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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9화 (9/155)

9화

나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우리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릴 적 봤던 만화 같았다. 문제는 장르였다.

휘이잉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주인공.

‘불안한데. 이거 누가 봐도 샤라랑 효과가 빛나는 순정 만화의 고백 장면이 아니라, 개그 만화의 어? 하는 장면이잖아.’

왜, 왜 조용한 거야. 설마 거절이야?

‘진짜? 정말로?’

공작이 침묵을 깬 것은 점점 길어지는 정적에 내 손이 살짝 떨릴 즈음이었다.

“우선 하루에 목욕 두 번은 안 되겠는데. 낭비가 심해서.”

“…어…….”

진지하게 떨어진 대답에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아니,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냐고요. 내가 과장을 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 나는 또 거절일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

“그리고 청혼에 대한 것도 미안하지만 거절이야. 고백이 아니라 무려 청혼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만.”

“왜, 왜…….”

“특이한 걸 묻는군. 영애와 나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어서 평생의 반려가 되지?”

정말 당연한 말인데, 그렇긴 한데.

‘이럴 거면 일관성 좀 챙겨라!’

수업 한 번 했다고 고백하고 결혼하는 사람들 속에서, 왜 유독 카르테인 공작만 상식 제조기냐고요. 북부 공작이면 선결혼 후연애가 메이저 아니었어?

‘이해가 일치하니 청혼은 받아들이지만, 내게 사랑 같은 건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군.’ 같은 말이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다.

“아, 물론 영애는 여러모로 눈길이 가는 사람이긴 하지.”

“근데 사랑은 아니라서 결혼은 안 된다? 아무리 내가 당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해해 주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배우자를 택할 거였다면 이미 목욕 경연 대회를 열었을 거다.”

목욕 경연 대회…….

그래. 그럼 공작이 미쳤다는 소문이 넓게 퍼질지언정 확실하긴 하겠네. 적어도 그가 목욕하는 일에 기함하는 사람이 뽑힐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참담한 기분이 들어 작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깜깜한 시야가 꼭 내 미래 같다.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여기서 목욕의 쾌감을 느꼈는데 이걸 다시 어떻게 참아.’

앞으로의 일정이 지역 순회라는 걸 떠올리자 더욱 암담해졌다. 기존의 위생에서 길거리의 흙먼지 같은 것이 추가된다는 것 아닌가.

그때였다. 아득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래도 그대가 준 꽃은 잘 받도록 하지.”

꽃? 내가 아까 가슴에 꽂아 준 그거?

반사적으로 눈을 뜬 그곳에는 클로드 카르테인이 서 있었다. 달을 등진 채 내가 줬던 꽃을 쥐고서.

큰 손으로 꽃의 줄기를 살짝 굴린 그가 살짝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회갈색 머리카락 아래 보이는 주황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건 처음으로 마주한 카르테인 공작의 미소였다.

“아름답군.”

그게 꽃을 향해 한 말인지, 나를 향해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정말 웃기게도 그 말을 들은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거다.

* * *

“오늘 수고했어, 나디아. 춤도, 파트너로서의 대응도 다 너무 잘하더라. 자랑스러워.”

“고마워, 언니.”

“이런, 지쳐 보이는구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응, 그럼. 그냥 이런 자리가 너무 오랜만이라…….”

“피곤한 게 당연하지. 오늘은 또 네가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잖니. 그럼 남은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자. 잘 자렴, 내 동생.”

“언니도 잘자.”

언니의 부드러운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달칵, 방문이 닫혔다.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벽에 머리를 박았다.

‘차였다. 차였다고오.’

열이 올랐던 얼굴이 다시금 새빨갛게 익은 게 느껴졌다. 살짝 앙다문 입술 사이로 작게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수치스러워.”

테라스에서 나와 남은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그랬다.

가만히 곱씹어 보니 그 사람이 한 말이 나름대로 맞는 말이라서 수치스러웠고, 그다음에는 공작이 한 그…….

‘아름답군.’

그 애매모호한 단어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수치스러웠다.

아름답군~? 지금 장난해?

복학생한테 잘못 걸린 신입생도 아니고 누가 그런 쌍팔년도, 어? 구린 플러팅에 심장이 떨려. 그것도 대상이 누군지도 모호한 말에.

‘나요. 나디아 골드게이트요.’

쿵― 쿵―!

나는 거지 같은 사실을 떠올리며 재차 벽에 이마를 박았다. 줄리엔의 손을 거친 하얀 잠옷 원피스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원인이 뭘까. 아니, 왜 거기에서 얼굴이 빨개지냔 말이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원인을 물색하던 나는, 손가락에 희생된 머리카락이 열 가닥쯤 되었을 때 결론을 내렸다. 그래, 중요한 건 말 따위가 아니었던 거다.

“얼굴, 얼굴이었던 거지. 몸이랑.”

