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만족스럽게 목욕을 즐긴 나는, 욕실에서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쾌적하기 짝이 없던 내 방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던 탓이다.
“나디아, 괜찮아?”
“영애!”
“세상에, 나디아 영애! 목욕하러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너무 걱정되어서 그만…….”
아니, 과장이 아니라 정말 단어 그대로 ‘바글바글’이다.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아르웬 언니와 의사는 물론, 네펠리 영애를 비롯한 다른 영애들까지 와 있었거든.
내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이들이 호들갑스러운 손짓으로 의사 선생님을 불렀다.
“빨리 진료를 해보게.”
“영애가 또 혼절하지는 않겠죠? 불쌍한 나디아!”
“어디 어지럽거나 가렵거나 그러진 않아요? 피부가 붉게 올라온다거나!”
음……. 아니, 지금은 괜찮은데 떼거리로 달려들면 그땐 또 혼절할지도 모른다. 달리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숨을 참다가 질식해서.
“그때처럼 안색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공녀님.”
진료를 맡은 의사와 마주하면서 나는 자꾸 떨어지라고 눈초리를 주던 공작을 이해했다.
약간, 방금 목욕하고 나와서 개운한데 혈육이 비가 쏟아졌다면서 잔뜩 젖은 상태로 날 꽉 껴안는 기분? 게다가 뭐야.
‘이 의사, 내가 쓰러진 원인이 목욕 때문이라고 했던 그 돌팔이잖아.’
아니, 여기 기준에서는 돌팔이가 아니지만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돌팔이인 사람.
‘믿을 수 있는 거 맞아? 또 목욕 때문이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불신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의 외모를 봐서 한 번 정도는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신뢰가 갔다. 심지어 진료하는 모습 자체는 퍽 믿음직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평생 감사하며 사세요.’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흔한 로판의 서브 남주 같은 미소였다.
“그럼 어디 자세히 진찰해 볼까요?”
“…예에.”
가방에서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를 도구들을 꺼낸 그가 돋보기를 눈 근처로 가져다 댔다. 돋보기 너머로 의사 선생님의 예쁜 초록 눈동자가 보였다.
“자, 눈을 크게 떠 주세요.”
잘생긴 돌팔이 의사 선생은 눈 검사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기상천외한 검사들을 이어갔다.
이마와 손을 잡아 온도도 확인하고, 혀를 내밀어 보라고도 하고, 고개를 돌려 귀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떠한가.”
언니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의사 선생님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흐음, 귀 안쪽이 조금 젖은 느낌은 듭니다만…….”
아, 그야 내가 얼굴까지 물에 담근 채 열정적으로 목욕을 즐겼으니까요. 귀에 물이 좀 들어간 거죠!
“…위험한가?”
“우선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봅시다.”
심각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상체를 당긴 것과 달리, 의사 선생이 한 행동은 양손으로 내 귀를 가리는 것이었다.
대체 뭘 시험하려는 건가 싶어 눈을 깜박이고 있자, 의사 선생이 진지하게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하는 말이 들리면 단어를 따라 해주세요. 토끼.”
“…토끼.”
“다람쥐.”
“다람쥐…….”
양쪽 귀를 왔다 갔다 하며 단어를 속삭이는 의사 선생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 나, 이거 알아. 이거 ASMR이잖아. 잠 안 올 때 사람들이 반복해서 듣는 그거.
내가 단어를 무사히 잘 따라 할 때마다 싱긋 눈웃음을 짓는데, 세상에. 아무래도 유명 스트리머로서의 싹이 보인다.
댓글에.
[길 가다가 흔들리는 이불 있으면 인사해 주세요. 선생님 웃음에 녹아 없어진 저거든요^^]
[선생님 때문에 청력을 잃었어요. 선생님 목소리에 고장 난 내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이런 거 주르륵 달릴 것 같은 그런 기분.
‘여기 영상석 같은 거 없나? 일전에 루핀이 하나 가지고 있던 것도 같은데.’
선생님,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돌팔이 진료는 그만 때려치우시고, 영상석으로 100만 불면증 환자들이나 고치시란 말이에요.
게다가 영상석 너머의 선생님은 냄새도 안 나.
“흠, 잘 따라 하시는 것을 보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른 곳도 괜찮은 듯 보이는군요.”
“하아…….”
의사 선생의 말을 들으며 언니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영애들의 표정에도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원체 병약하신 분이니, 목욕하실 때마다 진료를 받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카르티엔 공작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물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에서 감염될지 모르는 물질이라서요.”
“그래, 그러도록 하지.”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의사 선생이 유려하게 인사를 마쳤다. 고상한 태도로 의사 선생님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네펠리 영애가 문이 닫히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어떻게 영애에 대한 말을 듣고도 이런 파렴치한 짓을 강요할 수 있죠?! 전쟁 영웅이라고 명성이 자자하길래, 저는 정말이지 신사다운 분일 줄 알았어요!”
