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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3화 (13/155)

13화

“…과연. 청혼인가?”

“네! 제가 고생해서 만든 비장의…….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지금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은데요. 어째서인지 아침 훈련 때의 기억이 사르륵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이번에도 내가 정신을 못 차렸나 싶어 새끼손가락으로 가볍게 귀를 긁었다. 그러고는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아, 죄송해요. 순간 환청이 들려서. 뭐라고 하셨죠? 고맙다고요?”

“정말로 못 들은 건지, 일부러 넘긴 건지 모르겠군.”

“…고맙다고 하신 게 아니에요?”

“됐다. 농담이었으니까.”

뭐지.

뭔가 중요한 건을 놓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그에게 내가 들은 걸 되물으려던 찰나, 공작의 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이 나왔다.

“물건은 고맙게 받지. 물에 섞어 헹구면 되나?”

“어, 그게…….”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물어보는 수밖에.

나는 우선 그에게 답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사용해도 되기는 하는데, 저는 평소 나뭇가지로 이 닦을 때 같이 쓰거든요.”

의외의 사실인데, 이곳 사람들도 양치는 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기는 하지. 로판 세계 속 사람들도 이에 이물질이 끼면 불편할 것 아닌가.

그냥 그게 제대로 된 칫솔이 아니라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내, 나무 자체의 섬유질을 이용하는 거라 효과가 떨어질 뿐이다.

“부드러운 부분에 찍어서 문질러도 되고, 입에 약간의 물과 함께 털어 넣은 뒤 그대로 닦아도 좋아요.”

“…확실히 효과가 있겠어.”

살짝 좁혀진 미간이 감탄에 진실성을 더했다. 조금 전보다 더 심각한 눈빛으로 가루 치약을 살피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를 사용한 거지? 소금이랑……. 이 향은 스피아민트 같은데.”

“아, 스피아민트가 아니라 페퍼민트예요! 소금을 구운 다음에 바싹 말린 민트랑 클로브 같은 허브를 더 넣었어요. 한곳에 모은 다음에 입자가 고와질 때까지 계속 갈면 완성이 됩니다.”

“그렇군. 나도 단독으로 사용해 본 적은 있다만, 영애처럼 합쳐서 갈아볼 생각은 한 적이 없어. 좋은 시도군.”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막 뿌듯함이 치솟았다. 훈련 때 만날 갈구던 사람이 내 말을 전부 수긍하는 게 좀 짜릿하기도 하고, 또 뭐랄까.

‘천재가 된 것 같은 기분?’

음,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유명인 현수막을 거는 동네 사람 같은 마음?

기억에 의지해 개고생하며 만들긴 했지만 내가 만든 가루 치약은, 어? 진짜 치약 튜브 끝자락에도 못 미친다, 이 말이야.

‘우리 중 최약체는 나’ 따위를 생각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던 순간, 귓가에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일어나세요?”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

벌써 가려나 싶어 인사를 건네려던 나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내 이름에 불현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이었다. 공작이 이름으로 나를 부른 건.

나는 갑작스럽게 피어오르는 낯선 기분에 대답하는 것조차 잊고는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그사이, 공작과 나 사이의 거리는 이미 좁혀져 있었다.

대답 없는 내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온 탓이다.

검을 맞대기에는 딱 좋은,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긴장이 될 거리에서 그가 한 손으로 정중하게 내 손끝을 감아올렸다.

“영애의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인사말과 함께 손등 위로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오, 왜, 무, 무슨!”

“귀한 선물을 받아 그에 합당한 인사를 한 것이다만? 직접 만들었다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럼 이 안에 영애의 오랜 고민과 실패가 들어있다는 것이지 않나.”

그건, 그건…….

“그, 그렇죠. 그런 의미의 인사. 음.”

차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정답이긴 하다. 그냥, 갑자기 설레버린 내가 창피해서 그렇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손을 빼고 있자니, 어쩐지 억울함이 치솟았다.

‘카르테인 공작은 왜 저렇게 잘생기고 몸도 좋고 목소리도 끝장나서 별거 아닌 인사만으로도 심장을 떨리게 해?’

심지어 이번이 두 번째 아닌가.

창문을 보고는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고 말하는 모습이 너무 태연해 보여서 더 괘씸하다.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헛소리라고 해놓곤 자꾸 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을 흔드는데, 어? 나라고 못 할 것 같아?

“영애도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아르웬 경이 찾을…….”

“클로드 카르테인 공작님!”

나는 공작의 이름을 부르며 회중시계를 확인하는 그에게 불쑥 다가갔다.

딱 세 발자국을 옮기자 내가 원하던 그 간격이 나왔다. 방금 그가 섰던 딱 그 정도의 거리. 카르테인 공작의 눈이 미세하게 커진 게 보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구강 청결제 말인데요. 효과 확인하는 법 알려드릴까요?”

“지금 말인가?”

