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가 이 개고생을 하는 이유가 그거였지.
나는 황당함마저 서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샐쭉 웃었다.
“사람이 힘들면 좀 과격해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방금까지 기억도 못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진짜 너무하시네. 지금 제 상태를 보시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제가 공작님의 마음 한 조각을 얻으려고 지금 얼마나 구르고 있는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가볍게 살핀 그의 표정이 조금은 머쓱해졌다. 그래, 네가 보기에도 목검에 의지한 채 땅바닥에 주저앉은 내 모습이 좀 심해 보이지?
나와 시선을 맞춰 몸을 굽힌 그가 훈련장의 한쪽에서 훈련하는 언니를 힐끗 응시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언니는 이쪽으로는 시선 한 조각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카르테인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소문은 들었다. 며칠 후에 아르웬 경과 겨루기로 했다지?”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조만간 있을 큰 시련을 떠올리며 눈꼬리를 축 내렸다. 언니가 그 말을 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일이 일어났던 건 어젯밤, 그러니까 저녁 훈련까지 꾸역꾸역 소화한 내가 기사들을 헤치고 훈련장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나디아.’
저 멀리서 수건으로 땀을 닦던 언니가 어딘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붙잡았다. 내가 오늘 종일 휘두른 목검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
손바닥 위로 놓인 나무 막대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즈음, 언니가 나지막하게 내게 결투 신청을 했다.
‘떠나는 날 아침, 나와 결투하자.’
‘…결투?’
‘그래. 나와 싸워서 이기면 두말하지 않고 네 뜻을 존중해 줄게.’
난 그때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결투에서 이겨야 한다고요? 아, 근데 그 이겨야 하는 상대가 제국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요?
그거 그냥 싫다는 말 아닌지…….
나는 어젯밤, 얼음벽 같던 언니의 표정을 떠올리며 더듬더듬 카르테인 공작에게 가능성을 설파했다.
“…그, 정확하게는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먹이면 되는 거긴 한데요.”
“글쎄.”
잠시 고민하듯 짧게 눈을 깜박인 공작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애의 공격 정도는 나도 연속으로 100번 이상 막을 수 있어. 애초에 그대가 검을 100번 넘게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군.”
“…….”
공작의 객관적인 말에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뼈가 아프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탓일까? 줄줄 내 약점을 늘어놓던 공작이 살짝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왜, 말하고 나니까 찔리니?
“…영애의 노력이 헛되다는 뜻은 아니었다.”
“…….”
“게다가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그 방법이 뭔데요?”
“그건…….”
공작의 표정이 살짝 애매해졌다. 말해놓고 보니 언니를 설득하는 일에 자신이 개입하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 나는 공작의 팔을 꽉 쥐고는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공작님, 방법을 아는 거랑 제가 실제로 언니를 이기는 거랑은 다른 문제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어쨌거나 제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내뱉고 나니 맞는 말이다. 그리고 방법을 알아내는 것도 능력 중 하나 아닌가?
당당하기 짝이 없는 내 말투에 작게 헛웃음을 지은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영애는 그렇게 여기에 머물고 싶은가?”
“그럼요?”
여기 머물 생각이 없으면 내가 왜 이 난리를 피우고 있겠어. 언니 옆에 붙어 있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한 내 눈빛에, 그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몇 번 더 움직이던 입술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공작의 이상한 행동을 지그시 지켜보다 아, 하고 작게 입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공작한테 부탁할 게 있었다.
“맞아요, 공작님.”
“음?”
말하라는 그의 행동에도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갑작스러운 손짓이 수상해 보였는지, 느릿하게 눈썹을 밀어 올린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주위 사람들을 잠시 살핀 채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말했다.
“그거,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그거?”
공작의 표정에 서린 의구심을 확인하며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밀착한 사이에서 작게 오가는 목소리가 은밀했다.
“아이참. 목욕 말이에요, 목욕. 아, 가까이에서 보니 공작님 눈이 별처럼 반짝이시네요. 아니지, 주황색이 찬란하게 빛나는 걸 보면 호박석을 박아 넣은 것 같군요!”
아, 물론 진심이 섞인 유혹도 잊지 않았다.
“영애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지금 제 마음이 부끄러워요?”
부릅뜬 내 눈을 잠시 응시한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언제 황당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담담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샌가 여유로운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은 그가 내 목검의 끝을 손등으로 톡톡 건드리더니 말했다. 약간의 동지애가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줄리엔에게 준비해 두라고 하겠다. 식사 시간 전에 집무실로 찾아와.”
“집무실이요?”
