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카르테인 공작에게 들어보니 올해 유독 회오리바람이 크게 지나가는 것 같다더군. 해서, 공작이 ‘부요의 축제’의 경로를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네.”
“경로를 바꾼다는 건 어떻게…….”
“본래 제오니아 지역에서 순회를 시작하여 북부의 중심, 나단을 마지막으로 하지 않나. 반대의 경로를 추천하더군.”
황후님의 말에 귀부인들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작을 나단에서요? 그렇게 된다면 나단은 가장 성대한 시기에 폐하의 축복을 받지 못할 텐데요.”
“그래, 그렇겠지.”
설날에 웃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는 것처럼, 부요의 축제의 핵심은 ‘부요의 어머니’인 황후님께 축복을 받는 것이었다.
부요의 어머니에게서 축복을 받으면 지역에 풍요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물론, 귀족 가문에서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
황가와 해당 가문이 끈끈한 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귀부인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카르테인 공작의 말은 결국 그 모든 이점을 내려놓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척박하기로 유명한 북부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희도 공작가에 성의의 표시를 하는 게 맞겠군요.”
“응당 그리해야지. 그리고 감사 인사를 직접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축제의 시작을 나단에서 하는 만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작가에서 지원해 주기로 했거든.”
“그럼 저희가 지금 이동하는 곳이?”
“카르테인 공작가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작 부인의 말에 긍정한 그녀가 옅은 분홍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특별히 마지막 날의 무도회를 첫날로 당길까 해. 가장 좋은 시기에 축복을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어야지. 이번에는 파트너에도 좀 신경을 쓰고 싶은데…….”
잠시 말을 흐린 폐하의 시선이 여러 영애와 귀부인, 그리고 언니를 거쳐 마지막으로 내게 꽂혔다.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가 카르테인 공작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것은 어떠한가?”
“네? 저 말씀인가요?”
“그래, 그대. 골드게이트 공작가와 카르테인 공작가는 황가를 수호하는 큰 기둥 같은 가문들이지. 특별한 자리에서 공작의 옆자리에 설 사람으로는 그대만 한 이가 없어.”
카르테인 공작에게 말을 붙일 명분이 생겨 좋은 것과는 별개로, 황후님의 제안은 조금 이상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나만 한 사람이 없기는. 일단 후계자인 우리 언니가 있는데. 가문끼리의 친분으로 따지자면 모스키온 후작가의 영애도 있고.
나는 폐하의 곁을 호위하고 있는 언니를 힐끗 바라본 후 조심스럽게 눈을 굴리며 말했다.
“폐하. 정말이지 영광스러운 자리이긴 하지만, 저보다는 저희 언니가 더 마땅하지 않을는지요?”
“어머, 아르웬 경은 임무 중이니 내 곁을 지켜주어야지. 게다가.”
지그시 나를 응시하던 폐하의 입가에 어딘가 수줍은 소녀 같은 미소가 서렸다.
“그대와 카르테인 경에게는 특별한 연이 닿지 않았나.”
“아, 그건…….”
“후후, 나이가 드니 자꾸만 우연 같은 단어에 마음이 설레지 뭔가.”
부드럽게 분위기를 환기하는 말에 귀부인들 사이에서 소소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중 몇 사람은 나를 보며 이상야릇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막냇동생을 놀리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임시로 차린 막사의 입구를 흘깃 바라본 폐하가 가볍게 손을 마주치며 논의를 정리했다.
“자, 그럼 이만 자리를 정리하는 거로 하지. 카르테인 공작이 사람들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을 거거든.”
아, 이렇게 끝이야?
“예, 폐하. 카르테인 공작가가 도움을 준다 하니, 남은 것은 공작가에 가서 상의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카르테인 공작의 파트너가 되어도 좋다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을 굴려 주위를 살펴보니 나 빼고 모두 정리가 된 모양이다. 심지어는 흔한 로판의 전개처럼 남몰래 질투의 눈빛을 보내는 영애조차 없었다.
‘왜지.’
내가 병약함의 대명사가 되어서 그런가.
왜, 그런 마음 있지 않나. 아무리 욕심이 나도 아픈 사람이나 어린아이의 걸 뺏는 건 좀 꺼려지는 그런 거.
“오랜만에 네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기쁘구나, 나디아.”
어쨌거나 오랜만에 성사된 대외 활동에 뿌듯해하는 언니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카르테인 공작의 명실상부한 파트너가 되었다.
언니를 따라 막사에서 나온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의 주인공과 마주칠 수 있었다.
옆에서 웃고 계신 폐하의 모습을 보아 하니, 그 짧은 사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데…….
‘내 공식적인 파트너가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데요.’
나는 어딘가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공작의 눈빛에 눈을 도르르 굴리며 꾹 입을 다물었다.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와 파트너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담담함을 가장한 채 폐하께 말을 걸고 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공작, 저거 나랑 붙기 싫어하네. 싫어해.
