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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3화 (3/155)

3화

한쪽 팔로 나를 대롱대롱 들어 올린 남자가 다른 한 손으로 검을 꺼내 들었다. 가볍게 한 번 털어낸 칼에서는 파란색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따가운 바람 때문에 눈이 시려서 잘못 본 줄 알았다. 왜냐면 언니가 저거 엄청 어려운 거라고 했거든.

‘정확하게는 저렇게 선명한 파란색을 만드는 게 어렵다고 했지.’

게다가 이제야 알아챈 거지만, 이 사람… 지금 고삐도 안 쥐고 있잖아!

‘미친, 코어랑 다리 힘 무슨 일이야.’

이런 건 고구려 벽화에서나 봤는데.

다른 말들과 달리 늠름하게 투레질하는 말과 난리 속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남자.

실로 기상천외한 광경에 턱이 빠지기도 전, 남자가 오러를 두른 칼을 크게 횡으로 내리그었다.

쨍, 하는 이명과 함께 푸른빛의 오러가 앞으로 퍼져 나갔다. 검격이 내뿜은 강한 충격파에 살짝 긴장한 것도 잠시.

‘윽!’

날카로운 소음이 일대를 크게 뒤흔들었다. 그가 흩뿌린 오러와 회오리바람이 마찰하며 생긴 소음이었다.

‘아, 아. 이거 그거다.’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

고막이 긁히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나는 차마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눈으로 전부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검을 휘두르던 언니도, 사색이 되어 마차 너머로 고개를 뺀 황후 폐하도 전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체통? 겸양? 그런 건 서커스 못지않은 휘황찬란한 묘기 앞에서 아무 힘도 못 쓴다 이거야.

“씁…….”

나는 입가에서 절로 흐르는 침을 대충 손으로 닦아내며 다시 눈을 부릅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러가 회오리바람에 휘감겨 융화되기도 전, 남자가 허공에서 검을 돌려 검의 손잡이를 그러쥔 탓이다.

무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려하게 검을 매만진 그가 그대로 높게 팔을 치켜든 채 검을 내던졌다.

‘마치 투포환을 쏘듯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 100점.

미켈란젤로가 그대로 석고를 들이붓고 싶다고 할 만큼 완벽한 자세 100점.

보너스 점수까지 더 해 999점의 움직임이긴 한데, 행동이 불러일으킨 결과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지금, 검을 버린 거예요? 저 미친 소용돌이 속으로?”

나를 짐짝 그 자체로 여기고 있던 건지, 여태껏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내게로 시선을 떨궜다. 그의 대답이 뭔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살짝 당겨진 그의 입매와 깜박임 하나 없는 눈이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냐고 대놓고 날 무시하고 있거든.

너무나 당연한 눈빛에 내가 잘못 알았나 싶어 힐끗 앞을 바라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가 던진 검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맞잖아!’

나는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일반적인 상식인이라고. 어릴 때 영재 교육 테스트에서 ‘창의성 부족’이라는 결과까지 받은 사람이란 말이다.

‘내 생각이 일반적인 물리 법칙에서 벗어날 리 없어.’

남의 옆구리에 끼인 상태에서도 당당함을 가장한 표정 탓일까?

비어있는 손으로 여유롭게 고삐를 틀어쥔 남자가 눈썹을 까닥이며 대답했다.

“버리지 않았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요. 검이 바람에 흔들려서 날아… 날아가…….”

사극의 CCTV인 돌쇠에게 빙의해 반박하던 나는 눈앞에서 펼쳐진 괴이한 현상에 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바람에 흔들려서 날아?”

“날아…가지 않았네요, 네.”

분명 조금 전까지 바람에 휘청이던 검이 아서왕을 기다리는 엑스칼리버처럼 땅에 굳건하게 꽂혀있었다. 그것도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내가 눈을 비비거나 말거나, 검은 자신이 할 일을 마쳤다. 검 주위에서 일렁이던 오러가 검격으로 약해진 회오리바람의 기세를 완전히 삼켰다는 뜻이다.

“말은 다 했나?”

“죄송합니다. 저의 생각이 편협했습니다.”

상식이 모조리 파괴된 사태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편협함을 겸허하게 반성했다. 그래, 여기 판타지 세계지? 내가 너무 편견에 차 있었네.

‘오늘 처음 만난 남녀가 내일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는 곳에서 살고 있잖아, 나.’

냄새만 판타지가 아니라 그렇지.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시선을 떨구자, 남자가 나를 땅으로 내려놓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는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신체적 불편함으로 균형을 못 잡는 게 아니라면 빨리 내 몸에서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불결하군.

‘…잘 못 들었습니다?’

남자의 팔뚝을 손으로 잡은 채 서 있던 나는, 그가 흐린 뒷말에 그제야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남자가 오러를 날린 직후부터 휘몰아치던 바람은 잦아든 상태였다. 나는 아직 그와 붙어 있고, 심지어 직전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도 했지.

그런데.

“…냄새가 안 나.”

“뭐?”

작게 내뱉은 혼잣말을 들은 건지 그가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차마 거기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의 팔에 얼굴을 박고 코를 킁킁거리기 바빴거든.

“윽!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영애 미쳤나?”

“잠, 잠깐만요. 진짜, 아주 잠깐 확인만……!”

“기각한다. 매우 불쾌해.”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문장을 씹어뱉은 그가 거친 손길로 나를 떼어냈다. 그 과정에서 내 어깨를 붙드는 것도 싫었는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한 채 아무것도 만지지 않더라.

