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나는 옷장에 숨어 걸려 있던 옷들을 끌어안아 얼굴을 파묻었다.
곧 발각될 것이다. 날 못 찾을 리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주저하는 마음이 기어코 나를 옷장 속으로 숨게 했다.
내가 있는 옷장 앞까지 다가와 멈춘 발소리의 주인은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노엘은 왜 문을 열지 않는 걸까.
나는 왜 먼저 나가지 못하는 걸까. 노엘이 정말 날 죽이기라도 할까 봐?
그는 결코 그런 식의 농담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장난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마음의 속삭임에 집중했다.
그런데 왜 이 순간, 내 목소리가 아닌 노엘의 목소리가 들려온 걸까.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넌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
노엘은 내게 제 심장을 내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땐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듣고도 별생각 없었는데, 이후에 보여 준 그의 행동을 떠올리면 정말로 그렇게 할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목숨도 내어 줄 수 있다는 남자의 사랑을 받았구나. 뒤늦게 떠올린 사실에 나 자신이 작아지는 것만 같다.
왜 이렇게 초라한 느낌이 들까.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들킬 걸 알면서도 숨어 있기 때문일까? 목숨이 문제는 맞는데 갑자기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기묘한 생각이 지배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
환청처럼 들려온 노엘의 부드러운 음성에 입꼬리가 손을 들며 항복하듯 올라갔다.
노엘이 날 기다리는 게 아닐까. 이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의 초조한 모습을 떠올렸다. 떠오른 상상 속의 모습에 나는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벌컥!
“노엘…?”
이윽고 옷장 문을 열고 나왔을 땐, 활짝 열린 방문에서 싸늘한 냉기가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노엘도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지만, 푸른빛을 뿜는 반딧불이가 어디선가 나타나선 내게 날아들었다.
반딧불이는 내 뺨에 살며시 내려앉아 있다 잿빛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노엘이었다.
노엘에게 눈을 맞추자마자 울컥한 나는 차오르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노엘이 먼저 울컥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맞추고 애틋한 분위기에 젖어 소리 없는 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점점 시야가 넓어지며 내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존재들에게 눈길이 갔다.
내 침대 밑엔 인간 모습의 데릭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침대 위에는 타란티나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천장이 낮아진 건가 했더니 리마가 똬리를 틀듯 등을 가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책상 의자엔 매드가 에디를 제 무릎에 올려놓은 채 앉아 있었다. 깁스는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데릭의 긴 머리카락을 제 팔에 은근슬쩍 감는 중이었다.
방문 밖에선 알프레드와 그의 어깨 위 주방장이 고개만 내밀고 훔쳐보듯 숨죽이고 있었다. 그 뒤로 단팥묵과 토리묵의 몸통도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나와 함께 있었던 걸까.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희들…….”
그동안 겪었던 이상한 소음이 떠올랐고 이제야 원인을 알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때부터 나와 줄곧 함께하고 있던 것이다. 나 혼자 있던 게 아니었다.
노엘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는 입을 달싹였다. 긴장하는 깊은숨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노엘이라면 내게 먼저 따지려 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 자길 버렸냐며, 어떻게 떠날 수가 있냐며.
하지만 내 예상은 곧 보기 좋게 빗나갔다.
“리사, 걱정했어.”
“노엘…!”
견디지 못하고 그를 안으려 손을 뻗었다.
“어?!”
뻗은 손은 허공에서 그를 통과해 곤두박질쳤다.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노엘이 전혀 만져지지 않고 환영처럼 통과했다. 당황해선 손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지만, 여전히 닿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노엘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신도 진정하려는 듯 마음을 다잡는 표정이었다.
“우린 너와 닿을 수 없어.”
노엘의 말에 모두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충격을 전부 집어삼킨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엘에게 닿을 수 없다니. 더는 만지지 못한다니?!
충격에 얼어붙은 사이 베키와 토드가 뒤늦게 들어왔다. 내가 자신들을 볼 수 있는 걸 알아채고는 안심하는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미소를 돌려주려 했지만, 노엘이 말을 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싸늘한 붉은 눈빛이 나를 직시하며 웃음기를 머금은 광기를 내비쳤다.
