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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0화 (10/155)

10화

“부요의 축제가 끝날 때까지 여기에 머물겠다고? 나디아.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거니, 아니면 네가 말을 잘못한 거니?”

“…음, 미안한데 둘 다 아니야.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언니.”

“하…….”

속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아르웬이 느릿하게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자신이 이렇게 화를 낼 줄 알고 미리 준비한 건지, 탁자 위에 놓여있던 물은 차가웠다.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 다시 돌아본 동생은 제게 말을 건넨 그 자리에서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 동생의 예쁘장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또다시 속이 끓었다. 물을 마신 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나디아.”

“응, 언니.”

“…그래, 이유라도 들어보자.”

그렇지 않아도 동생의 눈치를 보며 날을 잡아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태연함을 가장한 채 의자에 앉은 그녀가 가만히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목구멍에서 ‘카르테인 공작 때문이냐’라는 질문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참자.’

자신의 여동생은 날카로운 말을 듣기에는 연약한 아이였다. 아르웬의 눈에 습관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나디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언니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아서 조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가족 사이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음, 그러니까.”

“카르테인 공작이니?”

“…….”

기어이 참지 못해 먼저 내뱉은 말에 나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이곳에 남으려는 이유가 카르테인 공작과 함께 있고 싶어서란 말인가. 이대로 헤어지면 언제 볼지 몰라서 그런 거라고?

컵에 남은 물을 재차 들이켠 그녀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요양하고 싶어서라고 해. 힘들어서 순회는 어려울 것 같다고.”

“…….”

“그럼 내가 허락해 줄지도 모르잖아.”

“…그, 미안.”

거짓말도 못 하는 저 순한 애를 어쩌면 좋을까. 아르웬은 검지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왜 하필 클로드 카르테인이야. 왜.’

클로드 카르테인에게 개인적인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로서는 제국을 위해 힘쓰는 그에게 일종의 존경심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황가를 수호하는 공작가의 후계자로서는 그와 친분을 다져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고.

‘목욕 사건 이후에 내 눈 밖에 나서 그렇지.’

정확히는 동생에게 그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게 했다는 점이 싫었다. 제 동생의 좋아한다는 고백에도 흔들림 하나 없던 그의 표정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약간의 색안경을 끼기는 했지만, 해당 일을 덮자며 했던 말은 또 어떤가.

‘나디아 영애의 고백을 덮는 게 피차 귀찮지 않고 좋을 것 같다만.’

귀찮아? 내 동생의 마음이?

나디아는 아르웬의, 아니 골드게이트 공작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마력을 깨우친 이후로 마법사 특유의 냉정함이 생긴 루핀마저도 나디아에게는 다정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했던 말이 아르웬은 아직도 생생했다.

‘…혼이 이동한 건지 소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육체가 비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팠던 몸이 완치되어도 못 일어난단 소리야.’

나디아가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던 남동생과 혼절하던 아버지, 동생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까지.

지옥과도 같았던 시기는 나디아가 기적적으로 눈을 뜬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루핀은 당연한 부작용이라고 했지만 힘들어하는…….

“언니?”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미안, 어디까지 말했지?”

“거짓말은 좀 그렇다고.”

“후, 그래.”

기사답게 잠시 감정을 갈무리한 그녀가 물끄러미 동생을 응시했다. 채도가 다른 두 눈동자가 허공에서 가볍게 얽혔다.

“나디아, 그렇게 카르테인 공작이 좋아?”

“응.”

“왜 하필 그야? 카를루스 황태자는 안 되겠어? 신분이 눈에 차지는 않지만, 차라리 아이작을 고집했다면 이해는 했을지도 몰라. 네가 아팠을 때 가장 오래 곁을 지켰으니까. 그렇지만 카르테인 공작은 네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니고…….”

“언니.”

하늘을 닮은 쪽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걸 알아보고 싶어서 남는 거야.”

또렷한 동생의 눈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아르웬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허락할 수 없어.”

“언니.”

아무리 그래도 연약한 동생을 이곳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지난번에야 무사히 넘겼다지만, 만약 이곳에 남은 동생이 또다시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러다 그날처럼 또 쓰러진다면?

“널 데리고 온 건 네 기운을 북돋울 좋은 기회라고 여겨서였다, 나디아. 북부에 널 홀로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언니.”

“내 시야 안에 있어. 험한 북부에 널 혼자 두기에는 네가 너무 연약하다는 게 내 결론이야.”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여린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내가 북부에서 버틸 정도로 강하면? 그럼 허락해 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래. 그렇게 해주마. 하지만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언니가 안심할 정도의 기준을 세워줘. 그 기준에 내가 맞출 테니까.”

나디아의 눈은 이제 작게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웬이 꾹 입을 다물었다. 나디아가 이토록 강경하게 나온 적이 있던가?

