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흡!”
“반응이 생각보다 괜찮구나.”
나뭇잎을 밟은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과는 달리, 언니의 공격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카르테인 공작이 내려치는 힘에 익숙해지지 않았더라면 단 일 합에 검을 놓칠 정도로.
반사적으로 언니의 검을 받으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래 못 버텨.’
내게는 언니의 검을 받아쳐 낼 만큼의 힘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바로 검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럼 정말 찰나의 순간이라도 도망칠 시간을 벌 수가 있거든.
살짝 칼등을 눕혀 검의 넓은 면을 사용한 나는 검이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걸 본 순간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탁―!
간을 보는 듯이 짧게 치고 빠지는 움직임에 사람들이 작게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나는 조금 심각해졌다.
틈 하나 내어주지 않던 언니가 돌연 움직임에서 힘을 뺀 탓이다. 공격할 부분을 대놓고 비워두는 모습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정석적으로 생각하면 함정인데…….’
태연한 척 마주한 언니의 눈이 희미하게 웃음을 담고 있었다. 머릿속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여기를 공격하길 바라는 건가? 아니지, 이렇게 대놓고 공격할 곳을 비워둬 놓고 그에 대한 대비를 안 할 리가.
나는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게 조금 더 몸을 낮추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중요한 건.”
목표물.
일부러 뒷말을 흐린 채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뭉툭한 목검이 아직은 어색한 궤도를 따라 앞으로 쭉 뻗었다. 딱 언니가 함정이라고 파 둔 그 지점이었다.
언니의 푸른 눈에 살짝 이채가 도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몸을 틀었다. 언니가 함정을 막을 것을 예상하고 단장 배지를 노린 거다.
탁―!
나무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배지를 향했던 내 검이 가로막힌 것이 느껴졌다. 당연하다. 제국의 기사단장이 나 같은 초보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할 리가 있나.
‘하지만 함정 카드에는 또 다른 함정 카드가 발동되기 마련이지.’
나는 검을 잡고 있던 손에서 완전히 힘을 풀었다. 언니의 검에 맞서고 있던 목검이 그대로 툭,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강자와의 결투 중 검을 놓치는 실수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것 역시 그렇게 보일 거다.
“헉!”
“아…….”
봐라. 관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작게 탄식이 퍼지지 않나. 그리고 나는 언니 역시 그들처럼 생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언니의 연약한 동생이니까.
‘역시.’
나는 언니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손잡이에서 힘을 풀며 빠르게 아래로 내린 손에 익숙한 검의 감촉이 느껴졌다.
허리부터 정수리까지 짜릿함이 차올랐다. 조웰 경과 카르테인 공작 앞에서 숱하게 검을 놓치며 오랫동안 혼자 연습했던 거거든.
나는 언니가 함정처럼 비워둔 곳을 향해 다시금 검을 찔러 넣었다. 일순 흐트러졌던 검의 궤도가 부드럽게 자리를 찾은 게 느껴졌다. 딱, 여기…….
“어딜.”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한 공격을 칼등으로 쳐 내린 언니가 미세하게 상체를 틀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공격은 실패로 돌아갈 거다. 붉은 알람이 머릿속에 몇 번이고 켜졌지만, 괜찮다.
‘어제처럼.’
나는 상대에게 찔리지 않는 최소한의 간격을 무시한 채 훅 언니에게 다가갔다. 당장 입술이 스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언니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게 보였다.
호수처럼 늘 고요한 그녀의 눈동자에 파문이 이는 것에 약간의 희열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검을 찔렀다.
톡.
그게 끝이었다. 언니의 발등 위로 고스란히 닿은 칼끝이 명백한 유효타를 알리고 있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공간 속에서 가만히 내 허리를 잡은 언니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증인을 불렀다.
“카르테인 공작.”
“알고 있다. 도전자가 약속된 조건을 달성한 바, 이번 결투의 승리자는 나디아 골드게이트다. 결투의 증인으로 선 나, 클로드 카르테인은 언제고 이번 결투의 결과에 대해 눈에 담은 진실만을 말할 것을 약조한다.”
카르테인 공작의 선언과 함께 처음 단상에 올라왔을 때와 같은 함성이 울렸다. 아, 저렇게 환호해 주면 인사하는 게 관례라고 했나? 아닌가? 이게 공식 전투가 아니라서 꼭 인사를 안 해도 됐던가?
‘아,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채우는 생각을 죄다 비운 채 그대로 언니의 어깨에 이마를 툭 떨궜다.
언니의 체취가 코끝을 맴돌아 오랜만에 조심스럽게 숨을 쉬면서도, 나는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아…….”
“나디아.”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등 위를 가볍게 쓸었다. 꽉, 한 번 힘을 주어 끌어안아 준 언니가 다정하게 나를 품에서 떼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여러모로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나디아. 내가 졌어.”
“언니라서 할 수 있었던 거야.”
진짜다.
언니가 아주 많이 나를 아껴서, 내가 언니를 누구보다 잘 알아서 통할 수 있었던 잔꾀였다.