“역시 저만 나디아 영애의 일을 듣고는 화가 난 게 아니었군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걱정이 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오, 영애들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까 언니랑 카르테인 공작이 잘 입을 맞춘 모양이네. 힐긋 언니를 곁눈질한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에 도르르 눈을 굴렸다.
‘언니랑 공작한테 잘해줘야지.’
언니의 새벽 훈련에 맞춰 같이 운동도 하고, 카르테인 공작한테는 내가 고생해서 만든 비장의 민트 소금 치약도 슬쩍 찔러줘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줘야겠다며 마음을 다지고 있을 즈음, 함께 분개하던 영애 중 한 명이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나디아 영애에게 한 행동을 보니 알겠어요. 클로드 카르테인 공작님이 심하게 다친 이후로 이상해졌다는 말이 사실이군요? 그저 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하도 쉬쉬거리면서 돌길래 누군가 카르테인 공작님을 음해하려는 건가 했죠. 어쨌든 전쟁 ‘영웅’이시잖아요.”
귀를 솔깃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영애들의 눈에 빛이 돌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그게……. 실은 다치신 이후로 공작가는 물론이고 북부를 뒤집고 계신다지 뭐예요. 목욕도 매일 하시고, 이미 깨끗하게 청소한 곳도 다시 하라고 그렇게 트집을 잡으신대요.”
“네? 그게 사실이에요? 세상에. 조심스러운 말이긴 한데, 아직 미혼 아니신가요? 그런 소문이 돌면 아무리 카르테인 공작님이셔도 꽤 혼사에 타격이…….”
“그렇죠.”
영애들 몇이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방 안에서 소문을 전한 영애가 살짝 상체를 숙였다. 아주 은밀한 이야기인 양, 손으로 입을 가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전대 공작 내외가 급하게 정혼자를 물색한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아무리 조용히 하려고 해도 소문은 막기가 어려우니까요.”
“어머!”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에는 약간의 안타까움과 놀라움, 그리고 소문을 향한 흥미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언니가 박수를 친 것은 딱 그즈음이었다. 주의를 끄는 행동으로 영애들의 시선을 모은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달싹였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 이 주제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설령 소문이 맞는다 해도 제국을 위해 싸우다 그렇게 된 것이니, 경의를 표할 일이기도 하고.”
“…나디아 영애에게 한 행동이 있으니 전 아직 공작님이 곱게 보이지 않지만, 아르웬 경의 말이 틀리지 않아요. 차라리 이번 무도회의 콘셉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오, 맞아요! 그렇지 않아도 황후 폐하께서 자연에 대한 경외와 풍요로 인한 기쁨 중에 어느 게 더 좋을지 고민 중이시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린 네펠리 영애의 덕에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편안해졌다. 이들 가운데 편안하지 못한 이는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자꾸만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꾹 누르며 깊게 심호흡했다.
‘진정, 진정해. 나디아 골드게이트.’
욕조에 처음 발가락을 담갔을 때처럼 심장이 과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카르테인 공작에 대한 소문이 자꾸만 내 마음을 흔들어 댄 탓이다.
‘목욕을 매일 해? 청소한 곳이 지저분하다며 트집을 잡는다고?’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이 남자다. 사랑이고 자시고, 이 남자가 이곳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다.
‘클로드 카르테인의 정혼자를 물색한다고 했지.’
나는 남몰래 꼭 주먹을 쥐었다. 오늘만큼 내가 ‘골드게이트 공작 영애’인 것에 보람을 느낀 적이 있었나? 아니, 결단코 없었다.
‘신분? 합격. 성격? 합격. 카르테인 공작의 마음?’
음, 그게 문제군.
나는 어차피 차일 건데 고백할 때 분위기가 필요하냐고 물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나에 대한 이성적 호감 따위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지.
하지만 괜찮다.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까.’
외눈박이의 세계에서 나는 유일한 두눈박이였고, 그는 모종의 이유로 두눈박이가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그건 일종의 확신이었다. 일로 따지면 따놓은 계약이랄까?
당장 사랑까지는 가지 못해도 그 역시 나를 아는 순간 내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자만하지 말자.’
기회는 노력하는 자만이 잡을 수 있는 법. 심지어 이 기회는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일단은 내가 알고 있는 생활 팁부터 다 정리해 볼까?’
민트랑 소금을 이용해서 치약 비슷한 걸 만들었던 거라든가, 옷 장식으로 생화를 잔뜩 사용했던 거라든가.
남성의 의복을 꽃으로 장식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후자의 경우는 몰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클로드 카르테인이나 이곳 북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아 놔야 해.’
성현들이 괜히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나는 그에게 말했던 무도회 날을 디데이로 삼고,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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