“그래. 나디아 영애는 수도에서도 평판이 훌륭한 영애지. 마침 그대가 영애를 도운 것을 본 이들이 많으니 부요의 축제에 어울리는 미담이 될 걸세. 그대가 보인 호의에 대한 내 답례야.”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 때문에 관례를 깨실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예정대로 축제의 마지막 날, 무도회를 여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켄달 자작이 전심을 다해 보필할 겁니다.”
“북부에 카르테인이 떡하니 있는데 그럴 수야 있나! 관례와 다르다 해도 이건 양보할 수 없는 문제야.”
아닌가? 나보다도 그냥 파트너를 만들어 무도회를 여는 게 싫은 건가? 폐하의 말에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다문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뭐 때문이지.’
잠시 눈을 깜박이며 이유를 생각하던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보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황후 폐하가 주관하는 축제의 무도회면 사람이 많이 오겠구나?’
황후께서 직접 파티를 주관하시는 경우는 황성에서도 손꼽을 정도니까 진짜 개미 떼처럼 몰려올지도 모른다.
밀폐된 공간, 코를 찌를 듯이 강한 향수, 갖은 향신료를 뿌린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체취…….
‘젠장.’
클로드 카르테인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던 내가 바보였다. 혼잡하기 그지없을 공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디아, 괜찮아? 어디 불편해?”
“어, 어?”
나와 폐하의 곁을 지키던 언니가 그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익숙한 일이기는 했다. 뭔가를 하다가도 한 번씩 내 상태를 확인하는 건 우리 가족의 습관 같은 거라서.
“손이 차네. 먹은 게 얹혔나.”
작게 미간을 좁힌 언니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주무르던 찰나, 카르테인 공작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좋습니다. 대신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에게 부탁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뭐? 나한테 부탁을 할 게 있다고?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언니를 바라보자 언니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제게요?”
“그래. 준비할 때 내 방식을 따라줬으면 좋겠군.”
공작님의 방식이 뭔데요.
그냥 둘러대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닌지, 카르테인 공작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다.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단장을 하는 모든 과정은 카르테인 공작가의 시녀장, 줄리엔에게 맡겨 줄 것. 의상은 그대가 원하는 대로 골라도 되지만, 옷의 관리와 시중은 줄리엔이 했으면 해.”
“…….”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도회 전까지 세 번,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으면 한다. 목욕에 관한 일도 줄리엔이 알아서 진행할 테니 따로 신경 쓸 부분은 없어.”
“그…….”
“클로드 카르테인 공작,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 언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간을 베었다.
“내 동생에게는 이미 어엿한 시녀와 하녀들이 있다. 어느 곳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지. 그런데도 단장의 모든 과정을 카르테인 가문이 맡겠다는 건 우리 가문이 미덥지 못하다는 뜻인가?”
“내 의도를 곡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아르웬 경.”
“…겸 공작 대리다. 나는 내 본분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 나디아에게 목욕을 요구하는 건 내가 먼저 거절한다. 공작도 어제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텐데? 내 동생이 병약하다는 것 말이야.”
이토록 분노가 가득 찬 언니의 표정은 나조차도 처음 봤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잠시 대화에서 벗어나 있던 폐하가 조용히 두 사람을 중재했다.
“작위를 이어받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카르테인 공작이 다른 가문들의 내부 소식에 어두울 수도 있지.”
“폐하.”
“하지만 공작도 이해하게. 의사가 나디아 영애가 쓰러진 원인이 목욕이었다고 했거든. 모공을 통해 그 안으로 감염원이 들어간 게 치명적이었지.”
여전히 굳은 표정의 카르테인 공작을 힐끗 응시한 그녀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권장되는 행동이 아니니, 물…….”
“자, 잠깐만요!”
내가 도중에 말을 잘라서 그렇지. 폐하께서 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을 행동이긴 했지만, 나는 정말로 다급했다.
왜냐면 공작이 폐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고, 그럼 난 목욕을 할 수 있는 아주, 아주 중요한 기회를 이대로 날려버리게 될 테니까!
“…영애?”
“고귀한 폐하의 말씀을 가로막아 송구합니다. 하지만 저는 공작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아요.”
“나디아!”
언니의 푸른 눈에 경악이 선명하게 서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욕이라도 하겠다고?”
“응.”
놀람과 의외, 충격 등이 섞인 세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나는 최대한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치, 침착하자. 나디아. 여기서 밀리면 진짜 영영 끝이다.
“언니, 나 북부까지 무사히 왔어. 정신을 잃지도 않았고, 토를 하지도 않았어. 열도 안 났고.”
“…….”
“나, 피하지 않고 목욕에 도전하고 싶어. 그렇게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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