나는 가만히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나 정도는 거뜬히 들고도 남을 크고 단단한 체격과 가까이에서 느껴졌던 진한 꽃향기, 그리고 한 폭의 삽화 같던 얼굴.

순간적으로 다시 머리가 새하얘졌다. 잘게 떨리는 심장을 느끼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쳤네.”

나 카르테인 공작한테 마음 생겼나 봐.

그간 아무리 괜찮은 남자가 다가와도 꿈쩍 않던 심장이 이 난동을 피우다니……. 냄새 하나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일 줄 어떻게 알았겠나.

벽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뜨거웠던 머리를 조금은 식혀주는 기분이 들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나는 생각했다.

‘들이대자.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잖아?’

허락받고 들이대면 되겠지.

내가 댁의 어화둥둥 내 사랑이 아니라 청혼을 거절한다고? 접점이 없어서 반려로 삼을 수가 없어?

“사랑, 그게 뭐라고.”

방금 얼굴에 눈 돌아간 나를 봐라. 사랑 그거 정말 별거 없다.

그리고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해해 주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가 없는 것뿐?

“웃기시네.”

공작이 전쟁터에서만 굴러서 사람이 참 순수해.

척하면 척, 시선만 오가도 서로가 원하는 걸 알아채는 관계가 얼마나 중독적인지 모르는 거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의 귀중함을 몰라!

‘뼛속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편을 들어주는 것과 겉으로만 아는 사람이 편을 들어주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데.’

옆얼굴로 흘러내린 금색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향유 냄새가 났다.

‘그래. 나약하게 굴지 말자, 나디아.’

공작보다 절박한 게 내 쪽이었다는 걸 다시 상기해. 언제부터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걸 포기했지? A안이 되지 않으면 B안을, 그리고 다시 C안을 만들어 내야지!

나는 재빠르게 침대 위로 몸을 날린 채 공작을 설득할 방법을 고민했다. 우선 그를 찾아가서 여기 머무는 것부터 시작하자.

‘어떻게, 발표 형식으로 준비할까?’

그래, 그게 좋겠다.

그간 소시민으로서 갈고닦은 내 발표력을 보여주도록 하지.

* * *

“…그러한 연유로 저의 체류를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공작님.”

“지금 뭐라고 했지?”

“제가 공작님의 사랑일 수도 있으니 체류를 허락해 달라고요. 덧붙여서 제가 공작님께 구애하는 것도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집무실에서 마주한 공작이 해괴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사실 그의 이런 시선에도 이제는 적응했다. 벌써 몇 번째람.

“영애.”

“공작님, 사랑에 대해 잘 아세요?”

나는 공작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대뜸 그에게 물었다. 본래 이런 건, 질문을 가장한 주장을 던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옛말에, 사랑은 카페에서 만나 차를 마시며 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 그랬어요.”

“옛말?”

실은 옛말도 아니고 유명한 노래에서 그랬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사랑이 무슨 번개처럼 내리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좀 알고, 밥도 먹고!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요.”

“내 부모님은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한 번에 들었다던데. 번개처럼.”

아니, 그러니까 이럴 거면 일관성 있게 하나만 하라고!

“공작님이 전대 공작님이에요?”

“헛소리.”

“그러니까요. 공작님이랑 전대 공작님이 다른데 부모님 사례는 들어서 뭐 해요.”

입을 다문 클로드 카르테인이 살짝 눈썹을 밀어 올렸다. 본인이 듣기에도 틀린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고민을 하듯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 아무리 내 부탁이 마음에 들었다 한들, 이번 무도회 때 영애가 내 조건을 들어줬던 건 사실이지. 도중에 나를 도와주기도 했고.”

“…그 말은!”

“그래. 이번 순회를 마칠 때까지 영애가 공작가에 체류하는 걸 허락하지. 단.”

단?

“아르웬 골드게이트의 허락이 없다면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어. 그리고 그녀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 또한 그대의 몫이다. 난 해당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테니.”

아……. 그거 중요하지.

나는 근래 계속해서 내게 할 말이 가득해 보이던 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 간의 문제도 있으니 그건 제가 해결해야죠.”

“좋아. 그럼 이 이야기는 그 이후에 다시 하도록 하지.”

볼일이 끝났다면 나가 달라는 듯 카르테인 공작이 펜을 들었다.

소설 속 공작님들이 그렇듯, 그 역시도 바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는 등을 돌리기로 했다.

“네, 그럼 조만간 뵐게요. 감사합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무렇지 않게 집무실을 가로질러 문 앞에 선 나는,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직전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러고는 태연한 목소리로 가볍게 그를 불렀다.

“공작님.”

“할 말이 남았나?”

“음, 네. 처음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요. 말해도 되나요?”

“뭐지.”

“제가 드린 꽃, 집무실에 장식해 두셨네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펜을 놀리던 그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그리고 속눈썹 아래 감추어져 있던 그의 주황색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하던 순간.

“그냥, 그렇다고요.”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짧게 웃고는 문고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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