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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2화 (12/155)

12화

아니다.

힘든 훈련 따위는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거라던 내 생각은 착각이었다. 착각? 아니, 그건 너무 사랑스럽고 온화한 말이지.

그릇된 생각은 죄악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과거의 나 개새…….”

“아직 중얼거릴 힘이 남아 있군.”

“히익!”

차가운 눈으로 예고 없이 검을 들이대는 그를 겨우 피하면서 난 생각했다.

‘클로드 카르테인, 이 죽일 놈.’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던 공작은 진짜로 미친놈이었다. 조웰 경이 천사 같다고 생각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카르테인 공작이라서 참고 넘기는 거지, 만약 카를루스 황태자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연을 끊을 정도였다.

“몇 분 남았군. 막고 찌르기 30회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야. 순서는 상관없다만 발등 15회, 가슴 10회, 팔 5회다. 덤벼.”

저 기계 같은 모습을 봐라.

카르테인 공작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쥐어짜 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이 특훈을 보게 되면 승률이 낮아지니까 목표 달성을 못 했다고 잡아두진 않을 테지만, 내일 더 일찍 나오라고 할 게 분명해.

‘악마도 카르테인 공작의 훈련을 받으면 놀라서 백 텀블링 하다가 금메달 따고 일 때려치울걸?’

진짜, 어떻게 단 한 번도 시원하게 찌르는 걸 허용하지 않냐. 머리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그렇지 않은 상태로 내가 마지막 찌르기를 끝냈다.

이래서 운전 연습은 연인이랑 하지 말라는 걸까? 상대에 대한 살의가 치밀어 올라서?

“흐악, 헉!”

“수고했군.”

덤덤하게 목검을 털어낸 그가 헉헉거리며 가쁘게 숨을 내쉬는 내게 다가와 물병을 건넸다. 나는 바들거리는 팔로 겨우 물병을 받아 다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간질거리는 그의 배려에도 한 톨의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건 분명 내가 인간이기 때문일 거다. 생존 앞에서는 사랑이고 나발이고 날아가는 법 아닌가.

“하아.”

차가운 물로 입술을 축이고 나서야 겨우 이성을 챙긴 내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죽을 것 같다는 감정이 가시고 나니까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가 떠오른 탓이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내일,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

“내일? 내일은 아침 훈련을 할 생각이 없다만?”

“넵, 공작님도 훈련 힘내시……. 네?”

나는 프로그래밍 된 로봇처럼 정해진 대답을 늘어놓다 예상치 못한 말에 말을 삼켰다.

눈을 깜박이고만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공작이 그만 정신 차리라는 듯, 지그시 어깨를 쥐었다.

“아르웬 경과 겨루는 게 내일 오전 11시지 않나. 아침 훈련으로 힘을 빼서는 안 되지.”

“아, 아……!”

미쳤다. 어떻게 디데이를 까먹을 수가 있지?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양손으로 내 뺨을 찰싹 때리고는, 흐물거리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정신이 돌아온 것 같은 나를 가볍게 눈으로 훑은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늘 있을 훈련도 조웰 경과 상의해서 적당히 근육을 푸는 정도만 하는 게 좋겠어. 평소 했던 강도로 훈련을 했다가는 분명 몸에 부하가 걸릴 거다.”

“아, 그……. 네!”

“좋아. 그럼 그만 정리하지.”

“넵.”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제안을 따라 거칠어진 땅을 다지다 순간 몸을 움찔했다.

‘잠깐, 잠깐!’

상황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아무 생각 없이 움직였는데, 지금 저 말은 그거잖아.

‘오늘이 그가 내 훈련을 봐주는 마지막 날이라는 거잖아!’

나는 아직도 전해주지 못한 수제 치약을 떠올리며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 이게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매번 공작이 빠듯하게 훈련을 끝내니까 건넬 시간을 놓친 건데.

“저기, 공작…….”

“근데 솔직히 기대된다. 이런 결투를 또 어디에서 보겠어?”

“결투의 원인이 카르테인 공작님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건 진짜야? 아니, 데면데면하게 굴고 있긴 하는데 두 사람 다 매번 훈련장에 일찍 오고. 이거 분명 뭐 있는…….”

“입조심. 그 말 단장님이 들으면 너 그날부로 인생 하직한다.”

그래, 이렇게!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저 멀리 칼같이 시간을 맞춰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나도 다음날을 기약하며 아무렇지 않게 스트레칭을 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지.

나는 훈련장 한쪽 구석에 있는 무기 거치대로 걸어가는 공작을 한 번, 그리고 훈련장 입구에 어른거리는 여러 개의 머리통을 한 번 응시한 채 공작에게로 달음박질쳤다.

“공작님!”

무겁기 짝이 없는 허벅지를 겨우 움직여 그의 손목을 잡아챈 난, 어느샌가 익숙해진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작게 속삭였다.

“저녁에, 저 목욕 끝날 때쯤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그 말을 마친 나는 처음부터 장비가 목적이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그를 지나쳤다. 스쳤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었다.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그래도 내일까지 전략적으로 숨길 건 숨겨야지.’

