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나는 손을 떨며 종이를 다시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샅샅이 뒤졌다.
“노엘…?”
그 이상한 소리는 노엘이 낸 기척이라도 되는 걸까. 종이에는 노엘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아닌 다른 이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노엘!”
방까지 올라간 나는 내 방의 벽장을 주저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곳에도 내 옷만 걸려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바짝 엎드려 집 안의 침대 밑도 전부 확인하고 다녔지만, 발생했던 이상한 소리조차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혼자라 쓸 일이 없던 3층까지도 올라가 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1층으로 내려왔다.
내가 착각한 걸까. 노엘일 리가 없는데.
그럼 대체 누구지…?
식탁으로 가 종이를 다시 살피려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놓아둔 곳은 내가 헛것이라도 보았다는 듯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절대 내가 허투루 본 게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그럴 리 없었다.
이 집에 나 외의 다른 누가 숨어든 게 아닐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며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견딜 수 없는 위화감에 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싶어 현관으로 곧장 내달렸다.
그런데 내가 문손잡이를 잡기도 전, 밖에서 누군가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열리는 문틈으로 반가운 얼굴이 씩 웃었다.
“너 이렇게 폐인처럼 있을 줄 알고 놀러 왔지!”
나 말고 현재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공포 게임에 빙의하기 전, 경고를 해 주었던 바로 그 친구이기도 하다.
“하. 진짜… 놀랬잖아. 말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오면서….”
“나도 원래 집에서 폐인처럼 보내려 했는데…. 그냥 갑자기 막 여기 오고 싶더라고. 여기서 좀 더 가면 이모네니까. 이모도 뵐 겸 들렀어.”
“하여간 대단해.”
그녀는 소파에 누워 제집처럼 편하게 발을 뻗었다. 한두 번 놀러 온 게 아니어서 그런지 아주 익숙했다.
그런 그녀에게 보리차를 데워 내어 주니 좋다고 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몇 모금 들이켜다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여 덩달아 긴장했다.
“왜?”
“여기 나 말고 누가 또 왔어?”
……?
순간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그녀의 팔뚝을 잡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또 이상한 말을 할까 봐 새삼 불안해진 탓이었다.
저번처럼 이상한 말이 또 맞아 들어갈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얘가 진짜! 너 말고 올 사람이 어딨다고.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정말이야? 우리 둘 외에 아무도 없다고?”
“그렇다니까.”
“이상한데……. 뭔가… 여기에 바글바글 무언가가 잔뜩 있는 것 같아.”
“바글바글…? 야, 하지 마. 진짜 무섭단 말이야. 또 놀리려는 거면 그만해.”
그녀는 내 심각한 반응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내 폭소했다. 그 폭소에 급속도로 안심이 된 나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 진짜. 너 놀리는 게 난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몰라.”
“야! 나 정말 심각했거든? 그렇지 않아도 공포 게임에서 탈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단 말이야.”
술술 나온 말에 순간 아차! 싶었는데. 그녀로선 단순히 게임을 한 것으로 알아듣겠거니 싶었다.
“결국 내 말대로 새벽 3시에 빙의하게 된 거구나. 하필 공포 게임을 보고 있었단 말이지? 얼마나 잘생겼길래 평소에 하지도 않던 공포 게임을 다 찾아보셨대.”
“응…?”
뭐야.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빙의했다는 말도 안 했는데.
역시 또 놀리려는 수작인가.
“잘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했지.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게 아주 내 취향 범벅이었어. 얼마나 내 생각을 해 주는지 몰라. 이 세상에 날 그렇게 미치도록 좋아해 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
노엘의 얘기를 하자니 자연스레 그가 떠올라 가슴이 욱신거렸다. 친구가 내 침울해진 눈빛을 보고 언제 놀릴지 몰라 긴장했는데,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나보다도 진지했다.
“아주 푹 빠졌구나. 그래서 결혼도 했어?”
“겨, 결혼이라니.”
“그거 결혼반지 아니었어?”
“응?”
친구의 턱짓을 따라 내려가니 내 손가락에 끼워진 장미 모양의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끼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
청혼 겸 약혼을 진행하며 노엘이 끼워 주었던 커플링이었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탈출하는 순간 그곳에서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이 반지만 가지고 오게 된 건지 알 길이 없어 당황스러우면서도, 반지의 존재 자체는 반가웠다.
“너 그거 알아?”
반지를 내려다보며 추억에 젖어 있자, 친구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몰라! 알아도 안 들을 거야. 또 이상한 말 하려고 그러지? 진짜 하지 마라.”
또 시작이었다. 애써 말렸지만, 그녀의 주둥이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더욱 즐기기라도 하는 듯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랑과 죽음의 술래잡기라는 게 있어. 그 게임은 둘 중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
“그래, 알았으니. 거기서 멈춰. 더는 말하지 않아도 돼. 관심 없다고!”