아무리 져주지 않겠다고 단단하게 마음을 먹었다지만, 언니는 절대 조웰 경이나 카르테인 공작만큼 단호하게 나를 때릴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아니야, 나디아. 그걸 통하게 만든 건 네 노력이다.”
“…….”
“약속대로 네가 여기 머무는 걸 허락할게. 카르테인 공작, 부디 내 동생을 잘 부탁하지. 평소였다면 나디아의 무례에 대해 사과도 해야겠다만…….”
“필요 없다.”
“그래. 그래 보이는군. 공작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 바야.”
공작과 말을 마친 언니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습관처럼 내 몸을 살폈다. 어딘가 아픈 곳은 없는지, 결투 도중에 스친 상처는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네 짐도 미리 다 싸 두었는데… 소용이 없게 되었구나.”
나는 아쉬움이 물씬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언니 정말로 바로 날 데리고 가버릴 생각이었구나.
혹시나 이기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하자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단상에서 내려와 조웰 경과 네펠리 영애, 그리고 여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나는 마지막으로 황후 폐하께 인사를 드렸다.
“폐하.”
“나디아 영애!”
폐하는 내기에서 이기신 것이 아주 흡족했는지 크게 환대하며 나를 반겼다. 의외였던 점은 폐하의 곁에 아이작이 있었다는 점이다. 왜, 그 내 진료를 맡았던 의사 선생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목소리에 서린 의아함을 눈치챈 폐하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딘가 묘한 흥미가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름이 아니라 결투를 지켜보던 달튼 자작이 부탁을 해 와서 말이야. 본인도 영애를 따라 이곳에 남고 싶다 하더군.”
“이곳에요?”
“그래. 공작가보다는 그대가 이유인 것 같더구나.”
나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시선을 돌리자, 잘생긴 의사 선생님이 상냥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저는 영애의 주치의로 이번 순회에 참여한 거니까요. 공녀님이 이곳에 머무신다면 당연히 함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폐하께 허락을 받으려 했는데…….”
“내가 두 공작과 그대의 허락을 받으라 했단다. 마침 당사자 셋이 모두 자리에 있으니 잘되었구나.”
폐하의 말에 가장 먼저 찬성표를 던진 것은 당연히 우리 언니였다. 그렇지 않아도 완전히 홀로 놔두는 게 내심 불안했는데, 오랫동안 내 몸을 돌봐준 그라면 믿음직하다는 게 이유였다.
카르테인 공작 역시 크게 상관없어 보였고, 남은 건 나 하나인데.
“나디아 영애는 어떻게 생각하지?”
“…….”
“공녀님?”
아, 솔직히 모르겠다. 우리 의사 선생, 얼굴도 잘생기시고 성격도 아주 다정하시고 매력이 넘치시는 분이지. 그렇기는 한데…….
‘내 목욕 반대자 중 한 명이잖아.’
게다가 내가 아픈 게 목욕 탓이라고 못을 땅땅 박은 사람!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부터 긴장이 풀려서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고 있는데, 이걸 빌미 삼아서 또 내 즐거운 목욕 생활을 반대하면 어떻게 해.
격렬한 고민에 휩싸인 내 눈에 아르웬 언니가 보였다. 언니는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건 내 패배네.
언니가 내 의견을 존중해 줬듯이 나도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줘야지. 나는 빠르게 목욕에 대한 걱정을 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머무는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뭐, 내 상황을 뻔히 아는 카르테인 공작도 있고 어떻게든 되겠지.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되자 빙긋 웃음을 지은 폐하가 양손을 모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추 정리된 것 같으니 슬슬 점심을 먹고 제이몰드로 넘어가도록 하지.”
유희는 유희고, 의무는 의무니까.
“예, 폐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하게 그녀의 의견을 받든 두 사람이 빠르게 움직였다. 식사의 준비와 훈련장의 정리, 그리고 순회 전에 필요한 물품의 점검까지.
처음부터 이러기 위해 모였던 것 같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즈음, 곁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공녀님.”
“아, 깜짝이야. 달튼 자작님?”
“아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놀라게 한 모양이네요.”
“아니에요. 그, 제가 잠깐 정신을 파는 바람에 오신 줄도 몰랐어요.”
별것도 없는 말을 진지하게 경청한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은색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초록 눈동자가 상냥함을 머금은 채 일렁였다.
“이해합니다. 두 분의 모습은 가끔 보면 경이로울 정도지요. 저 역시 때때로 정신을 빼고 보게 된답니다.”
“그러시구나.”
“영애,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나디아! 잠시 이리로 와 볼래?”
하녀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던 언니의 부름에, 아이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싶어 고민하던 찰나, 아이작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으니 가 보시지요.”
“아,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뭔가 제게 용건이 있으신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저는 영애와 함께 여기 머무니까요.”
“그렇죠. 음, 그럼 이야기는 조금 뒤에 다시 해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의례적인 미소를 지은 채 걸음을 옮기던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이작이 가볍게 입꼬리를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음, 일순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착각인가? 나는 손짓으로 친절하게 언니를 가리키는 그의 행동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내가 뭔가 잘못 느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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