‘있었어.’

북부에 와서 카르테인 공작의 제안을 들어주고 싶다고 했을 때.

그토록 동생이 무언가에 욕심내기를 바랐는데, 그게 하필 카르테인 공작이라니. 아르웬은 처음으로 나디아 앞에서 냉정해지기로 했다.

“네 의견은 잘 알겠다. 그럼 내일부터 아침 훈련에 참여하도록. 참고로 아침 훈련은 새벽 5시란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르웬이 휙 몸을 돌렸다.

이번 내기의 승자가 누구든, 카르테인 공작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기분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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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 흐어.”

“…나디아 영애, 여기서 그만두시는 게 어떠신지……. 지금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데요.”

“그럴 수는 없는데요.”

“후우,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군요. 저도 단장님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라……. 앞으로 베기 동작 다섯 세트입니다. 배 근육의 힘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거 기억하시고요. 시작하세요.”

조웰 경이 딱한 표정으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다시 목검을 쥐었다. 목각 인형도 없이, 허공에 베기 동작을 다시 시작한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세 단어만이 떠돌고 있었다.

‘나. 목검. 벤다.’

PT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긴 세월.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진리를 깨달았다.

‘아, 생각은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짓이구나.’

조금만 자세가 흐트러지면 칼같이 다섯 개를 추가하는 조웰 경 때문에 욕지거리가 나올 뻔한 게 몇 번인가.

‘…팀장님이 내 보고서 반려하면서, 메모지에 ‘드러남’이 아니라 ‘들어남’이니 기본적인 맞춤법 공부 좀 하라고 개소리를 했을 때도 이렇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진 않았는데.’

나는 옆에서 권태로운 목소리로 숫자를 세는 조웰 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목검을 내리그었다.

목검 하나에 부귀영화가 베였고, 목검 둘에 나불대던 내 입이 참수되었으며, 목검 셋에…….

“어, 영애. 그건 사선으로 베기입니다. 다섯 개 추가요.”

“하하, 아하하학!”

“…나디아 영애?”

조웰 경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귀를 파는데도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또 다섯 개가 추가되어서 정신이 나간 것도 사실이긴 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눈앞에 보이는 두 사람과 내 모습이 너무 대비되었기 때문이 더 컸다.

“여덟, 아홉, 열! 세트 전부 마쳤습니다, 단장님!”

“하아, 세 세트 더 추가해.”

“헛, 이미 열다섯 세트를 하셨는데 여기서 더하십니까?”

“말이 많군. 하나.”

“하나!”

이미 팔 굽혀 펴기를 열다섯 세트나 한 언니도…….

“져, 졌습니다!”

“마지막에 눈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시정하도록. 다음.”

벌써 여섯 명째 대련을 하는 카르테인 공작도 나와는 그냥 인생의 장르가 다른 것 같거든.

‘왜 나는 사람이 광야에서 한 1년째 거칠게 버틴 몰골이고, 저쪽은 흘리는 땀방울마저 반짝거리는 거야?’

아무리 운동 초보와 숙련자의 차이라고 해도 그렇지, 땀 흘리는 효과가 달라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고통과 억울함을 웃음으로 승화하고 있던 찰나, 조웰 경의 목소리가 강하게 내 귓가를 때렸다.

“영애! 다섯 개 더 추가하고 싶지 않으시면 손아귀에 힘 더 제대로 주세요! 아홉!”

“흐악! 아홉!!”

“하나만 더!”

“열!”

“수고하셨습니다!”

조웰 경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목검을 땅에 꽂은 채 주르륵 녹아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목검을 내던지고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귀족 영애 체면, 뭐 그런 거 때문이 아니고 내가 드러누우면 졸도한 줄 알고 다들 몰려들 거라서 그렇다.

“이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마무리 운동만 하면 끝날 것 같아요.”

“…그렇군요.”

“단장님 몰래 말씀드리는 거지만 몸에 대한 이해력은 썩 나쁘지 않은걸요? 영애 몸이 워낙 약해서 그렇지, 기초 훈련을 한 2년만 하시면 제대로 된 검술도 배우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장난해? 기초 체력을 2년이나 키워야 그나마 가망성이라도 보인다는 말이잖아, 지금.

조웰 경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마무리 운동을 하고 있을 즈음,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졌다.

카르테인 공작이었다.

“…….”

방금까지 저쪽에서 대련하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지금 내 앞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야, 왜 말이 없어.’

다가왔으면 말을 해야지.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콱.

먼지와 땀과 근육통으로 잔뜩 까칠해진 나는 무관심의 끝을 달리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툭 내뱉었다.

“뭐,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발이고, 아주 기본적인 예의만 지킨 내 말에 카르테인 공작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확인차 묻겠다만, 영애가 구애하고 싶다던 사람이 내가 맞긴 하는가?”

“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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