나는 귀를 막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러니 이 생에 대한 미련이 있다면 죽임을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 쳐야 한대.”
“대체 그런 말들은 어디서 주워듣고 다니는 거야.”
결국 다 들어 버리고는 팔에 촘촘히 솟아오른 닭살들을 쓰다듬는 중이었다.
친구는 할 말을 다 마쳤다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바람에 또 무슨 말을 하려나 허리를 바짝 세웠다.
“리사, 우린 어디에 있어도 친구란 사실은 변함없는 거 알지?”
“그럼. 당연하지.”
새삼스럽게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고는 부드럽게 웃는 그녀였다. 어쩐지 따듯한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네가 아무리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 가끔 널 떠올릴 거야. 그리고 응원할게. 네가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뭐야…….”
갑작스레 낯간지러운 말을 하니 미간과 입술이 떨렸다. 코끝마저 찡해져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얘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그 게임이 끝나면 나한테 꼭 결말을 말해 줘야 해. 알았지? 전화는 됐고 꼭 메일로 보내 줘.”
“그냥 아까 그 말만 하고 멈췄으면 분위기 좋았을 텐데.”
눈물이 날 것 같다가 게임이라는 저 한마디에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치 내가 저 사랑과 죽음의 어쩌고 게임을 하는 중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리고…. 내년 크리스마스엔 나도 빙의하러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거든.”
나는 그 말에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잡고 신신당부했다.
“네 말! 그거 진짜였거든? 그러니까 진짜 신중하게 해야 해.”
“그러지 않아도 오늘 새벽에 시도하려 했다가… 네가 생각나서 하지 못했어.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내년으로 미룬 거야.”
“……고마워해야 하는 거 맞지?”
“그렇지. 난 너 행복해지는 거 보고 갈 테니까. 너도 잘 좀 해 봐.”
“그래, 나도 네가 제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진짜 빙의할 거면 신중하게 해. 너 남자 취향이 하도 이상해서 걱정된다고.”
“네가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
어쩐지 우리 둘의 대화를 제삼자가 듣는다면 틀림없이 이상하게 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스스로조차 현실과 괴리감이 들어 정신이 안녕한 건지 한 번씩 의심이 든다.
친구는 그 뒤로도 한참을 재잘재잘 떠들고 파스타를 해 먹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집을 떠났다. 아쉬운 마음에 자고 가라고 했지만, 이모 댁에 들러야 한다며 바삐 가는 걸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친구를 보내고 나니 어둑해진 밤이 오늘따라 더욱 음산했다. 무서운 소리를 늘어놓고 간 녀석이 조금 얄미웠지만, 진심은 처음 듣는 것 같아 마음이 싱숭생숭 술렁였다.
차라리 친구랑 같이 떠날 걸 그랬나 보다. 왜 이제야 생각한 건지.
그러고 보니 그 종이에서 오늘이 가기 전까지 찾아보라고 했었는데….
하지만 그렇게 다 뒤지고 다녀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무시해도 되려나?
특별히 내가 못 찾아냈다고 해서 불이익이 생긴다는 내용은 없었다.
짹짹짹짹짹!
답답해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러 화들짝 놀랐다. 요란한 저 참새 초인종 소리는 참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누구지…?
혼자 사는데 이런 시간에 누군가 찾아오면 몹시 껄끄럽고 불편하기 마련이다.
작은 화면에 뜬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아래 저택의 남자였다. 무슨 일일까. 아무리 친절했던 이웃이라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다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문을 열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 크리스마스를 이대로 보내기는 아쉬워서요.”
“그런데요?”
“혹시… 불꽃놀이 좋아하세요? 동생이 하도 졸라서 같이 하려는데….”
“고맙지만 전 괜찮습니다.”
“아까 만난 얘기를 했더니 여동생이 자기도 만나 보고 싶다며 좋아하더라고요. 지금 기다리고 있을 텐데. 틀림없이 즐거울 거예요!”
겨울에 불꽃놀이라. 나가서 산다던 누나만 있는 줄 알았더니 같이 사는 동생도 있었구나.
남자가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움직여 긴 막대 뭉치를 내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 날 선 말을 내뱉은 게 약간은 후회되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집 앞마당에서 준비하고 있을게요.”
“네. 그리로 갈게요.”
어차피 바로 코앞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이 어수선해서 혼자 있기가 꺼려진 참이었다. 시간도 안 가는 마당에 마침 잘됐다.
여동생도 같이 있다고 했으니 경계심보단 친근함과 반가움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잠시 어울려 볼까, 하는 생각에 옷을 챙겨 입었다.