“아르웬 경과 다른 이들에게 계속 목욕을 한다고 소문내고 싶은 건 아니겠지. 내 집무실에서 침실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어. 거기를 이용하도록 해.”
“오…….”
그런 걸 나한테 막 알려주고 그래도 되는 거야? 비밀 통로 이런 거, 가문의 중요한 기밀 사항이고 군사적인 정보 같은 거 아닌가?
사실은 나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입보다 공작의 입이 한층 빨랐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한 시간 일찍 나오도록.”
당겨진 기상 시간에 대한 슬픔보다도 먼저 떠오른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내가 붙잡고 알려달라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료!’라는 문장을 내세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카르테인 공작이 받아준 게 몇 갠가.
‘내 청혼 빼고는 다 들어준 거 같은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공작이 북부 대공 특유의 눈썹 까닥거림을 시전하며 툭 말을 내뱉었다.
“왜, 생각이 바뀌었나?”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그가 말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크게 손을 내저으며 빠르게 회답했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감사해서 그렇죠. 제가 부탁드리긴 했지만, 일부러 시간을 빼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상상을 안 했다거나 공작님이 옹졸하다거나 뭐 그런 뜻이 아니고, 이끌고 계시는 조직이 두 개나 있으니까 엄청 바쁘셔서 시간을 빼는 게 힘들지 않을까…….”
“됐다.”
변명 같은 내 헛소리를 짧게 일축한 공작이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내 훈련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원한 건 그대니까 앓는 소리를 하진 않겠지.”
“그럼요! 제가 이 악물고 참는 것 참 잘합니다.”
“그래? 기대하지.”
객관적으로는 참 잘생긴 미소인데, 경쾌하게 당겨진 입꼬리가 어째서인지 사악해 보인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의 모습에 순간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만요, 공작님.”
“또 뭐지?”
엥? 또 뭐냐고?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나는 내가 뭘 착각했나 싶어 지금까지의 대화를 되짚어 보다 반대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 저한테 온 용건은 말 안 하세요?”
지금까지 내 용건만 열심히 말했는데.
“아.”
내 물음에 짧게 입소리를 낸 그가 허리춤에 달려있던 작은 병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이게 뭔가 싶어서 뚜껑을 열어보니 풋풋한 민트와 새콤한 향이 확 올라왔다.
“민트와 레몬, 그리고 포도주를 조금 섞은 물이다. 오래 훈련을 하다 보면 입 안이 텁텁해지는데, 도움이 되더군.”
“…어, 음. 그러니까 이거 주려고 오신 거예요?”
“그렇다만?”
자연스럽게 대답한 그의 표정은 조금 전의 나와 엇비슷했다. 그가 건넨 물병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내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공작님, 진짜 저 안 좋아해요?”
“또 헛소리군. 바쁘니 말장난은 이만하지.”
“아니, 아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이게 고작 인간으로서, 아가페적 마음으로 베푸는 배려라고?’
그럼 공작은 고소 대상이다. 너 유죄.
나는 조금씩 멀어지는 그의 회갈색 머리카락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렸다. 공작이 다가오는 걸 본 순간 눈치껏 거리를 벌렸던 조웰 경이 내 눈빛에 살짝 몸을 떨었다.
“왜, 왜 저를 보고 그러십니까!”
“조웰 경, 대화는 못 들었어도 물병 준 건 봤죠. 경은 그게…….”
“아, 아아! 저는 모릅니다! 바쁩니다!”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 조웰 경이 꽉 귀를 틀어막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 듯이 떨리는 눈동자를 보아 하니, 언니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그래, 지금 공작이 인정하고 아니고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
본래 이런 건 단번에 인정하기 어려운 거다. 그럴듯한 상황에 자꾸 찔러주면 무의식중에 진짜 좋아하나? 좋아하나 봐! 하는 순서로 가는 거라고.
나는 검지로 코를 쓱 건드리며 공작이 준 작은 병을 꼭 끌어안았다. 찰랑거리는 액체의 소리만으로도 벌써 입 안이 개운해진 느낌이다.
‘다음에는 내 치약도 꼭 줘야지.’
이 물병도 그렇고 목욕도 그렇고 공작에게 고마운 게 한둘이 아니다.
‘아씨, 좋다. 이게 바로 몸은 고되지만, 마음이 부유한 느낌? 연애 전에만 느낄 수 있다는 간질거림이 이런 건가?’
나는 흐뭇함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잊고 있던 마무리 운동을 마저 마쳤다. 공작을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 든다면, 그래. 힘든 훈련 정도는 뚝딱 해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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