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식탁 위에 마력석과 함께 종이를 놓아두었어. 그걸로 우리와 소통할 수 있어. 그럼….”
노엘이 마지막 인사를 할 때쯤, 희미해진 녀석들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내던졌다. 곧 보지 못할 테니 다급해진 탓일까.
우르르 한꺼번에 내지르는 바람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바로 옆에 있던 베키의 말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네가 가장 원하는 길을 선택해!’
그 한마디가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어 와 각인처럼 새겨졌다. 이내 따듯한 그림자들이 기척마저 지우며 눈앞에서 모든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다.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곁에 있던 것들이 사라져 버리니 속이 서늘해졌다. 익숙한 텅 빈 거실이 넓고 허전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내 곁에 다들 그대로 있겠지.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다들 어딘가로 완전히 가 버린 것 같았다.
처음부터 계속 몰랐더라면… 이런 공허함은 맛볼 필요 없었을 텐데.
시무룩한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저절로 등과 어깨가 내려앉아 굽어졌다.
그러고 있는데 거실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엽서 크기의 종이 뭉치였다. 날아오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들고 오는 거겠지.
기괴한 일이었지만 이젠 이런 현상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했다. 그들이 내 곁에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종이는 노엘이 앉아 있던 테이블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러니 종이를 들고 온 이가 노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허공에서 볼펜이 춤을 추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기다리니 종이가 내 앞으로 날아와 주저하지 않고 덥석 받았다.
<어떤 선택이든 네 결정에 따를게. 그러니 그런 안쓰러운 표정 짓지 마.>
내 선택에 따른다니….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 마음에도 없는 말임이 틀림없는데, 그래도 처져 있는 내 기운을 북돋으려 한 의도가 엿보이니 기특했다.
이렇게 귀엽게 굴면 난 또 노엘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지는데. 이젠 날 공략할 다른 방법을 터득하기라도 한 걸까.
“노엘, 정말 내가 여기 남기로 하면 나 혼자 두고 모두 떠나는 거야?”
뻔한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그렇게 할 텐데.
노엘이 다시 무언가를 술술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왜, 떠나기 싫은 거야? 그럼 이 녀석들만 보내 버리지 뭐. 네가 원한다면 난 끝까지 네 곁에 남을게. 이런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라도 괜찮다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게.>
치밀어 오르는 울컥함을 간신히 삼키며 손가락으로 코끝을 지그시 눌렀다.
정말이지 못 말리는 녀석이다. 그렇게 유령인 채로 내 곁에 남으면 뭐 하나. 내가 나중에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사는 것까지 혼자 다 보고 있을 참인 걸까.
도통 무슨 생각인 건지. 그런 말 하면 내가 감동해서 냉큼 따라갈 줄 알았나?
그럼 반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오로지 내 몫이겠지.
“난 일단 쉬어야겠어. 쉬면서 생각 좀 해 볼게.”
누워서 머리를 식히며 차분히 고민해 봐야겠다.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긴장해서 그런지 더는 체력이 한계였다. 커피를 마셔도 피로가 자꾸만 몰려들었다.
방으로 가려고 계단을 밟는데 종이가 다시 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네 방에는 베키가 항상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쉬어.>
“베키라면 환영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와 침대로 쓰러졌다. 힘에 부쳐 꽉 닫히지 못한 문이 저 혼자 조심스럽게 닫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베키가 문을 닫아 준 모양이다.
“고마워, 베키.”
허공에 나직하게 읊조린 나는 그대로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자는 것은 아니었다.
눕자마자 잠들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째선지 마음이 평온해지며 머릿속이 더욱 맑아졌다. 가슴은 두근두근 기분 좋게 뛰었다.
마치 여행 가기 직전의 기분이었다.
무언가에 마음을 홀딱 빼앗긴 것처럼 설렜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각하고 피로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는데, 비로소 혼자 아늑한 곳에 누워 있으니 내가 지금 무얼 진정으로 원하는지 잘 알게 되었다.
