다.
* * *
ㅎㅂㄹㄱ.공금
“나디아 골드게이트!”
무너지는 몸을 붙든 클로드가 크게 나디아의 이름을 불렀다. 어떠한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몸이 인형처럼 그의 손길을 따라 흔들렸다.
굳게 닫힌 눈꺼풀과 핏기 하나 없는 입술, 창백한 볼. 평소의 쾌활함과 생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상태에 클로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의사……!”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미약하기까지 한 호흡을 확인한 클로드가 의사를 부르려던 순간, 그의 옆에서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 폐하께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따라 함께 체류하겠다고 했던 아이작 달튼이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품에서 나디아를 데리고 간 그가 진지한 눈으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빠르게 몸의 곳곳을 확인한 그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열이 나고, 호흡도 미약한 데다 식은땀까지 나는군요. 몸에 지속적인 무리가 가해져서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은 열을 내리면서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부터 몸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는데…….”
나디아보다도 더 아픈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한 아이작이 팔에 힘을 줘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다정한 모습이었다.
클로드 카르테인은 그 순간 굉장히 이상한 경험을 했다. 위급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디아를 안고 있는 아이작 달튼의 눈빛 같은 것들이.
‘왜 자꾸 아픈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흐리멍덩해 보이는 게 꼭 죽은 생선 같군.’
손은 또 어떻고?
목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턱을 어깨 위로 올리면 되는데, 왜 굳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 품으로 끌어안지? 그러면서도 엄지로 살살 그녀의 볼을 문지르는 게,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그럼 저는 공녀님을 데리고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짧은 순간 아이작에 대한 신뢰도를 바닥까지 떨어트린 클로드가 기어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의아함이 담긴 초록빛 눈동자와 불신이 담긴 주황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짧게 부딪쳤다.
쓰러진 나디아와 주치의를 맡았다는 달튼 자작, 그리고 이상한 자신.
“저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공녀님을 돌봐드리고 싶습니다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있지.”
잠시 고민을 하던 클로드는 아이작의 말을 들은 그 즉시 객관적으로 생각하려던 노력을 버렸다.
“넘겨. 나디아 골드게이트는 내가 안고 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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