아무리 똑같은 초보여도, 처음 검을 쥔 나디아 골드게이트와 짧지만 카르테인 공작에게 배운 나디아 골드게이트는 다르게 느껴지니까. 전쟁 영웅인 클로드 카르테인의 이름은 그만한 무게감이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눈에 익은 얼굴들 사이에서 조웰 경을 찾고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반대편 손에는 방금까지 쥐었던, 이제는 내 피와 땀과 눈물이 잔뜩 묻은 목검을 다시 잡은 채였다.

“조웰 경!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영애. 오늘도 먼저 훈련하셨습니까? 땀이……. 마지막 날인데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니고요?”

“아. 그렇지 않아도 그래서 훈련 강도를 좀 상의하고 싶은데, 근육이 조금 땅기는 느낌이거든요. 다리도 무겁고.”

나는 카르테인 공작의 조언을 착실히 이행하며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힐끗 본 카르테인 공작의 시선은 아직 나를 향한 채였다.

예기치 않게 딱 마주한 시선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따 잠깐 봐요.’

작게 달싹인 입술을 읽어낸 그가 눈썹을 밀어 올리는 모습이 제법 재밌었다. 아, 이따 보자는 말에 ‘자기’라는 단어만 붙이면 그냥 단내 나는 비밀 연애 아니냐.

“그럼 가볍게 동작만 확인할까요?”

“아, 네!”

나는 의미 없는 생각을 지운 채 다시 눈앞의 훈련에 집중했다. 이제 한 10년간은 없을 내 마지막 훈련이었다.

* * *

“다 됐습니다, 아가씨. 오늘은 레몬밤으로 준비했었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

“전혀. 도리어 좋은걸? 향이 질리지 않으니까.”

“다행입니다. 일전 각하의 목욕물에도 허브를 준비해 보았는데 만족스러우신 것 같았거든요. 아가씨 덕분입니다.”

“그래? 도움이 되어서 기쁘네.”

양손을 포갠 채 고개를 숙이는 줄리엔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즐거움이 엿보이는 것 같은 건 그냥 내 착각인가?

‘아니, 근데 나름대로 계속 새로운 목욕법을 준비하는 거 보면 새로운 설렘을 느낀 걸 수도 있잖아?’

처음에야 해괴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목욕이라는 게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또 모를 일이다. 시켜서 하다 보니 지저분한 걸 깨끗하게 하는 행위 자체에 마음이 갔을지.

‘괜히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속이 시원한 청소 영상 같은 걸 찾아보는 게 아니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청소의 요정님에게 은근슬쩍 내 사심을 툭 흘렸다.

“향이 있는 오일이나 물을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아.”

“오일 말씀입니까?”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몸에서 향이 나는 느낌이 되지 않겠어?”

“아…….”

나는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를 뒤로한 채 공작이 알려준 통로로 발을 내디뎠다.

이러다 진짜 아로마 목욕을 하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심장이 떨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비밀 통로를 통해 나온 집무실에는 이미 카르테인 공작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서류를 읽던 그가 기척을 느끼고는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왔나?”

“앗, 네. 일찍 오셨네요? 평상시에는 목욕하고 나오면 집무실에 아무도 없던데.”

약간의 어색함을 담아 건넨 말에, 잠시 손끝을 멈칫한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에서 마주한 그의 주황색 시선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잠시 엿보였다.

“…어쩌다 보니.”

“아하.”

“그래서 무슨 일이지? 혹시 오전 훈련 때 부족한 게 있었나?”

차라든가 간략한 인사 따위는 전부 건너뛰는 게 딱 공작답다.

‘아닌가? 눈빛이 묘한 걸 보면 이따 보자고 할 때 장난쳐서 그런가?’

음, 그것보다는 좀 더 뭔가 간질거리는……. 음, 아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간 천 가방에 고이 싸놨던 동그란 민트 소금 치약을 꺼냈다.

“이거 드리려고 시간 내달라고 한 거예요.”

“그건…….”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채 과거를 되짚던 그가 기억나는 바가 있다는 듯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구강 청결제라고 했던 그거 맞나? 영애가 나한테 청혼했을 때 보여줬던.”

“네. 맞아요, 그거.”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어……. 개운한 입의 위대함을 전파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유쾌하게 대화를 이어가려고 꺼낸 말인데, 꺼내고 나니 별로인 것 같다. 나는 그가 헛소리의 ‘헛’을 꺼내기 전, 빠르게 진심을 토로했다.

“농담이고, 그간 신경 써주신 게 고마워서요. 목욕도 그렇고 아침 훈련도 그렇고, 일전에 말 끊지 말아 달라고 한 것도 들어줬잖아요.”

진짜다.

카르테인 공작은 내가 집착 광공을 따라 했던 그날 이후로 끊어서 용건을 말한 적이 없었다. 음, 완벽하게 안 했다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은 그랬다.

그의 손바닥 위에 민트 소금 치약을 올려주며 최대한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제 나름의 감사 표시예요.”

반짝거리고 있을 게 분명한 내 얼굴 탓일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시선을 내려 민트 소금 치약을 눈에 담았다.

뚜껑을 열고 곱게 갈린 가루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를 진지함까지 느껴졌다.

‘저게 치약인 걸 알아서 망정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봤으면 무슨 화약이나 독극물 확인하는 줄 알았겠네.’

코 밑으로 손가락을 대 냄새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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