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1층으로 내려가 핸드폰을 되찾기도 전, 침입자에 의해 무슨 짓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몇 명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섣불리 나갈 수는 없었다.
차라리 컴퓨터를 켜서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당장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실행시켰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메신저를 클릭하려 마우스를 가져다 댔는데, 갑자기 눈앞이 훅 캄캄해졌다.
컴퓨터도 방의 전등도 전부 꺼져 버렸다. 곧바로 다시 전원을 눌러 보았지만, 전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정전이라고…?”
달빛마저 우중충한 구름에 가리어 침침한 밤이었다. 다른 집도 다 불이 꺼져 있긴 했지만, 원래 늘 그랬기에 우리 집만 정전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려면 지하실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러려면 어쨌든 1층을 통해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짓을 벌였다간 내 심장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하다. 침입자의 함정일 수도 있고 하니 일단 저절로 복구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새벽 3시까지 뜬눈으로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란했던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끼익.
다시 1층 식탁의 육중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와 땀을 삐질삐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직 1층에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올라올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내가 문을 잠그고 있을 걸 알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 방의 열쇠라도 찾는 중인 건가.
하지만 이 방의 열쇠는 여기 책상 서랍에 있는걸.
이후로도 드문드문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정작 내 근처는 조용했던지라 쏟아지는 피로에 몸이 그대로 침대에 누워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 밑이 퀭한 것이 느껴졌다. 긴장으로 눈알이 빠질 것 같은 괴로움에 눈을 감고 있으려 노력하다 보니 문득 잠이 들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6시를 가리켰다. 조금만 버티면 드디어 아침이 올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을까.
꾸벅꾸벅 졸다가 정말 잠이 들고 말았다.
***
……?!
눈을 뜨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일어나 시간을 보니 저녁 8시였다.
“뭐야.”
온종일 잤어?
무거운 몸을 일으키니 꼬르륵- 밥 달라는 신호가 배 속에서 청명하게 울렸다.
정말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날 밝을 때 탈출 시도라도 해 보려 했었는데.
난 왜 내 집에서조차 탈출을 계획하고 있는 걸까. 왜 돌아왔는데 아직도 공포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냐고!
머리를 마구 헝클며 쥐어뜯었다.
“후…… 진정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는 거야.”
하나씩 차분히 해결해 보자.
일단 전기가 다시 들어오는지 방의 불을 켜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정전 상태였다. 어제와 같은 밤이 또 시작된 걸까.
더는 이렇게 있을 수 없었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까도 싶었지만, 차 키와 핸드폰이 전부 1층에 있었으니 이 고립된 지역에서 맨발로 뛰어 봤자였다.
이 동네의 경사진 언덕을 내려가면 보이는 건 호수뿐이었다. 버스 정류장이 있긴 했지만, 저녁 7시가 막차였다. 섣불리 맨몸으로 뛰쳐나갔다간 또 다른 공포물을 찍는 수도.
그래도 당장 위협은 피할 수 있을 테니 염두에 두고 있다가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면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30분 동안 그렇게 숨죽이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도 1층에서 가끔 소리가 들려올 뿐, 내가 있는 2층은 고요했다. 그러니 조심스레 나가서 아래를 살펴봐야겠다.
아주 천천히 문을 열고 숨을 참았다. 한 발 한 발 거북이보다도 느리게 걸음을 옮겨 드디어 계단을 내려갔다. 소리 내지 않으려 이 겨울에 양말까지 벗은 상태였다.
계단을 반 정도만 내려와 허리를 접고 아래를 살폈다. 아직까진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소란스러웠던 소리에 비해서 어지럽혀진 흔적도 전혀 없었다.
대각선 방향의 현관을 바라보니 신발 옆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차 키를 식탁 모서리에 고정적으로 두었기 때문에 부엌으로 가야 했다.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나는 계단을 전부 내려왔다. 바로 보이는 거실은 아무 이상 없는 듯했다.
현관의 핸드폰은 나갈 때 주워 들면 되니 차 키부터 가져오려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침입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막상 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깨져서 바닥에 나뒹굴어야 할 유리 조각조차 단 하나도 없이 깨끗했다.
‘대체 뭐지…?’
무엇이 깨지긴 한 건지 그릇장을 열어 확인해 보려 했지만, 곧장 손을 멈추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여 식탁으로 가 차 키가 있을 자리에 시선을 옮겼는데, 어째선지 차 키가 보이지 않는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 바로 현관의 핸드폰을 주우러 가니 다행스럽게도 핸드폰은 그대로 있었다.
“하…!”
문제는 핸드폰이 꺼졌다는 것이었는데 정전이 된 마당에 충전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일단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지하실로 내려가 전기 차단기를 살펴볼지 고민했다.