이 겨울 방학이 끝나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텐데. 그럼 한동안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겠지.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힘들게 입시를 치르고 간신히 붙었다며 좋아했던 적이 언제였더라? 그런데 그걸 능가하는 더 흥미로운 세상을 발견한 걸 어쩌겠나.
마력이 흐르던 몸이 그리워졌다.
마력석을 연구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 내 손으로 굉장한 마력석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쳤다. 마력석의 무한한 가능성에 매력을 강하게 느끼고 있던 터였다.
어쩌면… 언젠가 친구들을 원래의 몸으로 돌려놓을 마력석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녀석들이 원한다면 어떻게든 도전해 볼 것 같다. 노엘과 함께한다면 추진력에 더욱 힘이 붙을 것 같은데.
그 외에도 다양한 힘을 지닌 마력석을 만들어 생활의 편의를 도모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재미있을 것 같은 상상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여행은 내 오랜 꿈이기도 했다. 물론 그동안 생각했던 건 지구상의 여행이었지만, 이젠 시공간을 뛰어넘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마력석이 우릴 어디로 보내 버릴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사실조차 내 심장을 쿵쿵 뛰게 하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모험가 체질이었던가? 모험에 대한 욕구가 이렇게 큰 줄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고 또…….’
어느샌가 노엘과 함께 가면 좋은 점만 나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녀석들과 여행하다 환상적인 보금자리를 찾아 정착할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살고 싶은 환경을 선택할 수 있다니!
그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급격히 안정되는 내 심장이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 전부 우리 집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꽉 찬 것같이 든든했다.
노엘을 잃기 싫었다. 정착한 곳에서 결혼하자고 했었지. 그 결혼… 실감 나지 않고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노엘이라면 좋을 것 같다.
뭐든 같이 하고 싶었다.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지금은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그와 함께할 이유가 충분했다.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그였다. 그런 녀석을 이제 더는 외면할 수 없다. 시간을 들여 듬뿍 사랑해 줘야지.
외면했다간 영원히 내 곁에 유령으로 남을 것 같아 무섭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따듯한 기운이 몸을 감싸며 황홀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미 이곳에서의 미래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린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간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일어나서 당장 컴퓨터를 켰다. 정전되었던 터라 안 켜질까 봐 걱정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전원이 들어왔다.
이윽고 비장한 눈빛을 한 나는 친구에게 보낼 메일을 또각또각 써 내려갔다.
메일을 꼭 보내라던 친구의 말을 기억했다. 설마 또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걸까? 역시 이상한 녀석이다.
<네가 말한 게임의 결말을 알았어. 결국 목숨을 잃은 건 내가 될 테니… 표면상으로는 내가 패배한 걸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며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했다. 막상 인사를 하려니 가슴이 잔잔하게 떨려 왔다. 키보드 위의 손가락 끝이 간지러워 빨리 글을 써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패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아. 이제야 내가 행복할 길을 찾은 것 같거든. 이게 패라고 해도 이젠 아무 상관 없어졌어.>
내가 하려는 일이 정말 맞는 걸까.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문득 두려움이 몰려들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밀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가족을 찾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하고 싶은 일도 생겼다. 그 일은 이쪽 세상에선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 크리스마스에 꼭…! 네가 빙의에 성공하길 바라. 네가 빙의해서 다른 세계로 간다면 말이야.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난 이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시작할 거거든!>
반드시 다른 세계로의 빙의에 도전할 거라던 친구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만나게 되면 내가 꼭 널 먼저 알아볼게. 그땐 내 친구들도 소개해 줄 거야. 엄청나게 소중하고… 정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좋은 녀석들이거든. 너만큼이나! 그리고… 지금은 모두가 내 가족이 되었어. 이젠 정말 내 가족이야.>
베키가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겠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뿌듯함이 몰려들었다. 내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셈이었다. 창피해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앞으로도 입 밖으로 꺼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별이 아니겠다. 우린 또 만날 거니까.>
그곳이 어디든지 정말 다시 만나리란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보내기 버튼을 누른 나는 메일이 제대로 갔는지 확인한 후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