“간단해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그가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빠르게 공작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짚으며 발꿈치를 들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서 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포인트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순수하게 아무 의도도 없는 척하는 거다.

“이렇게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여도 냄새가 안 나거든요. 나중에 시도해 보세요.”

“…….”

“아, 그리고 밤에 보니 더 예쁘네요. 공작님 눈.”

사실 양치하면 뽀뽀가 정석인데, 여기서 봐준다.

간당간당하게 허락받은 선을 지킨 내가 발꿈치를 내리려던 찰나였다. 내 손목을 가볍게 그러쥔 그가 커다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톡, 하고 힘없이 손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카르테인 공작이 나를 불렀다.

“영애.”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어째 좀 심상찮다. 다 저질러 놓은 상태에서 할 말은 아닌데, 새가슴이라 그런지 막상 불리니까 약간 찔린다.

“예쁘다는 말은 그, 공작님의 동의하에 진행한 정당한 구애입니다? 뭐야, 가까이 다가간 건…….”

“아니.”

짧은 단어로 내 변명 아닌 변명을 멈춘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비밀 통로를 통해 막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그가 보였던 그 시선이었다.

기묘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가 이윽고 시선을 돌려 내 손과 발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봤다.

“…움직임이 꽤 날렵해졌군.”

경우의 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말에, 일순 빠르게 굴러가던 뇌가 멈췄다. 지금 이 사람이 뭐라는 거야?

“…움직…임?”

“이 정도면 내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다만, 아직 악력이 부족해서 내가 힘을 주면 버티지는 못하는 것 같군. 아르웬 경과 검을 맞댔을 때 버틸 수 있는 건 길어봐야 2초 정도일 거다.”

악력? 움직임이 날렵해?

지극히 전문가다운 분석을 들으며, 나는 내가 표면에 내세운 변명이 그렇게 그럴듯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야, 아무리 효과 확인하는 척이라고 말하면서 가까이 다가간 거라지만 각하가 단숨에 아무 의도가 없다고 믿을 정도라니. 이쯤 되면 연기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일부러 넘긴 건지.”

나는 슬쩍 눈을 가늘게 뜨고는 클로드 카르테인이 내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한창 나와 대화를 하는 중이었고 나는 대화의 끝에 서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지.

“영애, 하나…….”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어쩐지! 어디선가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제 배가 밥 달라고 우는 소리였나 봐요. 아이, 창피해! 그럼 내일 언니랑 결투하려면 잘 먹어야 하니까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교계에 나가기 전, 엄마가 알려준 ‘재미없는 대화 정리하기’ 기법을 120% 활용한 나는 아주 재빠르고 고상하게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눈 예쁘다는 말은 유혹이라고 확인 사살까지 해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선전 포고 같단 말이지.’

손뼉도 맞아야 소리가 난다고, 설명할 수 없는 그 간질거리는 느낌은 아무 남녀나 막 붙여둔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나처럼 카르테인 공작도 뭔가 있다니까? 집무실의 꽃부터 은근슬쩍 사람 챙기는 행동까지.

‘묘하게 촉이 왔어. 아직은 추측이지만, 방금의 행동도 진짜 모르는 게 아닌 거 같아.’

일순 그의 눈에 서렸던 눈빛이나 잠깐의 멈칫거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사랑이라는 감정까지는 아닐 테지만, 개미 눈곱만큼의 마음은 있는 거라고. 그게 나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든 뭐든!

‘진짜, 클로드 카르테인. 딱 기다려라.’

여기에 체류만 하게 되면 그때는 부정의 ‘부’ 자도 못 하게 해주마. 아니? 애초에 부정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게 만들어 주지.

뭐, 지금 당장 생각나는 방법은 딱히 없지만 사람은 절박해지면 다 방법을 찾게 되어 있다. 그때 가면 공작을 구워삶을 방도를 찾아낼 거다.

“중요한 건 내일이야.”

언니는 내가 진 순간 바로 날 둘러업고 공작가를 뜰 거다. 애초에 떠나는 전날 저녁도 아니고, 당일 아침으로 시간을 정한 이유가 뭐겠어.

내가 눈물 콧물 흘리며 허락해 달라고 질질 짜거나 딴말 못 하게 하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절대 질 수 없다!’

언제 다시 올지 기약도 없는 내 사랑과 청결하고 뽀송한 생활을 허망하게 날릴 수야 있나.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다.

‘게다가 내가 이번 결투를 위해서 얼마나 굴렀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마 같은 클로드 카르테인의 아래에서 꾸역꾸역 버텨냈다고. 운동이 끝날 때쯤 목까지 올라오던 신물을 떠올리니, 없던 의지도 생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허공에서 남몰래 투지를 불태우고는 씩씩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빨리 가서 든든하게 밥 잘 먹고, 근육 풀고, 목검 손질하고 푹 자야지!

‘꿈에는 돼지가 나왔으면 좋겠다!’

또 모르지 않나. 꿈에서 잡은 돼지가 뜻하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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