그래도 1층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니 용기가 났다.
1층은 창이 워낙 커서 불을 밝히지 않아도 꽤 밝았지만, 지하실은 어두우니 손전등을 챙겨야 했다. 부엌의 수납장 어딘가에서 굴러다닐 것이다.
‘왜 안 보이지? 여기가 아니었나.’
하도 오랜만에 찾다 보니 영 보이질 않는다. 거실 수납장에 있나 싶어 다시 거실로 가려는 찰나, 지나치려던 식탁 벽에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 번 지나치며 식탁 위만 봤지, 벽에 뭐가 붙었는지는 이제야 알아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또 장난질을 치려는 걸까 싶어 종이를 떼어내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네가 날 찾지 못했으니 이번엔 내가 술래 할게. 지금부터 내가 널 찾으러 갈 거야.>
……!
두 줄을 읽자마자 심장이 쿵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머리카락까지 한 올 한 올 떨리는 기분.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진짜 잘 숨어야 해. 이번에 나한테 걸리면 네 목숨을 거두어 갈 거야.>
‘내 목숨을 거두어 간다고…?’
역시 침입자의 소행인 걸까. 뜀박질 치기 시작한 심장을 간신히 다독이며 마지막 남은 두 줄을 마저 읽어 내렸다.
<또 뻔하게 옷장 같은 데 숨지 말고.>
……?
<사랑해.>
……!
“노엘?”
어째서 또 노엘이 떠오른 걸까. 여기 있을 리 없는데.
하지만 노엘이 확실하다는 직감이 고개를 들었다. 대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어디선가 검붉은 장미의 향이 코를 스치며 날아들었다.
종이에 코를 대어 보니 정말 그 향이 났다. 종이에 밴 향이었다. 일부러 묻히지 않고서야 이렇게 향기가 날 리 없었다.
“노엘.”
어둑한 허공에서 울리는 애틋한 이름에 다시 서글픈 마음이 떠올랐다.
정말 여기까지 날 쫓아오기라도 한 거라면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데 내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 문장 때문에 마음껏 그를 보고 싶어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내 목숨을 대체 왜. 날 죽여서라도 다시 데려가겠다는 걸까? 그런데 꼭 죽여야 하는 거야? 아니면 화가 난 건가.
‘정말 날 죽일 거라고…?’
아무리 이해하려 애를 써도 믿기지 않았다. 분명 노엘이 남긴 메시지가 확실해 보이는데.
그때였다.
짹짹짹짹짹!
초인종이 눌렸다. 벽걸이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었다. 참새 무리가 내 심장이라도 쪼아 먹는 듯한 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타이밍으로 보아하니 노엘이 아닐까 하는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했지만, 초인종을 누른 이는 노엘이 아니었다.
이웃 남자였다. 바로 아래 저택에 사는 훈훈하니 순하게 생겼던 그 남자. 어제 날 열받게 했던 그 남자.
말처럼 정말 다른 인격이 나온 걸까? 의문이 들어 응답하기가 꺼려졌다. 그냥 이대로 자거나 집에 없는 척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가만히 지켜보았다.
인터폰 화면을 통해 그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렀다.
짹짹짹짹짹!
‘시끄러워 죽겠네. 그만 좀 가지!’
이번에도 내가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남자가 돌아섰다. 순순히 돌아가려나 싶어 마음을 놓으려던 순간, 그가 갑자기 홱 돌아서서 자길 비추는 카메라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헉…!’
모니터를 통해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화들짝 놀라 비명 지를 뻔했던 입을 아슬하게 틀어막았다.
남자의 눈이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의 혼이라도 들어선 것 같은 그 눈은 초점도 맞지 않거니와 눈동자가 양쪽 밖으로 튀어 나올 듯이 기괴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렇게 잠시 화면을 노려보던 남자는 저벅저벅 걸어 벽을 지나 거실의 통창 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발소리를 잠잠히 듣다가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당장 거실의 통 창문이 잘 잠겨 있나 확인하려 내달렸다.
이중 커튼을 급히 열어젖혀 잠금장치를 확인하니 다행히 잘 잠겨 있었다. 그리고 안심할 새도 없이, 창문 밖의 남자가 정확히 내 앞으로 멈추어 섰다.
밖의 유리에 바짝 다가온 그는 양손을 망원경 모양으로 말아 제 눈알에 갖다 붙여 안에 있는 나를 들여다보았다. 손안의 동그랗게 치켜뜬 두 눈알이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발광했다.
“악!”
황급히 한 걸음 물러난 나는 재빨리 커튼을 이중으로 빈틈없이 닫아 버렸다. 남자가 내 눈에 보이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