“그러니 네 목숨을 내게 줘. 난 널 꼭 가져야겠어.”
황홀한 그의 목소리로 목숨 얘기를 들을 줄은 전혀 몰랐다. 대체 무슨 소린지 몰라 크게 치켜뜬 눈으로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보다, 그를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았다.
“리사, 난 네가 꼭 필요해.”
온몸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역시 농담이 아니었구나. 믿기지 않았다.
정말로 노엘이 내 목숨을 가지러 온 것이다.
***
“우린 이제 원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아. 돌아가 봤자 그 별장에서 나갈 수 없는 건 여전할 테니까.”
따듯한 커피를 들이켜며 조금 진정한 뒤였다. 드넓은 거실이 이렇게 꽉 찰 줄이야. 다 같이 우리 집 낮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노엘은 소파에 앉지 않고 굳이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새 보금자리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했어. 이건 결혼하면 말해 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 말하게 되었네.”
“어, 어떻게?!”
생각보다도 노엘은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을 마력석을 만들면서도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떠날 마력석 또한 제작했다.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마력석이 두 개 있어. 하나는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소멸해. 그걸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게 다른 하나야. 영구적으로 언제든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지.”
하지만 영구적인 마력석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하필 조건이 따라붙었는데, 빙의자만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일회성 마력석으로 한 번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어떤 환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긴 했다. 그래도 그 별장보단 낫지 않을까.
“어쨌든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돼 다행이야.”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마. 너도 같이 가야지. 새로운 집을 찾으면 거기서 나와 결혼해.”
올곧은 붉은 안광이 나를 강렬하게 잡아당겼다. 같이 갈 수 있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우린 어디로 가게 될까.
“노엘, 내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우리가 서로 닿으려면 네가 다시 빙의해야 해.”
그 말 한마디만으로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현재 내 몸과 노엘의 몸이 같은 존재가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닿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거겠지.
“내가 다시 빙의하면… 내 원래 몸은 죽게 된다는 거야?”
노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지금 가지고 있는 빙의 마력석이 하필 제물을 요하고 있어. 네가 빙의한 순간 원래 있던 몸은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럼 이번에 빙의하게 되면 다신 돌아올 수 없다는 거구나.”
“응. 다신 돌이킬 수 없어.”
어쩐지 손끝이 바르르 떨려 힘껏 주먹을 쥐었다. 마음이 심해 깊숙이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헤매고 있으니 토드가 눈치를 살피다 끼어들었다.
“저건 어떻게 처리할까?”
토드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니 현관 근처에 누군가 밧줄로 꽁꽁 묶여서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웃 남자였다. 놀란 나는 입을 막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괜찮아. 리사. 내가 잡아 왔어.”
내 옆에 앉아 있던 베키가 안심하라며 살며시 웃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 이웃 남자는 이중인격도 뭣도 아니었다. 노엘이 혹시 몰라 내게 경고하기 위해 한 말이었을 뿐, 그는 단순히 연쇄 살인마였다.
다음 표적이 나였다는 사실을 듣고 온몸의 살이 떨려 왔지만, 더는 무섭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처분을 두고 논의해야 했다.
남자를 경찰에 넘겨 봤자 속이 시원하지 않을 듯했다. 어차피 집에 다른 시신까지 있는 마당에 평생 감옥살이나 할 게 뻔했다.
“노엘, 차라리 네가 만든 지옥 감옥으로 보내 버리면 안 될까?”
노엘은 흔쾌히 가능하다며 답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입꼬리를 들썩였다.
남자는 노엘이 만든 지옥 같은 곳에서 평생 업보를 치르며 살아갈 것이다. 그에게 딱 걸맞은 엔딩이었다.
그럼 이제 내 엔딩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 우린 다시 보이지 않게 될 거야. 우리를 볼 수 있는 마력석이 더 이상 없기도 하고…. 제한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어.”
“그, 그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오래는 주지 못해. 우린 이틀 뒤 떠날 거야. 떠나기 전까지는 여기 네 곁에 있을 거니까… 외로워 말고 무서워하지도 않기로 해.”
다정한 노엘의 말을 끝으로 점점 녀석들의 몸이 희미해졌다. 이대로 사라지면 내가 다시 빙의하기 전까진 영영 볼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