“그대가 귀족 집안의 여식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도록.”

멍하니 남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나는 닭살이 오소소 솟을 정도의 차가운 눈빛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다. 자기 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걸 누가 호의적으로 보겠어. 변태도 아니고.

사람이라면 응당 민망함과 미안함을 느끼는 게 맞는다. 뒤늦게 이성이 돌아와 그에게 사과를 건네는데, 진짜 큰일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진심인데…….”

이, 이름.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어.

가슴에 남은 한 터럭의 양심으로 겨우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던 찰나, 황후 폐하의 목소리가 나를 구원했다.

“나디아 영애, 무사한가!”

타릭 경에게 안전을 확인받은 모양인지 단숨에 달려온 그녀가 눈으로 나를 훑으며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야.”

“네, 폐하. 그… 이분이…….”

“아, 그렇지.”

내 대답에 시선을 옆으로 옮긴 그녀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옅게 주름이 진 얼굴에는 호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카르테인 공작. 인사가 먼저인 건 잘 알지만, 우선 이 말부터 해야겠네. 정말 완벽한 순간에 등장해 줬어. 고맙네.”

“아닙니다.”

“진심이야. 그렇지 않아도 병약한 아이인데, 손톱만큼이라도 다쳤다면 내가 골드게이트 공작가를 볼 낯이 없었을 걸세.”

황후 폐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와 그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었으나, 이번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분명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골드게이트 공작가의 영애?’

‘이 사람이 카르테인 공작이었어?’

그래, 이런 거.

허공에서 강하게 얽혔던 시선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쉽게 흩어졌다. 그는 폐하께, 그리고 나는 놀라서 달려온 언니에게 붙들렸으므로.

“나디아! 괜찮아? 어디 몸 좀 보여줘 봐.”

“괜찮아, 언니! 정말로. 나 말짱해!”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내 몸 구석구석을 매만지는 언니에게서는 여전히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마치, 내가 방금 겪은 일이 모두 환상이었다는 듯이.

상처가 하나도 없는 걸 확인한 언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왈칵 언성을 높였다.

“나디아, 너는……! 난, 나는 정말 이대로 널 영영 잃는 줄 알고!”

“미안해, 언니. 진심이야. 나도 갑자기 바람에 휩쓸릴 줄은 몰랐어.”

두 손을 든 채 진지하게 대답하는 내 모습에 언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한 번 훑어보긴 했다만, 정말 다친 곳은 없는 거지? 속이 메스껍거나 어지럽지는 않고?”

“응, 전부 멀쩡해.”

“하아… 다행이다.”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는 언니의 행동에 나는 습관처럼 숨을 참았다. 그간 너무 당연하게 해 와서 이제는 자연스럽기까지 한 행동인데, 왜일까.

나는 언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공작의 모습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숨 쉴 곳을 찾아낸 사람처럼.

“언니.”

“응?”

나를 꽉 안아주던 언니가 팔을 풀고는 나를 바라봤다.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하라는 듯이 푸른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나 구해준 저분 말이야. 정말로 카르테인 공작이야?”

“아…….”

잠시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인 언니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클로드 카르테인. 마수 대전쟁 이후 공작 위를 물려받았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지? 나도 처음 만났을 때는 꽤 놀랐다. 그 대전쟁의 영웅이니, 좀 더 나이가 있을 줄 알았거든.”

클로드 카르테인.

나는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싶어 속으로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되뇌었다.

‘우선, 다음에 만나면 한 번 더 정중히 사과부터 하자.’

완전히 엇나갔던 이미지를 되돌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천천히 친해지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거야.

전쟁터에서 구르셨다는데 본래 냄새가 잘 나지 않는 특이 체질이신지, 그도 아니면 혹시 공작님도 피부를 뽀송하고 뽀득하게 관리하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시는지.

‘…후자면 진짜 너무 감동적이겠다.’

핸드폰은 없지만 SNS에 #뽀송함 #분위기 #성공적이라고 외치고 싶을 것 같아.

‘후, 빨리 친해져서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다.’

나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양손으로 가슴을 꼭 누른 채 멀리서 카르테인 공작을 응시했다.

지금 같은 느낌이라면,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이 오랜 답답함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그래,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송구합니다. 목욕 시중을 맡은 시녀장, 줄리엔입니다. 부족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욕조에 들어가면 되는가?”

“예. 아르웬 경께서도 크게 노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각하께서 워낙 강경하셔서…….”

시녀장의 쩔쩔매는 목소리를 들으며 탕에 발가락 끝을 담그기 전까지는 말이다.

몸에 닿으면 딱 좋을 따스한 물의 온도가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쭉 퍼져 올랐다. 아직 전신을 물에 담근 것도 아닌데, 벌써 심장이 널뛴다.

목욕 시중을 위해 서 있는 시녀장은 바르르 떨리는 내 몸이 불쾌함이나 걱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

‘설레. 내가 목욕을 하고 있다니 설레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대외적으로 카르테인 공작의 압박과 권력에 굴복해 욕조에 몸을 담근 나는,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내적 비명을 질렀다.

‘이야기? 대화 같은 소리 하네. 클로드 카르테인, 당장 결혼해!’

그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아주 강렬한 집착과 광기였다. 이렇게 된 과정을 설명하자면 일단 며칠 전으로 시간을 좀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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